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시대정신은 살려야 한다

2002.10.01 18:23

〈김삼웅·언론인〉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시대정신’이란 것이 있다. 일제시대는 독립운동, 독재시대는 민주화가 시대정신이었다면 지금은 남북화해와 평화공존이다. 세계 유일의 분단민족이 적대와 냉전상태를 극복하고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것 이상의 시대적 과제를 달리 찾기 어렵다. 한반도 평화는 우리 시대 최고, 최선의 꿈이고 시대정신이다.

다행히 올 가을은 분단 이래 가장 풍성한 교류와 변화가 이뤄지고 있다. 추석 연후 직전 경의선과 동해선의 연결 착공식이 있었다. 외세가 끊어놓은 민족의 동맥을 우리 손으로 연결하는 첫 삽질이다. 다음 날부터 남북 군인들이 총 대신 지뢰탐지기를 들고 비무장지대에서 ‘한반도 심장에 박힌 쇠말뚝’인 지뢰를 제거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한달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렵던 북·일 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성사되고 ‘악의 축’으로 적대해온 부시 미국 대통령까지 북한에 특사를 파견키로 했다.

북한의 급격한 변화는 우리를 놀라게 한다. 신의주를 특구로 지정하고 중국계 네덜란드인을 행정장관에 임명했다. 미국인을 치안 책임자로 임명한다는 소식이고 나진·선봉, 금강산지역, 개성도 특구로 지정할 것이라 한다. 지금 부산에서는 900여명의 북한 선수 응원단이 아시안대회에 참가하고 있다. 분단사에서 통합사로 역사의 물굽이가 도도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도처에 ‘지뢰’가 널려있다. 북·일 정상회담이 열리기 전날 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이 북한 핵무기 보유 발언으로 찬물을 끼얹는가 하면, 일본 우익은 자신들의 야만행위는 제쳐두고 일본인 납치 문제로 북·일 국교정상화에 제동을 건다. 역사적 가해자가 현실적 피해자로 둔갑한 셈이다.

밖의 일만은 아니다. 한나라당 일부 의원이 제기한 수천억원의 대북 비밀지원설은 자칫 남북관계를 송두리째 뒤엎을 시한폭탄이 될지 모른다. 김대중(DJ) 정부가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고자 거액을 지원한 것이 사실이라면 남북관계의 특수성과 투명성에 역행한 중대한 문제다. 서해교전 사태와 같은 위기에도 햇볕정책을 지지해온 다수 국민을 등돌리게 만들기에 충분한 사건이다. 반대로 화해협력 분위기를 깨고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아들들의 병역문제를 희석시키고자 하는 정략적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문제는 심각하다.

어쨌든 이번 대북 지원설이 모처럼 탄력을 받고 있는 남북관계를 또다시 좌초시켜서는 안된다. 우리 사회 병폐의 하나는 수구 정치인들이 무책임한 외신이나 첩보성 정보를 무차별 폭로하면 수구언론이 여과없이 확대보도하고 아류들이 이를 추종한다는 것이다. 국익이나 국가 신인도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수구 기득권 지키기에 권·언이 일치한다. 수구 정치세력과 수구 언론의 ‘시대정신 죽이기’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일제시대의 친일, 독재시대의 어용, 남북화해 시대의 발목잡기는 가히 필사적이고 본능적이다. 친일 어용 발목잡기를 통해 구축한 인적·물적 기반으로 거대한 주류세력을 형성하고 누대에 걸쳐 국권을 농락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민족 반역 세력이 주류가 된 나라는 한국과 남부 베트남뿐이었다. 공교롭게도 두 나라는 분단과 동족상쟁을 치렀다. 민족 반역 세력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통일보다 분단을 택했기 때문이다. 합리적인 사회라면 항일 반독재 통일세력이 주류가 되는 것이 정상이다. 그래야 나라에 정기가 흐르고 정의가 선다.

한국 사회에서 정통과 주류가 뒤바뀌게 된 데에는 언론의 책임이 가장 크다. 친일 언론, 군사독재와 유착해온 언론이 주류 언론이 되면서 시기마다 시대정신을 깔아뭉개고 반시대정신을 비호, 육성하면서 우리 현대사는 비틀어졌다. 그런 와중에서도 민중의 힘은 꾸준히 성장하여 민주화를 쟁취하고 남북 화해를 추구하여 마침내 여기까지 왔다. 정치권은 대북 지원설의 진위를 철저히 규명하되 시대정신을 죽여서는 안된다. 남북 화해협력은 이 시대 불변의 시대정신이기 때문이다.


추천기사

기사 읽으면 전시회 초대권을 드려요!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