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서식지

2018.04.01 21:21 입력 2018.04.01 21:22 수정

한겨울, 냉기 가득한 방 안. 여자친구 방에서 데이트하는 청춘 남녀. 두 사람이 말을 할 때마다 허공으로 허연 입김이 퍼진다. 오랜만에 잠자리를 갖기로 한 둘은 서둘러 옷을 벗는다. 벗고 또 벗어도 양파 껍질처럼 옷이 나온다. 추위를 견디기 위해 잔뜩 껴입었기 때문이다. 선 채로 부둥켜안은 두 사람은 덜덜 떤다.

“너무 춥다. 안되겠지?” “춥긴 춥다.” “봄에 하자.” “응.”….

[아침을 열며]인간의 서식지

최근 국내 개봉작 <소공녀>의 한 장면이다.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마이크로해비타트(Microhabitat)’로 작은 서식지(집)를 뜻한다. 가사 도우미로 일당 4만5000원을 버는 여주인공은 월세를 내기 위해 벌이가 있을 때마다 1만원씩 모아보지만 그나마도 월세가 인상되면서 냉기 도는 월세방마저 포기하고 만다. 남자친구와도 이별한다. 학자금대출 갚기에 허덕인 남자친구는 함께 살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100만원이라도 빚을 내보려고 하지만 결국 목돈을 벌기 위해 2년 후를 기약하며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난다.

영화는 우중충하지 않다. 코믹하고 통쾌한 반전도 있다. 여주인공은 전기가 안 들어오는 대신 보증금이 없는 월세 10만원짜리 달동네 방까지 알아보다 결단을 내린다. ‘집 없이 살자.’ 여행가방에 최대한 짐을 넣어 대학 시절 함께 밴드활동을 했던 선후배와 동료 집을 찾아나서 하룻밤, 때론 며칠간 머문다.

영화는 이 여정을 따라간다. 고층빌딩, 아파트, 빌라, 고급주택, 오피스텔 등 다양한 서식지가 등장한다. <소공녀>를 만든 전고운 감독은 영화 속 주인공과 비슷한 또래다. 전 감독은 관련 인터뷰에서 “말도 안되게 치솟은 서울의 집값에 부조리를 느꼈다” “집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결혼을 못하는 걸 보면 마음이 아프고 화가 났다”고 털어놓았다. 영화를 추동한 것 중 하나가 ‘분노’였음을 숨기지 않는다.

20·30대 또래 관객들은 어두운 객석에서 격한 공감에 쓴웃음을 짓다가, 때론 주인공보다 나은 처지에 안도의 숨을 쉰다. 거리로 내몰렸지만 수중의 돈으로 마지막까지 자신의 취향(담배와 위스키 한 잔)을 버리지 않는(즐기는) 주인공의 모습에선 대리만족을 느낀다. ‘유니크한 삶’ ‘기존의 가치에 균열을’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용기’ 등 영화에는 다양한 해석들이 따라붙는다.

그러나 서식지(집) 없는 삶이 가능할까. 집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공간인 동시에 인간관계 맺기의 근거지다. 결혼해 가족을 만들고 자식을 낳으려고 해도 집이 필요하다. 최근 TV에선 집을 근거로 한 관계맺기를 소재로 한 예능 프로그램 <집사부일체> <발칙한 동거> 등이 인기를 끌고 있다.

<집사부일체>의 부제는 ‘동거동락 인생과외’. 이승기, 이상윤, 육성재, 양세형 등이 인생사부 격인 전인권, 윤여정 등의 집을 찾아가 하룻밤 머물며 라이프스타일을 따라해본다. 덮고 자던 이불을 쓰고, 밥 먹던 식탁에서 함께 식사하며 화장실을 공유한다. 집주인의 작은 습관부터 인생철학과 삶의 목표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공유하며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맺는 것이다. <발칙한 동거>는 연예인 2~3명이 동거계약서를 쓰고 함께 며칠간 산다. 연령과 성별, 하는 일 등이 낯설고 이질적인 동거인들은 그야말로 동거를 통해 서로를 알아가고 의미 있는 존재가 되어간다. 이들 프로그램은 예능다운 웃음기를 강조하지만 파편화된 현대인의 삶에서 집, 동거를 통한 ‘연결’을 읽을 수 있다.

서식지, 특히나 청년세대의 주거문제는 사회의 불평등한 구조로 심각해지고 있다. 최근 부동산 광풍에 따른 이익환수제 등 각종 규제가 거론되면서 시끄럽다. 문재인 대통령이 발의한 개헌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제128조 ①국가는 국민 모두의 생산과 생활의 바탕이 되는 국토의 효율적이고 균형 있는 이용·개발과 보전을 위하여 법률로 정하는 바에 따라 필요한 제한을 하거나 의무를 부과할 수 있다. ②국가는 토지의 공공성과 합리적 사용을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특별한 제한을 하거나 의무를 부과할 수 있다.’ 청와대는 사회적 불평등 심화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토지공개념의 내용을 명시했다고 밝히고 있다. ‘사람’을 강조하는 개헌안에서 특히 청년세대의 주거문제가 해결되는 계기가 마련될지 미지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주인공은 강남의 10억~20억원대 아파트가 올려다보이는 한강둔치에서 텐트를 치고 산다. 텐트 불빛이 마치 반딧불이 같다. 자신의 서식지에서 마음놓고 사랑하고 밥 먹고 놀고 고민하고 늙을 수 있는 봄이 올까. 추운 겨울을 지나 따뜻한 “봄에 하자”던 그들의 약속이 빨리 이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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