기고

이헌재의 ‘낭만적 재벌관’

2012.10.22 20:59 입력 2012.10.22 23:32 수정
문인철 | 재벌경제연구소장

지난 17일 한 포럼에서 말한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의 강연내용이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안철수 대선 후보의 경제 멘토로 알려져 있어 그의 말은 더욱 이야깃거리가 되는 것 같다. “재벌해체는 불가피하다. 인위적으로 해체하지 않아도 재벌은 자연스럽게 분리될 수밖에 없다. 기업을 이을 후손이 많아서이다.” 언뜻 그럴듯하다. 한 그룹을 여러 개로 분리해 후손들에게 나눠주면 자연히 재벌해체가 될 것 같기도 하다.

외동아들이나 외동딸만 두고 있으면 모를까 자식이 여럿이어서 따로 따로 분가하면 재벌이 점차 해체될 것 같은 생각이 실제로 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재벌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낭만적 사고였다는 것을 알게 되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기고]이헌재의 ‘낭만적 재벌관’

오늘의 현대가를 만든 정주영 회장에게는 5명의 남동생과 1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이들 모두 현대의 창업공신으로 활동하다가 분가했다. 분가해서도 현대의 일감몰아주기로 재벌의 반열에 올랐다. 한라그룹·만도가 있고, 현대시멘트·성우그룹, 현대산업개발그룹, KCC가 형제들이다.

정주영 직계로는 현대자동차그룹, 현대백화점그룹, 현대그룹, 현대중공업그룹, 현대화재해상보험 등 모두 9개 그룹이 있다. 이들 현대가문은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의 17.5%(2011년)를 차지한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은 4남6녀의 자식을 두었다. 3남은 삼성을 물려받았고, 장녀는 한솔로, 장남은 CJ로, 5녀는 신세계그룹으로 분가했다. 삼성그룹뿐만 아니라 분가한 자녀들 모두 재벌의 반열에 들어선 지 오래다. 삼성가문의 자산은 우리나라 GDP(2011년) 비중의 22.9%에 이른다. 현대가와 삼성가, 두 가문의 경제적 비중은 GDP의 40%를 넘는다. 자연스러운 해체가 아니라 재벌체제가 더욱 견고해졌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재벌 두 군데만 봐도 재벌이 자연스럽게 해체될 것이라는 생각이 얼마나 순진했는지 바로 알게 된다.

재벌들이 중소기업 업종이나 골목상권에 진입하고자 하는 것은 분가할 후손들을 위해서이다. 일감몰아주기로 덩치를 키운 다음 분가시키려는 그들만의 자식사랑 방식이다. 기존에 하고 있는 산업은 후계자인 자녀에게 주고 나머지 자녀에게는 새로운 분야를 두드릴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반복되면 빵집뿐만 아니라 일정 규모 이상의 산업에는 재벌후손들이 모두 진출하게 된다. 재벌해체가 아니라 재벌가문에 의한 시장 확산이 더욱 커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재벌의 자연적 해체를 주장하는 것은 현 재벌체제의 존속을 바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헌재 전 부총리가 누구인가. 안철수 대선 후보의 멘토 아닌가. 안철수 후보 캠프에서는 연일 재벌개혁에 대해 고강도 공약을 쏟아내고 있다. 거의 재벌해체를 주장하는 수준이다. 안철수 후보의 생각을 듣고 싶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