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치없는 어른들

2016.08.14 20:44 입력 2016.08.14 20:51 수정

[아침을 열며]염치없는 어른들

미취업 청년들에게 일정 기간 현금을 지원하는 것을 두고 ‘독’이라고 목청을 높였던 정부가 돌연 입장을 바꿨다. 고용노동부는 엊그제 새로운 청년수당 지급 정책을 발표했다. 정부가 운영하는 ‘취업성공패키지’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취업준비생 2만4000여명이 대상이다. 민간 재단의 재원으로 월 20만원씩, 최대 3개월 60만원까지 구직활동에 지원한다는 내용이다. 이 지원금은 면접복장 대여나 면접사진 촬영 비용, 그리고 지방에 사는 청년들의 교통비와 숙박비 등에 쓰이게 된다. 서울시의 청년수당 정책을 혹평한 정부가 돌아서자마자 너무나도 유사한 정책을 내놓은 것이다. 비슷함을 넘어 베끼기 정책으로도 보인다. 물론 정부는 서울시 청년수당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선을 긋고 있다. 정부가 추진 중인 취업성공패키지의 부족한 부분을 지원하고자 하는 것으로 서울시처럼 정부 지원이나 취업지원 사업과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추진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정부와 여당은 서울시 청년수당을 깨기 위해 그야말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다. 서울시 청년수당에 대한 보건복지부의 직권취소 처분이 내려지자 이기권 노동부 장관은 기다렸다는 듯 적극적으로 공격에 가담했다. 정부는 서울시 청년수당 중단을 위해 범부처 국장단이 참여하는 태스크포스(TF)도 구성하기로 했다.

여당은 박원순 서울시장의 “포퓰리즘”이라며 지원사격을 이어가고 있다. 청년을 대변하는 여당 국회의원도 가세했다. 새누리당 유창수 청년 최고위원은 휴일인 14일 기자회견을 열고 “박 시장의 성급한 대권행보로 애꿎은 청년만 희생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시행도 해보지 않은 지방자치단체의 청년지원 정책에 정부와 여권이 이처럼 어깃장만 놓는 것이 과연 청년의 미래를 진정으로 걱정하는 모습인지 납득이 잘 안된다.

서울시 청년수당은 정부가 가장 우려하는 실효성의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적 힘겨루기라는 의심을 떨칠 수 없다. 정치적 계산이 우선이고 허덕이는 청년은 후순위라는 얘기다. 복지부와 서울시는 청년수당 지원정책을 놓고 합의 단계까지 서로의 이견을 좁혔었다. 공동 보도자료 발표도 논의됐다. 언론에서는 복지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정부가 사실상 수용한 것으로 보도되기도 했지만 뚜렷한 이유 없이 하루 만에 대결 상황으로 다시 되돌아갔다. 그 과정에는 청와대의 의견이 작용했다는 주장이 지배적이다. 일부 언론에서는 복지부 당국자들이 “위에서 시켜서 어쩔 수 없었다”며 하소연했다고 내보내기도 했다. 결국 야당 대권주자 중 한 사람인 박 시장에 대한 견제이지, 청년들의 아픔을 진심으로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간의 정부 청년지원 정책이 성공적이었다면 서울시의 청년수당 정책은 이렇게 주목받지 못했을 것이다. 정부는 지금까지 8조원이 넘는 돈을 청년 일자리 정책에 썼다. 올해에도 2조여원을 투입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6월 청년 실업률은 역대 최고치인 10.3%를 기록했다. 취업성공패키지에 참여해 취업했더라도 2명 중 1명은 1년을 버티지 못했다. 이런 저조한 실적은 정부 정책이 공급자 우선이라는 틀이 근본적 원인이다. 그러다 보니 원하는 교육을 받을 수 없는 청년들이 허다하다. 더구나 소득이 있으면 정부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없다. 생활비를 벌면서 미래를 설계해야만 하는 절박한 청년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서울시 청년정책은 이런 문제점을 보완했다고 볼 수 있다. 청년수당은 박 시장이나 공무원이 만들어낸 정책이 아니다. 청년들이 낸 아이디어를 정책에 반영한 것으로 공급자가 아닌 수요자 중심 정책이다. 일정 시간 노동을 해도 수당을 받을 수 있다는 점도 정부 정책과 다르다. 최장 6개월 동안 취업준비를 위해 한 청년에게 지급되는 최대 300만원을 두고 ‘마약’ 등에 비유하며 호들갑만 떨 것이 아니라는 의견이 나오는 이유다. 그들은 대한민국 청년들을 너무 불신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건 미래에 그들에게 기대고 살아야 할 현재의 어른으로서 너무 염치없는 모습이다. 얼마 전 한 달치 청년수당을 받은 30살 대졸 청년이 서울시 시민제안 창구인 ‘천만상상 오아시스’에 올린 글의 일부이다.

“알바 인생으로 끝나는구나 좌절했던 저에게 이제는 미래를 꿈꿀 수 있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저를 믿어주고 도와주는 분들이 있다는 것 그 자체가 힘이 됩니다. 수당을 받는 청년들은 인생에 목표도 없는 방구석 쓰레기로 보는 편견이 가장 가슴 아팠습니다. 청년수당에 반대하시는 분들의 의문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만 있다면 선정자를 공개하는 것에도 동의합니다. 더 이상 창피할 것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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