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료체제의 부재와 위기 대응

2020.03.03 20:41 입력 2020.03.03 20:50 수정

갑작스러운 코로나19의 침입은 마치 전쟁처럼 한국 사회를 불안감에 빠뜨리고 있다. 이 눈에 보이지 않는 적과의 전쟁에서 한국 정부가 제대로 대처하고 있는가에 대해 거센 논란이 일고 있다. 이번에도 바이러스 대응 과정에서 예외 없이 나타난 정치화 현상은 어려운 한국 사회를 더욱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정동칼럼]관료체제의 부재와 위기 대응

그런데 백신도 없는 역병이 발생했을 때의 불안과 걱정 및 혼란은 한국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미국의 경우 아직 감염률이 낮은 편인데도 사재기 열풍이 불고 있고, 특히 마스크는 대형 마트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항상 그러했듯이 상호 비방하면서 문제를 풀어가는 데 익숙한 한국 사회는 이번 위기도 그럭저럭 나름대로 극복할 것으로 예상된다.

보다 근본적 문제는 이번 사태의 극복과정에서도 여전히 한국의 고질병인 관료체제의 붕괴가 엿보인다는 사실이다. 가깝게는 세월호 사고가 발생했을 때의 일을 예로 들 수 있다. 미국의 공영라디오(NPR) 방송 앵커가 ‘한국에선 왜 대형사고 발생 시 미국의 교통안전국 같은 곳에서 나가 객관적으로 사고 원인을 분석해 내지 못하고 정치적 싸움을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던 일이 기억난다. 불행히도 이번 코로나19 대처 방식에도 이전처럼 전문관료의 역할이 위축되는 관행이 되풀이되고 있다. 관료의 전문성이 정치적 고려로 인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행정체제는 서구의 학계에선 임용고시를 통해 확립된 근대 관료조직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이는 지난 50여년간 한국적 상황의 특성을 외면한 이야기이다. 한국 관료는 서구 이론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산업화를 거치면서 관료적 특성, 즉 법치주의, 전문성, 실적에 근거한 인사 등이 크게 훼손되었다. 국가주도형 산업화를 추진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은 실적과 지역주의를 교묘히 결합해 능력 있고 충성심 있는 인력을 확충했다. 이 결과 한국 행정 조직에는 지역주의가 만연하였고 정경유착을 통해 관료 내부가 형해화되었다. 동시에 경제 정책 집행에 속도가 나지 않을 경우 중앙정보부 등 권력기관을 무분별하게 동원하여 법질서나 규정은 쉽게 무시되었다.

이렇게 무너진 한국관료제도는 민주화 이후 더욱 황폐화되었다. 5년마다 바뀌는 정권하에서 관료들의 신상은 더욱 불안하게 되었고 이 속에서 관료들은 생존을 위해 정권과 쉽게 타협해왔다. 이 결과 한국관료제는 내부적 결속이 파괴되어 공동화되었다. 이렇게 공동화되고 정치화된 한국의 행정조직은 개인적으로 능력있는 관료가 있음에도 관료의 소신있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관료체제가 상실된 조직으로 전락하였다.

방역 사업은 그 성격상 과학에 기초한 전문성과 사회 분석이 교차하여 정치의 자의적 개입 가능성이 높다. 이번 코로나19 감염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도 관료의 전문 영역을 침범하는 현상이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전문가에게 맡길 일에 대해 아무런 전문성도 없는 정당인이나 정치인들이 자기들의 희망사항을 남발하고 있다.

이번 코로나19와의 전쟁에서 처음부터 전세 파악에 실패한 것도 정치적 고려와 무관하지 않다. 사태 발생 시작부터 눈에 띄는 것은 바이러스 성격 자체에 대한 파악이다. 미국 정부는 처음부터 이번 신종 바이러스에 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감염률과 치사율이 마치 이미 결정된 것처럼 가정하고 치사율이 낮다고 판단했다. 과연 이런 판단에 전문가의 식견이 반영되었는지 의문이다. 감염원 차단에 대한 전문가 집단의 끈질긴 권고에 대한 고집스러운 외면은 정치인들이 전문성을 외면한 또 다른 사례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뉴욕타임스도 지적했듯이 여당 정치권의 사태 수습에 대한 희망적 평가였다.

한국은 이미 여러 차례 유행병을 겪은 경험을 가지고 있고 이를 비교적 성공적으로 극복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매번 사태가 발생할 때마다 불필요한 잡음과 혼란은 정치의 무분별한 전문성에 대한 위협과 간섭에서 기인했다. 아무리 많은 경험을 쌓고 새로운 법과 제도를 형식적으로 정비한다 하더라도 전문성에 입각한 관료체제에 대한 부활과 이에 대한 정치권의 무분별한 개입이 지양되지 않는 한 위기 극복 과정에서 불필요한 잡음을 없앨 수 없을 것이다. 한국이 위기 상황에서 정치권의 불필요한 개입 없이 깔끔한 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관료제의 재정비와 이를 뒷받침하는 전문성의 회복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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