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변화를 시도하다

2015.05.11 20:50 입력 2015.05.11 21:06 수정
조호연 논설위원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의 러시아 전승절 기념행사 참석 여부는 북한 체제의 경직성을 재는 척도였다. 따라서 북한이 방문 취소를 러시아에 통보했을 때 우리는 북한 체제의 경직성이 발목을 잡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북한이 변화를 감당할 만큼 유연하지 않다는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방문이 성사됐다면 북한은 고립에서 벗어나 국제 사회의 정상적인 일원이 되는 기회를 맞을 수도 있었다. 김 제1비서로서는 최고지도자 차원의 국제교류 무대에 데뷔할 수 있었다. 아쉬운 일이다. 러시아는 그의 방러 무산에 대해 “북한 내부 문제”라고 밝혔다.

[경향의 눈]김정은, 변화를 시도하다

북한 내부에는 많은 문제가 있기 때문에 어떤 문제가 방러 취소를 결정하게 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방러라는 다자외교무대 데뷔와 충돌하는 북한 내부의 제도나 사상을 살펴보면 대충 답이 나온다. 제도로는 당과 국방위원회, 사상은 조선노동당 강령인 ‘유일사상 10대원칙’과 주체사상, ‘대안의 사업체계’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 제도와 사상은 모두 북한 체제의 경직성을 생산한다. 이들이야말로 김 제1비서 방러의 발목을 잡은 ‘북한 내부 문제’라 할 수 있다.

유일사상 10대원칙은 북한 주민이 최고지도자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해야 한다는 내용이 골자다. 예컨대 ‘수령의 초상화나 형상화한 미술작품을 정중히 모셔야 한다’는 이 원칙 3조 규정으로 인한 소동을 남쪽 국민은 10여년 전 경험했다. 2003년 대구유니버시아드에 참석한 북한 응원단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진이 들어간 플래카드가 비에 젖자 눈물을 흘리며 품에 안고 항의 행진을 한 바 있다. 여대생으로 구성돼 ‘미녀응원단’으로 불리며 인기를 끌었지만 이들은 이 사건 하나로 단박에 심각한 이질적 존재로 전락했다. 실명 상태의 북한 주민 수백명에게 자비를 들여 백내장 수술을 해줬더니 시력을 되찾은 후 김일성·김정일에게만 감사를 표하는 것을 보고 당혹스러웠다는 네팔 의사의 증언도 있다.

이들 제도와 사상은 내용만 아니라 운용도 경직돼있다. 1974년 제정된 유일사상 10대원칙도 39년 만인 지난해 처음으로 개정됐다. 시대 변화 반영을 용납하지 않는 절대적 원칙인 것이다. 개정 내용도 김 제1비서를 김일성·김정일과 같은 위상으로 승격하는 것이었다. 다자외교무대인 러시아 전승절 행사에 참석했을 경우 김 제1비서의 언행은 절대자 수령의 지위에 걸맞은 예우와 보호를 받지 못한다. 누구를 만나든 “만나시었다”는 표현이 말해주듯 수령을 존경하는 아랫사람을 접견하는 형태여야 하는데 러시아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여러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이라는 만남의 구도는 북한 체제 특성상 수용할 수 없는 것이다. 북한은 남북정상회담 때도 김정일 위원장이 김대중·노무현 대통령과 회담한 게 아니라 ‘접견’한 것으로 기록했다고 한다.

유일사상 10대원칙과 주체사상은 북한 주민의 생활방식과 행동양식을 규정한다. 금강산관광객 총격이나 연평도 포격 등 이해가 안 가는 북한의 공격성과 도발의 논리를 제공한다. 이밖에 기업 경영에 당의 지도를 받도록 규정한 대안의 사업체계는 기업이 경제논리에 따라 운영되는 것을 방해하고 기업가의 창조적 경영활동을 제한한다. 김 제1비서 입장에서는 유일사상 10대원칙은 딜레마일 수 있다. 체제 유지의 근간이지만 외부세계와 충돌하고 체제를 약화시키는 부작용을 낳기 때문이다.

북한을 비난하자는 게 아니다. 현실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 북한과 외부 세계는 각자의 눈으로만 서로를 본다. 그러나 서로가 낯설고 엉뚱하며 비이성적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북한 주민이 외부 세계의 시각을 갖추기 바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반대로 외부 세계가 북한 내재적 사고를 갖기를 바라는 것도 비현실적이다.

그는 수령으로서 북한의 경직된 사상과 제도를 부분적, 일시적으로 깰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그러나 항상 자유로울 수는 없다. 사상과 제도의 수혜자이지만 수호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비록 무산되기는 했지만 그가 방러를 검토했다는 것 자체는 발상의 전환이라고 볼 수 있다. 북한 체제의 유연성을 높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모를 리 없는 그가 그 같은 시도를 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는 오는 9월 중국의 전승절에 다시 선택을 해야 한다. 중국 방문은 러시아와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유일한 사회주의 형제국가이고 석유 지원 등 경제협력에서도 러시아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그의 권력 승계 후 관계가 소원해졌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러시아 방문을 취소했으니 중국 방문도 하지 못할 것이란 관측이 나돈다. 김 제1비서가 이번에는 어떤 결정을 내릴지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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