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오래된 미래

2015.03.08 20:30 입력 2015.03.08 20:34 수정
구갑우 | 북한대학원대 교수·정치학

1949년 4월9일 북한의 소설가 한설야(韓雪野)는 동료 두 명과 함께 프랑스 파리를 향해 출발했다. 한설야 일행은 소련의 연해주에서 비행기를 타고 모스크바로 이동하여 사증 발급과 기타 준비 관계로 며칠을 체류했다. 4월19일 모스크바를 떠나 여섯 시간 정도 지나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 도착했다. 프라하에서 프랑스 대사관에 들러 프랑스 입국을 문의하자 파리에 당신들의 대사관이 있느냐는 질문 등과 함께 입국 승인에 수일이 걸릴 수도 있다는 대답을 들었다. 4월22일 프랑스 정부로부터 입국허가를 받았고, 그날 오후 비행기로 파리에 도착했다. 14일이 걸린 여정이었다.

[정동칼럼]북한의 오래된 미래

한설야 일행이 파리로 간 까닭은, 1949년 4월20일부터 개최된 평화옹호세계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평화옹호세계대회는, 무당파적으로 변모했다는 해석도 있지만, 소련 및 동서 유럽의 지식인을 중심으로 미·소 대립이란 진영론에 기초하여 반전평화를 추구하는 평화운동이었다.

평화옹호세계대회의 의장이었던 핵물리학자로 노벨상 수상자였던 프레데릭 졸리오 퀴리의 보고 핵심은, 반전반핵과 군비축소였다. 4월25일 한설야는 북한 대표단 수석 자격으로 발표를 했다. 주요 내용은 평화옹호세계대회의 기조와 동일했지만, 한설야는 평화운동의 보편성 수용과 더불어 평화운동을 한반도적 맥락에서 통일운동으로 번역하고 있었다. 북한은 평화옹호세계대회 전인 1949년 3월 평화옹호전국연합대회와 1949년 6월 한설야 일행의 귀환보고에서도 평화담론과 한반도 특수적 통일담론을 결합했다.

북한판 평화담론에서 반핵은 1947년경부터 시작된 의제였다. 1949년 8월 소련이 핵실험을 하자 북한은 이 실험에 찬성했고 따라서 핵무기에 대한 이중적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핵무기 금지를 목표로 한 국제적 평화운동에 참여했다. 1950년 3월 평화옹호세계대회 상설위원회가 핵무기의 무조건적 금지와 핵무기의 국제적 통제라는 간략하지만 대중적 설득력을 담지한 스톡홀름 호소문을 작성하고 서명운동을 전개하자, 북한은 국내의 각 지역에서 각계각층을 동원하는 군중대회를 통해 이 서명운동에 참여했다.

1950년대 초반은 북한이 한국전쟁을 준비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북한판 평화담론의 이중성과 근본적 결함을 생각하게 하는 두 계기다. 한국전쟁의 와중에도 북한 정부는 빈과 베이징에서 개최된 평화옹호세계대회와 아시아·태평양지역 평화옹호대회에 한설야를 파견했다. 전쟁 기간 미국을 ‘승냥이’로 묘사했던 한설야는 이 대회들에서 평화에의 염원, 평화의 감정과 같은 수사를 사용하곤 했다.

반핵에 동의했던 과거의 북한은, 탈냉전 세계에서 세 차례의 핵실험을 거치며 현재 핵국가의 지위를 요구하고 있다. 현재의 북한은 핵보유를 헌법에 명기했고, 핵보유를 영구화하겠다고 선언한 상태다. 평화운동이 부정할 수밖에 없는 힘의 균형 논리로 북한은 핵보유를 정당화하고 있다. 1962년 숙청된 한설야는 북한에서는 희귀한 복권의 기회를 맞이했지만, 국가건설 시기에 김일성을 형상화한 소설을 쓴 작가, 반핵이 아니라 ‘핵대결전’ 운운하는 북한 소설의 원조 정도로만 기억되고 있다.

2008년 12월 이후 핵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조차 열리지 않고 있다. 북한은 핵능력을 강화하고 있다. 2013년 2월 북한이 3차 핵실험을 한 이후, 중국 주도로 6자회담을 재개하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이 시도는 실패했다. 물리력에 물리력으로 맞서는 힘의 균형정책 또는 힘의 우위정책을 선택하는 것이 견뎌야 하는 현실이라면, 현 상태의 지속 이외의 다른 대안은 없다.

그러나 안보딜레마가 야기하는 정치경제적 손실 및 평화감수성의 훼손을 생각한다면, 한반도 비핵화를 추동하는 제도적 장치를 복원하는 것이 이익이다. 예를 들어 박근혜 정부의 신성장동력인 동북아평화협력구상은 북한을 포함한 동북아 다자안보협력이 부재한 조건에서는, 구상으로만 남을 수밖에 없다.

동북아 다자안보를 협상하는 새로운 제도를 만드는 비용을 고려한다면, 6자회담 재개가 적절한 길이다. 한국이 중견국가로서 다자안보협력을 지향하는 규범과 규칙을 만들어갈 때, 현재의 북한에 오래된 미래를 상기시켜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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