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살리는 페미니즘

2020.03.01 21:09 입력 2020.03.01 21:10 수정

어느 것도 내 것이 아닌 것 없건만 무엇도 ‘나’는 아니었던 시기, 페미니즘을 만났다. 내 삶을 이해하기 위해, 답답함의 근원을 알기 위해 책을 읽기 시작했다. 페미니즘의 역사를 만나면서 개인적 성품에 덧입혀진 ‘여성성의 신화’와 ‘행복한 가족 이데올로기’를 직시하게 되었다. ‘생물학이 운명’이라는 정언명령,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는 탄식이 성차별을 정당화하는 방식 중 하나임도 알게 되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놀이로, 만화로, 동화책으로, 드라마와 영화로, 부모님과 교사들의 잔소리로, 동무들의 탄식으로 체현된 주제가 비로소 배반당하는 순간이었다. 죽어가던 나의 자아는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

[정동칼럼]사람을 살리는 페미니즘

페미니스트들을 만났다. 오랜 과거부터 진행된 그녀들의 질문과 저항의 역사를 접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 대한 의구심은 그들을 집 밖으로 작업장 밖으로 정신병동으로 감옥으로 화형장으로 내몰았지만, 켜켜이 쌓이고 쌓인 변화의 열망이 하나하나 새로운 문을 열어젖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개인은 너무도 취약하고 불안하고 외롭지만 비슷한 희망을 품은 자들과 연대하고 멈추지 않고 나아갈 때 어떤 놀라운 변화가 만들어졌는지도 알게 되었다. 심리적 원인이라는 것도 사실은 상당 부분 사회적 제약과 연결되어 있으며 구조의 작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또한 구조적 제약의 결과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의 용기 있는 도전으로 바뀐 세상의 수혜자는 무지하거나 무시해 온 이들까지 포괄적이었지만, 이들로부터 다시 비난받고 배척당한 슬픈 역사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페미니즘은 개인적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으되 공감하는 어떤 누구와도 손잡으며, 어떤 세계에도 도달해야 할 가장 윤리적 지향 중 하나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페미니즘은 지금 이 순간과 공간에 있는 나란 존재를 설명하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특정 집단의 소유물도 고정된 하나의 사상도 과거에 고착된 운동도 아니다. 도전하고 파괴하고 재조립하고 완전히 독자적인 것을 만들어내며 다시 다른 것들과 연결 지으며, 당대성을 지니되 과거를 환기하고 미래를 향하되 오늘을 잊지 않는 집단적 움직임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의 역사를 읽으면서 나의 위치도 알게 되었다. 가족과 사회, 국가와 전 지구적인 서열구조 안의 나를 인지하게 되었다. 식민지와 전쟁을 겪고 냉전체제가 작동하는 동아시아 작은 분단국가, 군사독재의 잔재가 여전하고 봉건 가부장 문화와 서구의 보수개신교 문화가 묘하게 착종된 곳의 중산층 전업주부였다. 이 위치성은 이후 미국으로 이동하면서 함께 움직였다. 나는 유색인종 싱글맘 ‘가난한’ 페미니스트 대학원생이 되었다. 한 번도 인종성을 의심받거나 성정체성에 질문받지 않았던 나는 비로소 또 다른 정체성이 나를 구성해 왔음을 깨달았고, 어떤 정체성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만들어지기도, 갑자기 두드러지기도, 때로는 비가시화되기도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차별과 억압의 대상이 되어야만 할 때 어떤 정체성은 벼락처럼 문제가 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다른 피부색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문제가 되어야 하고, 성별 자체가 문제시되어야 지켜지는 위계질서를 알게 되었다.

‘더러운 ××’라는 욕설과 손가락질이 사실은 사회적 희생양을 만들어내는 방식임도 알게 되었다. 혐오의 투사가 사회적 낙인과 배제, 구조적 차별의 원인이자 결과임도 알게 되었다. 아무리 문명을 발전시킨다 한들 신이 될 수 없는 인간의 존재론적 취약함이 죽음을 상기하는 모든 것들을 타자에게 투사하고 사회적 약자를 끊임없이 생산해 왔다. 권력이든 돈이든 무엇을 가진다는 것이 힘이 되고, 그 힘만이 개인의 안위를 보장한다고 믿어지는 위계적 사회에서, 사람들은 스스로의 안전과 안녕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타자를 짓누르고 빼앗고 착취해 왔던 것이다. 해결 불가능한 불안이 해석 불가능한 대상에 대한 공포와 결합될 때, 타자는 가장 손쉬운 방식으로 ‘원인’으로 지목되고, 혐오와 배제, 차별과 절멸의 대상이 되었다. 그 가장 날카로운 칼끝에 여성, 흑인, 성소수자 등이 있음도 알게 되었다. 다름과 다양성은 ‘그들’만의 세상에서 통용되는 수사였다. 페미니스트들은 그런 메커니즘이 어떻게 사회문화적으로 만들어지고 재생산되어 왔는지, 효과가 무엇인지 가장 예리하게 파고들며 저항했던 집단이었다.

수많은 소란과 불안, 갈등과 반목이 우리를 덮치고 있는 이 시점에 페미니즘을 상기하는 이유다. 내가 아는 페미니즘은 공동체를 살리면서 나를 살리는 중요한 가치 중 하나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오늘도 헌신하는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