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석의 메시지

2020.04.28 21:05 입력 2020.04.28 21:16 수정

위기는 동시에 기회라고 한다. 위기 상황에서 미래를 읽어내는 힘이야말로 진정한 국력이라 볼 수 있다. 한국 사회는 1997~1998년 위기 상황을 잘 극복한 사례로 꼽힌다. 정부는 다급한 외환 부족을 메꾸느라 동분서주했고 국민은 금 모으기로 화답했다. 그러나 국제통화기금(IMF)이라는 외부조직에 의해 강요된 각종 계획은 급한 불을 끄는 선에서 끝났고 금 모으기로 단합을 보였던 한국 사회는 진영대립의 사회로 변모했다.

[정동칼럼]180석의 메시지

한국 사회는 혹독한 경제위기 상황을 겪으면서도 고질적인 노사 관계나 재벌 지배구조 개혁에 성공하지 못하고 우연히 중국 경제의 호황에 힘입어 위기에서 벗어나면서 현실에 안주하는 데 그쳤다. 이번 코로나19 위기는 외환위기와 그 성격이 크게 다르다. 경제적 피해 규모는 파악조차 어렵다. 이번 사태는 마치 전쟁과 같이 한국 사회 전체에 영향을 주면서 미처 알지 못했던 한국 사회의 구석구석을 점검하는 효과를 보이고 있다. 드러난 것만 하더라도 경제적으로 취약한 업종과 그룹, 알려지지 않았던 각종 종교 및 다른 집단들, 요양시설과 병원실태 등 다양한 모습을 띠고 있다. 실로 새로운 경제·사회 지도가 필요하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건 위기 상황에서 드러난 정치, 행정 및 사회 간 관계다. 코로나19 위기 상황에 대처하면서 각국은 이 3자 간 관계에서 다양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크게 보면 중국형, 미국형 그리고 한국형을 들 수 있다.

중국형은 국가 공권력 주도형이다. 위기가 처음 발생한 만큼 당황했으리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중국의 조치는 일사불란하고 능률적이었지만 사회의 자발적인 정보 기능과 협조가 사전에 차단되었다. 행정과 정치가 고도의 협력체제를 구축한 측면도 있으나 초기단계에서 감염 발생 발표 지연 등으로 나타났듯이 정치가 압도한 측면이 강하다.

미국의 경우는 드러내놓고 정치가 과학에 기초한 행정과정에 끊임없이 간섭하고 급기야 과학과 정치 간에 지켜져야 할 선을 넘고 있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살충제 주입 발언은 이의 극치가 아닌가 한다. 또한 연방체제의 특성상 위기상황에서 연방정부와 주정부 및 지방정부 간의 책임과 권한에 관한 모호성은 위기 대처의 효율성을 크게 제약하고 있다. 반면 미국 사회의 자유분방한 특성은 한편으로 사회적 책임을 의식한 개인들의 합리적 행위가 지배적인 현상이긴 하나 국가적 통제에 익숙하지 않은 전통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국가의 행정조치에 대해 저항하는 모습을 보인다.

한국은 중국이나 미국과 달리 정치, 행정 및 사회 간 적절한 균형을 보인 비교적 성공적인 사례로 생각된다. 초기 중국을 의식한 방역정책이 비판을 받았고 마스크 수급 등에서 나타난 행정적 대응의 미비 등 문제가 있었지만 비교적 한국의 혼란은 그리 크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정치권의 관료조직에 대한 일방적 개입이나 간섭도 중국처럼 심각하지 않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양극화된 한국 정치가 위기로 인해 선거철인데도 불구하고 양 정당이 극심한 의견 차이를 그나마 최소화했다는 사실이다.

질병관리본부를 중심으로 한 행정적 통제 역시 급박한 상황을 빙자한 일방적이고 강압적이기보다 비교적 한국 사회의 분위기를 파악하고 소통에 입각한 것들이어서 커다란 저항을 낳지 않았다. 또한 한국 사회 역시 자발적 협력과 자기 통제를 통해 외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극심한 사재기 현상은 없었다. 한국 사회 전체가 지역이나 세대의 간격을 넘어 서로의 존재를 경험하는 시간이었다.

일부 해외 언론이 한국의 하이테크를 이용한 도를 넘은 개인정보 유출이나 감시를 지적했다. 그러나 이런 비판은 한국 사례를 이용한 자국에 대한 경고에 불과한 것이고 실제 중요한 것은 한국민들이 받아들이는 자세다. 개인주의에 뿌리를 둔 서구사회의 시각에 그리 민감할 필요는 없다. 한국 사회 전체가 국가주의적 전통과 개인의 자유 사이에서 스스로 크게 불만이 없는 균형점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 한국은 위기 속에서 찾은 정치, 행정, 사회의 균형점을 일상화하여 한국적 민주주의의 새로운 형태를 구축해야 한다. 의료행정에서 보인 관료의 전문성 보장이 행정 전체에 파급되어야 하고 상황적으로 나타나는 시민정신은 일상화해야 한다. 바닥난 보수는 각고의 노력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하며 180석의 힘을 쥔 진보는 자만하지 말고 한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깊게 인식하여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외환위기처럼 위기가 준 기회를 이번에는 상실하지 않고 한국적 민주주의의 정립을 위한 출발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180석 뒤에 숨은 국민의 뜻이고 진보 역시 새롭게 태어나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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