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 바겐과 MB의 고집

2009.10.20 18:04
김근식 경남대 교수·정치학

[시론]그랜드 바겐과 MB의 고집

이명박 대통령이 야심차게 제안한 한국식 북핵전략 ‘그랜드 바겐’ 이후 북·미 간 양자협상 움직임이 주춤하는 양상이다. 지난 7월의 포괄적 패키지와 8월의 클린턴 방북, 그리고 9월의 북·미 양자협상 방침 등으로 순항하던 북·미 대화 분위기가 이 대통령의 그랜드 바겐 천명으로 제동이 걸리는 형국이다. 이 대통령은 그랜드 바겐을 설명하면서 북핵 폐기의 종착점에 대한 명확한 합의를 토대로 5개국이 일치된 행동을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 정부의 고집을 다른 나라에도 은근히 압박하는 뉘앙스다.

북핵해결 우선 기다림 전략

원자바오 중국 총리가 남북관계 개선을 희망한다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자리에서도 이 대통령은 북핵 우선을 강조하면서 그랜드 바겐 설명에만 집착했다. 미 국방부 고위관료가 김정일 위원장의 이 대통령 초청 사실을 작심하고 공개한 것 역시 북·미 대화와 남북 대화를 거부하는 한국 정부의 고집에 대한 불만의 표출임을 부인하기 힘들다.

정부의 설명에 따르면 그랜드 바겐은 북핵 프로그램의 일부분에 대해 단계적으로 접근하는 과거의 접근과 달리 ‘핵폐기의 핵심에 대해 근본적 해결’을 주장하는 것이다. 즉 과거처럼 동결과 불능화 등의 조치에 대해 합의하고, 대가를 지불하고, 다시 상황이 교착되고 이전으로 되돌아가는 방식이라면 결코 협상을 시작하지 않는다는 단호함이 바탕에 깔려 있다. 적어도 북한이 핵물질 및 핵무기 폐기 등에 대해 불가역적 조치를 결심하거나 보여줄 경우에만 본격적인 협상이 시작되는 논리적 구조를 안고 있다. 결국 그랜드 바겐은 북핵 해결을 위한 일괄타결이라는 단어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실제 내용은 북이 핵무기나 핵프로그램의 핵심에 대해 본질적으로 굴복하지 않는 한 애초부터 협상 자체가 시작될 수 없다는 전제조건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랜드 바겐은 협상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협상의 조건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고, 따라서 협상이 성사되기보다는 협상 성사를 어렵게 하는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청와대 내부는 ‘북이 동의하지 않아 협상이 시작되지 않아도 아쉬울 게 없다’는 단호한 분위기다. 그랜드 바겐은 북핵 문제의 본질적 해결이라는 원칙을 고수함으로써 사실상 협상을 시작하지 못해도 괜찮다는 이명박 정부의 또 하나의 ‘기다림의 전략’이자, 북이 완전히 굴복하지 않으면 협상의 시작도 없다는 ‘북핵판 비핵·개방·3000’ 전략인 셈이다.

협상 불가능한 ‘원샷 딜’

그랜드 바겐은 북핵 폐기라는 최종 목표만을 협상의 원칙으로 고수하면서 이를 위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고민과 대안은 빠뜨린 슬로건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이 그랬던 것처럼 ‘북핵해결 우선’ ‘북한 인권 개선’ ‘상호주의 관철’ 등 선언적으로 원칙만을 과도하게 강조할 뿐 그 슬로건을 이루기 위한 실제적인 솔루션은 전혀 고민하지도 제시하지도 않는 것과 유사하다.

그리고 그 유사함에는 대북정책이나 북핵정책 모두 ‘최고 수준의 원칙’만을 ‘의연하게’ 견지하면 북이 알아서 굴복하든가 아니면 남북관계를 중단하거나 북핵협상을 중단하면 그만이라는 무모한 기다림의 전략이 깔려 있다. 정부가 설명하는 ‘원샷 딜’이라는 단어에는 복잡하고 어려운 북핵 문제를 북한의 굴복으로 단번에 풀겠다는 무모함이 은연중 내재되어 있다. 그랜드 바겐은 협상의 안이 아니라 협상을 불가능하게 하는 자기만족적 원칙의 확인에 다름 아닌 것이다. 비현실적인 무모한 고집에 집착하는 이명박 정부가 한반도 정세 변화의 외톨이가 될까봐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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