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아이히만’들

2017.04.02 20:50 입력 2017.04.02 20:52 수정

세월호가 올라왔다. 침몰한 지 1073일 만이다. 만신창이가 된 선체는 찢긴 당사자들의 실존이자 시민들의 마음이다. 그리고 목포신항으로 세월호가 움직이기 시작한 그날, 박근혜 전 대통령은 구속되었다. 진정 그는 발전국가, 재벌독과점, 군사 독재체제라는 박정희 시대의 유제들을 다 끌어안고 역사 속으로 침몰했는가. 일부 ‘악’의 세력을 단두대에 올린 것으로 우리의 할 일은 끝난 것인가.

[정동칼럼]우리 안의 ‘아이히만’들

한 대선주자는 벌써 ‘용서’ 운운하며 보수세력의 결집을 요청하고, 또 다른 당 대표는 가슴이 아프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남은 일은 무엇인가. 갖은 국정농단에도 구속되지 않은 이들, 권력 창출에 적극 가담하고 중심에서 각종 특혜를 누리던 자들, 주변에서 권력의 부스러기를 받아먹으며 호의호식하던 이들을 마저 처단하는 것인가. 지배계급의 유지와 보호에만 골몰했던 관료들, 대기업과 결탁하여 사욕 추구에만 급급했던 정치인들, 오로지 이윤 추구만을 위해 노동자들을 쥐어짠 기업인들, 권력과 결탁하여 스스로 부패한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검사들, 이들과 한패가 되어 공공선과 공공성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스스로 훼손하고 곡학아세에만 몰두한 언론인들. 이들을 한 명씩 솎아내면 적폐는 청산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세종로에서 태극기와 성조기를 나란히 흔들고, 삼성동에서 눈물을 흘리는 회고적 보수 일반은 어떻게 할 것인가.

아직도 우리 안에는 수많은 ‘아이히만’들이 존재한다. 독일 나치 친위대 장교였던 아이히만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 및 독일 점령하의 유럽 각지에 있는 유대인들을 체포하여 강제이주를 계획하고, 집단학살을 지휘했던 인물이다. 유태인 출신의 미국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관찰했듯, 아이히만은 상사의 명령에 의심하지 않고 복종하는 평범한 개인이었다. 오로지 지위와 경력 등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고 이익을 증대시키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던 그는 근면한 ‘직장인’이거나, 믿을 만한 동네 ‘아저씨’, 책임감 있는 ‘가장’이었다. 그러나 타인의 입장에서 사고할 수 없는 무능력함, 다른 이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과 공감 불능, 심지어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깨닫지 못하고 주어진 일의 수행이 가져올 결과를 고려하지 못하는 ‘무사유’가 바로 끔찍한 재앙을 초래한 것이다.

악은 타고난 것이 아니다. 특정인, 특정집단의 특수한 속성도 아니다. 자신과 가족의 ‘안전과 안락한 생활만 보장된다면 어떤 일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은 언제든 자기도 모르게 악의 세속적 구현에 참여할 수 있음을 아렌트는 이미 오래전 경고한 것이다. 결국 빈번한 전쟁과 참혹한 학살뿐만 아니라 일상 속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갖은 부정의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운명에 무관심한 채 자신의 일만 기꺼이 수행하면서 살아가는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사실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권 동안 점점 더 거대해진 차별과 혐오, 배제와 불평등이라는 이름의 바벨탑은 어쩌면 우리 안의 수많은 아이히만들이 쌓아 올린 것일지 모른다. 이들은 사회적 약자들을 절대적 타자로 만들고, 이들과의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서슴없이 모욕감을 주며, 시민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하는 자존감을 박탈하고 생존을 위협하는 행위를 아무런 죄책감 없이 행했다. 민주주의를 참칭하며 스스로를 ‘선’으로 자처하고 ‘악’의 세력을 지목하여 ‘단죄’하기까지 한다. 동질성을 기반으로 한 무분별한 찬양과, 차이를 기반으로 한 ‘묻지마식’ 혐오가 이들의 주특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범한 가장과 이웃, 부모와 시민의 모습을 하고 있기에 알아보기가 쉽지 않으며 공식적 비판도 어려웠다.

다행히도 ‘세월호 사태’를 통해 우리는 극적으로 이들과 대면하게 되었다. 살아있는 삶이 꺼져가는 현장에서 우리는 현재의 아픔과 미래에 올 자신의 죽음을 마주했고, 죽음 뒤에 서 있는 아이히만의 얼굴을 생생히 보았다. 구조적 폭력으로 사라져가는 타자의 존재, 바로 그 순간을 함께했던 생존자이자 목격자로서 우리 모두는 ‘세월호 세대’다. 촛불시민이 광장에서 그리 오랫동안 ‘박근혜 내려가고, 세월호는 올라오라’고 목 놓아 외친 이유는 그래서 너무 자명한 것이 된다. 타인의 고통과 죽음에 대한 공감의 연대를 넘어 죄책감의 연대를 구성했던 우리는, 이제 스스로에게 요청해야 한다. 내 안의 아이히만들에게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묻는 일. 새로운 ‘나라’ 건설에 대한 희망의 내러티브는 바로 그 지점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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