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의 대외 인정결핍증

2020.03.31 20:48 입력 2020.03.31 20:55 수정

코로나19 사태에 대한 대처를 둘러싸고 나온 이슈 중 하나는 한국의 처리과정에 대한 외국의 반응이다. 정부와 여당은 한국의 방역과 치료가 세계 수준으로 해외에서 인정을 받고 있다고 하고, 야당은 초기 방역 실패를 호도하는 행위라며 비판하고 있다.

[정동칼럼]한국 사회의 대외 인정결핍증

그러나 한국의 대외 인정에 대한 갈구는 어제오늘의 문제도 아니고 한국만의 문제도 아니다. 한국의 경우 그 뿌리는 역사적으로 항상 주변세력의 영향권 밑에서 신음했던 국제정치적 경험이 크게 자리 잡고 있겠지만, 보다 가깝게는 경제발전 후발 주자로서 산업화의 성공에서 찾을 수 있다.

후발 산업화는 한국뿐 아니라 소련, 독일, 일본 등의 경우에서 확인할 수 있듯 지배엘리트들이 자국의 극심한 상대적 후진성과 이에 기반한 열등의식을 갖는 데에서 출발했다. 러시아는 오랜 기간 서구에 대한 후진성을 안고 있었다. 러시아 공산주의는 서구와 비교한 후진성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처방이었다. 일본 메이지유신 역시 마찬가지다. 메이지유신의 리더 중 한 사람인 오쿠보 도시미치는 “일본 노동자들의 근로 시간이 서구보다 적고, 독일의 닭들은 일본 닭들보다 많은 달걀을 낳는다”고 일본의 열등성을 표현할 정도였다.

우리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한국 역사에 대한 평가에는 열등의식과 후진성 인식이 가득 차 있다. 역사만 길지 침략의 역사 속에 볏짚으로 새끼를 꼬는 정도라고 혹독한 평가를 내리는가 하면, 5000년 역사 속에 항상 외침만 당했다고 한탄했다.

후발 주자들의 후진성과 열등의식은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는 촉매제로 활용됐다. 한국은 물론 일본, 러시아 등 각국이 연평균 10% 가까운 성장률을 기록하는 데 성공했다. 뿌리 깊은 열등의식을 바탕으로 이룬 성공적 산업화는 국제적으로 강한 인정을 요구하게 된다. 스탈린은 대공황에 싸인 서구에 대해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내세웠고, 일본은 제국주의 열강에 대해 대등한 지위를 요구했다. 일본의 식민지 점령은 서구와의 대등성을 보이려는 열망의 결과였다. 그러나 한국은 성공적 산업화를 바탕으로 일본이 했던 것처럼 대외적인 팽창이 어려웠다. 이미 국제정치가 제국주의 패러다임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일본이 식민지 점령 같은 제국주의적 행위를 통해 대외 인정을 추구했다면 한국이 개진할 수 있는 것은 통일 문제였다. 전두환, 노태우 정권을 시작으로 나타난 적극적인 통일정책은 이의 발현에 불과했다. 그러나 통일 문제는 대외팽창을 통한 인정보다 내부 가슴앓이만 심화시켰다.

한국의 대외인정 결핍증의 극치를 나타낸 사례는 역시 김영삼 정권의 세계화였다. 세계화의 목표는 선진국 진입이었고, 이의 상징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이었다. 제도적·심리적으로 준비되지 않은 선진국 진입을 목표로 한 세계화 추진은 한국 사회가 얼마나 대외인정을 갈구했나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조급한 선진국병은 급기야 나라 전체를 위기로 몰아넣고 오히려 대외 종속성을 더욱 가중시키는 역설을 낳았다. 이 사례는 선진국 대열에 서는 것이 단순히 경제적 실적에만 있지 않다는 것도 보여주었다.

개인 차원이든, 국가 차원이든 열등의식에서 출발한 일들은 정상적인 심리상태가 아니고 방어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누가 나를, 우리나라를 우습게 혹은 업신여기지 않나 하는 불안감에 싸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이나 국가 내부의 문제를 침착하고 계획적으로 성찰하고 해결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이나 다른 나라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보는가에 집착하게 된다. 이런 심리적 불안감은 개인에게서 나타날 때 타인에 대한 적대감으로, 국가적으로는 전쟁까지 이르게 된다.

이제 한국은 누구에게 인정받기를 바라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충분히 되었다. 남은 과제는 한국인에게 편한 제도와 가치를 창출하여 자족감을 높이는 일이다. 더 이상 서구의 제도나 가치를 지향점으로 놓을 필요도 없다. 오히려 한국이 가야 할 길은 아시아에서 어느 국가도 이루지 못한 서구적 제도와 한국적 특성을 잘 조화시켜 모두가 불안하지 않은 사회를 이루어나가는 일이다. 한국의 코로나19 처리과정은 바로 이런 것의 한 사례가 아닌가 한다.

이런 과정은 끊임없는 자기 발견과 성찰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어느 한 정권, 한 세대에서 이뤄질 문제가 아니다. 영화 <기생충>이든, BTS든, 코로나19 방역이든 그저 하나의 벽돌을 쌓는 것뿐이다. 초조한 대외인정 추구는 자신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한국적 근대성이 완성될 때 우리가 기대하지 않아도 세계의 주목 대상이 될 것이다. 이제 대외인정 결핍증에서 벗어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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