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희망있는 미래’를 위해

2009.10.22 18:10
이명원 | 문학평론가 지행네트워크연구위원

[시론]아이들의 ‘희망있는 미래’를 위해

소설가 공선옥의 산문집 중 <마흔에 길을 나서다>라는 것이 있다. 시인 백석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난 듯한 민초들의 고통에 대한 팽팽한 공명이 돋보이는 책이다.

나 역시 마흔이 되면 번다한 세상의 표면이 아닌 깊이, 요동치는 욕망의 끌탕보다는 마음의 눈이 그윽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시간의 폭풍우에 난파된 듯한 일상의 속도성에 금을 긋고 싶었다.

그러나 정작 마흔의 허들을 가볍게 넘어선 나는 길을 나서는 대신, 산부인과 병원에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갓 태어난 아기를 품에 안고 있었다. 어떤 아비들은 아이의 첫 울음소리에 뜨거운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는데, 나는 모자동실의 회복실에서 울고 있는 아기와 마취가 서서히 풀리면서 신음하고 있는 아내를 번갈아 바라보며,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부동자세를 취했던 것이다.

중년에 첫 아기의 탄생은 축복이다. 그러나 삼복더위에 문병 온 가족들은 양수에 퉁퉁 부은 아기의 얼굴을 잠시 확인한 후, 곧장 신종 인플루엔자 A(신종플루)의 위험성을 염려하는 것으로 화제를 전환시켰다. 정체 모를 것에 대한 공포는 파장이 커, 퇴원 후 아내가 산후조리를 하던 처가에서 내가 인후통과 기침이 있다는 이유로 서울로 추방되거나, 추석 때 친가 방문 역시 아내와 아기의 동반 금지를 전제로 허용되는 식의 진지한 에피소드도 있었다.

당면한 현재의 위험 역시 우울한 것이었지만, 내가 더욱 근본적으로 염려하고 있는 것은 내 아이를 포함한 미래세대에 장기지속될 확률이 높은 더 큰 위험성이다. 과연 이들이 직면하게 될 미래가 ‘희망 있는 미래’일까 하는 의혹이 깊다. 현재와 같은 비인간화와 물질주의적 도착과 적자생존의 복마전이 멈추지 않는다면, 오직 ‘깊은 민주주의’를 통해서만 체화할 수 있는 공동체의 덕성이 붕괴되는 현실에 그들은 직면하게 될 것이다.

또한 현재의 기성세대가 ‘문명사적으로’ 결단하지 않는다면, 미래세대의 성인식은 지구온난화에 따른 기후이상의 파국적 현장의 끔찍한 목격자가 되어야 할 운명에 처해 있다. 이미 북극의 빙하는 다 녹아버린 후일 것이며, 화석연료는 사실상 고갈상태로 가고, 현재의 신종플루와는 비교도 안 될 각종 전염병이 창궐하거나, 극심한 재난상황들이 전 지구적으로 발생할 뿐만 아니라, 대규모 기아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시나리오는 더 이상 영화적 상상력이 아니다.

생명의 시간은 모래시계와 같다. 부모의 시간이 아래로 흘러 자녀의 시간이 되고, 그 자녀가 다시 부모가 되면, 그 시간은 후손들에게 빠져나가는 식으로 순환된다. 그러나 오늘의 생태학적 위기는 뒤집을 수 없는 모래시계처럼 보인다. 인간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일단 시간의 앙금이 침전되고 나면, 그 다음 상황은 예측하기 어렵다. 아이의 검은 눈동자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볼 권리가 있다. 대저 우리에게 미래세대에 대한 책임윤리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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