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금 출연과 기업의 자발성

2016.09.29 21:20 입력 2016.09.29 21:30 수정
하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정동칼럼]기금 출연과 기업의 자발성

대학교수인 학회장이 국제학술행사 후원 명목으로 기업에 협찬을 요구해 받았다면. 청탁금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이른바 ‘김영란법’)에서 금지하고 있는 금품요구·수수인가? 정부가 기업에서 농어촌 상생기금을 모으면 합법인가? 박근혜 대통령의 청년희망펀드는 문제없는 모금인가? 청와대 고위인사가 기업에 문화재단 설립 출연금을 요구하는 행위는 허용되는가?

이러한 행위들은 청탁금지법 위반일 수 있고, 형법상 직권남용죄나 뇌물수수에 해당할 수 있다. 물론 청탁금지법은 금품이 공직자 등 개인이 아니라 기관이나 법인에게 귀속되는 경우는 금지하고 있지 않고, 공직자의 공적 지위와 사적 이익 추구와의 이해충돌 조항도 빠졌다. 그러나 청탁금지법 시행으로 돈을 주는 기업이나 받는 공직자 등은 조심해야 한다. 기존의 관행을 완전히 벗어버려야 하는 대한민국의 청탁·접대문화는 2016년 9월28일 이전과 이후로 구분될 것이다. 모두들 혼란스러워하지만 간단하고 분명하다. 각자에게 몫을 주는 것이 정의라면, 정답은 각자가 자기의 몫을 계산하는 것이라는 사실만 늘 생각한다면.

기업이 사회공헌 차원에서 공익재단에 기금을 출연했다면 문제되지 않는다. 학교법인이나 학회, 공익재단 등에 발전기금이나 기부금을 내는 것은 권장할 일이고 법상 허용된 일이다. 기업에 이익을 가져다준 사회와 그 구성원에게 그 이익의 일부를 되돌려 주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이윤추구가 절대선인 기업에 이를 기대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 ‘윤리경영’, ‘사회공헌’이라는 좋은 이름을 붙여 권장하고 장려하는 것이다.

군사정권 시절부터 지금까지 정부는 이런저런 명목으로 기금을 조성하고 기업들로부터, 때로는 국민들로부터 불우이웃돕기 성금과 같은 각종 성금을 걷어왔다. 기업에는 분담금이고 준조세였던 것이 사실이다. 문제는 자발성이다. 지금 정치적 이슈가 되고 있는 문화재단인 미르·K스포츠재단에 기업이 할당받은 출연금을 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한류 확산과 스포츠 교류의 활성화를 목적으로 설립된 재단의 설립주체와 배경에 의혹이 쏠리면서 기부행위의 자발성이 논란거리다. 비선 권력실세가 재단 설립에 개입하고 청와대 참모가 자금 조성에 관여했다는 의혹이 일부에서 불거지면서 논란이 증폭되고 있다.

아마도 대기업들은 순수한 자발성이 아니라 전략적 자발성으로 거액의 출연금을 냈을 것이다. 기업 활동에 공짜가 어디 있겠는가. 공연티켓을 공짜로 돌리지만 홍보 전략차원이고, 상응하는 대가가 있을 거라는 믿음 때문에 그런 것이다. 불우이웃돕기 성금도 마찬가지다. 정말 측은지심으로 엄청난 회사 돈을 성금으로 냈다고 보기는 어렵다. 소비자에게 기업이 무언가 선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 기업이미지 제고와 궁극적으로는 소비로 연결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세계적인 경기 둔화와 내수시장 불황 등 경기침체 장기화 속에서도 기업의 사회공헌 규모가 플러스 성장이라고 한다. 사회공헌활동으로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모습은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박수받을 일이다. 하지만 사회공헌 비용지출이 자발적인지가 문제다. 기업의 이미지 제고나 어느 모로 보나 기업 활동과 전혀 상관이 없을 것 같은 재단설립에 거액의 출연금을 내는 것은 울며 겨자 먹기일 가능성이 크다. 재벌의 팔을 비틀어 지갑을 열게 해야만 강제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강제성은 없지만 분위기상 내지 않을 수 없었던 정신적 압박은 자발성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내야 하는, 내지 않으면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도록 가하는 유무형의 압력이 있었다면 강제모금이다. 잘 보일 필요는 없지만 밉보이지 않기 위한 기부금은 당연히 비자발적이다.

청와대가 나서거나 권력을 사유화한 비선 실세가 등장하면 기업은 이런 압력을 느낄 것이다. 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대가 없는 돈은 없고, 돈은 이익이 나는 곳으로 흐른다. 이렇게 해서라도 당장 기업에 불이익이 없으면 기업에는 좋은 일일 수 있지만 정경유착이야말로 기업의 경쟁력을 갉아먹는 좀벌레다. 진정 기업 활동을 옥죄는 것은 규제가 아니라 권력을 동원한 반강제성 기부금, 바로 준조세다. 합법성을 가장한 징세다. 대통령의 측근이나 친분관계를 내세워 호가호위하며 기업들을 겁박한 것이라면 자신이 이익을 취한 것이 아니라서 그렇지 공갈죄 수준이다. 왜 나쁜 역사는 꼭 반복되는 것인지, 과거의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하는 것인지 답답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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