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영어

2015.10.05 20:37 입력 2015.10.05 20:45 수정
조호연 논설위원

대학 입시는 대표적인 ‘복잡계’이다. 학생들의 공부 능력과 대학 서열, 부모의 경제력 차 등 불평등한 교육환경, 고교의 교육환경, 각 대학의 취업실적 등 다양한 요소들이 상호작용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권오현 서울대 교수). 최근 부모의 경제력이나 고교의 교육환경 비중이 커지고 있지만 복잡계라는 틀 자체를 허물 정도는 되지 않는다. 대입은 모든 당사자의 이해가 한꺼번에 대충돌하는 무대여서 하나의 원인이 하나의 결과를 낳는 ‘단순계’로 변모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복잡계 대입의 구조는 출구 찾기가 어려운 미로와 같다. 수능의 원점수나 백분위는 그럭저럭 이해가 된다. 하지만 표준점수나 변환점수에 이르면 그만 길을 잃기 십상이다. 전형 방법이 3000개를 넘은 적도 있다. 그러니 다들 미로 속 실험 쥐처럼 헤매게 된다. 이는 성적의 높낮이와 무관한 일이다. 오히려 성적 상위 4%인 1등급 학생 간 경쟁은 더 치열하고 혼란스럽다. 0.03점이 모자라 서울대에 낙방한 학생의 수기가 인터넷에 인기리에 떠도는 일도 드물지 않다.

[경향의 눈] 괴물, 영어

수능은 실수 안 하기 시험이 된 지 오래다. 학생의 대학수학능력 검증은 뒷전이다. 잔뜩 꼬아서 낸 문제를 짧은 시간 안에 풀다 보면 실수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한 문제라도 실수하면 등급이 하락한다. 이러다 보니 학교 현장에서는 살벌한 풍경이 자주 연출된다. 경쟁 상대인 친구의 필기노트를 훔쳐가는가 하면 내신 점수를 낮추기 위해 체육복을 찢어버리기도 한다고 한다. 이런 대입, 이런 대입을 위한 공부가 과연 필요한 것인지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이런 현실을 감안하면 수능 영어 절대평가 도입은 혁명적인 일이다. 정부 방침은 원점수만 표기하고 등급 간 점수 차를 10점으로 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최소한 소수점 이하 몇자리에서 당락이 갈리는 처절한 상황은 피할 수 있다. 물론 지금도 수능 성적은 9등급으로 표기된다. 하지만 원점수 외에 표준점수나 변환점수가 활용되면서 얼마든지 수많은 등급을 생산할 수 있어 정부 방식과는 크게 다르다.

수능 영어 절대평가 도입은 공식 확정됐지만 반대 목소리가 높다. 아직 변수가 있다는 얘기다. 과거에도 야심차게 추진되던 대입 제도 개혁이 이해 충돌적 메커니즘에 함몰돼 표류하다가 ‘해답’이 ‘오답’으로 변질된 적이 많았다. 물론 항간의 우려를 마냥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영어 성적을 절대평가하면 약화되게 마련인 변별력 문제를 방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수학이나 국어 등으로 사교육 수요가 옮겨가는 ‘풍선효과’가 나타날 가능성도 크다. 그렇다고는 해도 현재 대입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막장 드라마’를 개혁할 수 없다면 그 어떤 우려도 정당화될 수 없다. 사실 대입의 병폐는 매우 복잡해서 특정 과목의 변별력을 조정하는 것만으로 치유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좀 더 종합적이고 근본적인 모색이 필요하다.

현재 영어는 기능과 교육 모두 왜곡돼 있다. 외국 문물 이해와 소통의 수단이라는 본디 역할은 약화되고, 입시와 입사 측정도구로서의 비중이 지나치게 강조돼 있다. 또한 교육은 독해와 문법에 치중하고 듣기나 말하기는 소홀히 하는 반쪽짜리로 이뤄지고 있다. 영어지상주의 광풍이 불고 있지만 신처럼 영어를 잘한다는 ‘영어 공신’과 영어 공부를 포기한 ‘영포자’가 여전히 공존한다. 영어 사전을 한 장씩 찢어먹으며 단어를 외웠다는 1970년대의 ‘전설’과 ‘어륀지 파문’으로 대표되는 영어몰입교육이 아직 현장에서 함께 통용되기도 한다. 이렇게 영어는 우리 사회의 괴물이 되었다.

물론 영어 그 자체는 괴물이 될 수 없다. 영어에 괴물의 모자를 씌운 것은 한국 사회다. 국가 예산의 2%가량인 6조원을 영어 사교육비로 지출하는 나라만의 현상이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이러고도 국민 다수가 영어 소통을 제대로 할 줄 모른다는 점이다. 수능 영어 절대평가는 중요한 발걸음이지만 여기서 멈춰선 안된다. 영어만이 아니라 국어와 수학, 탐구생활도 본래의 교육 목적에 맞게 바꾸는 작업으로 이어가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설령 영어는 괴물의 외투를 벗어던질 수 있다고 해도 수학이나 국어가 괴물로 변하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대입은 학생 선발과 교육의 두 기능을 갖고 있지만 현재는 과도하게 선발에 비중이 쏠려 있다. 칼자루를 휘두르는 것만으로는 사회적 책무성을 다할 수는 없다. 교육적 기능을 더 강화할 필요가 있다. 특히 고교 교육의 정상화와 고교-대학 교육의 연계성 강화를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 대입이 앞으로도 계속 고교와 대학, 학생 등 교육 주체들의 합당한 요구를 등한시한다면 영어에 이어 또 다른 괴물이 되는 것을 면키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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