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전 대통령 심복’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 별세

2009.11.01 17:57 입력 2009.11.01 17:58 수정

유신권력 2인자…‘김대중 납치사건’ 끝내 침묵

하남서 은둔 불우한 말년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 지난 31일 서울 상일동 경희대 동서신의학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5세.

1979년 6월12일 무소속이던 이후락 의원이 공화당에 입당하며 박정희 대통령에게 인사하고 있다(위). 72년 11월3일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남북조절위원회 남측 위원장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노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와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1979년 6월12일 무소속이던 이후락 의원이 공화당에 입당하며 박정희 대통령에게 인사하고 있다(위). 72년 11월3일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남북조절위원회 남측 위원장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노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와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 전 부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심복’으로 유신 권력의 2인자였다. ‘공작정치’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1970~73년 중앙정보부장으로 있으면서 72년 10월 유신 체제를 확립하고 73년 김대중 납치 사건을 주도하는 등 암울한 현대사의 주요 장면을 만든 장본인 가운데 하나였다. 72년 평양에서 김일성 주석을 만나 7·4 남북공동성명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그는 24년 경남 울산에서 태어났다. 울산공립농고를 나와 46년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임관한 뒤 육군 정보국 차장, 주미대사관 무관 등을 지냈다. 권력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5·16 쿠데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으로 발탁되면서부터다. 친미 정보통이던 그는 군부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끌어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쿠데타 주역들을 따돌리고 박 전 대통령의 전폭적인 신뢰를 얻었다. 63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39세의 나이에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임명되면서 정권의 실세로 떠올랐다. 69년 10월 3선개헌 파동으로 물러날 때까지 6년간 비서실장으로 재임했다. 당시 청와대 비서실은 ‘소내각’이라고 불릴 만큼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잠시 일본 대사로 나갔던 이 전 부장은 70년 제6대 중앙정보부장으로 권력의 핵심에 복귀했다. 이듬해 신민당 김대중 후보가 바람을 일으킨 제7대 대선에서 선거를 총지휘하면서 박 전 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다. 이 무렵 그는 명실상부한 ‘정권의 2인자’였다. 72년 5월 대북 밀사로 평양에 파견돼 김일성 북한 주석과 사상 첫 남북비밀회담을 했고 7·4 남북공동성명을 이끌어냈다. 이 전 부장은 판문점을 경유, 3박4일간 평양을 방문하는 동안 김 주석과 두 차례 회담했다. 당시 ‘일이 잘못될 경우 자결하겠다’며 청산가리를 품고 북한으로 넘어갔다고 한다. 그의 일처리 방식을 잘 보여주는 일화다.

이 전 부장의 별명은 ‘제갈조조’였다. 제갈공명과 조조를 합쳐놓은 것 같이 머리가 비상하고 치밀하다는 뜻이다. 전형적인 ‘책사형’이기도 했다. ‘군주’의 의중을 읽어내는 데 뛰어났고 한없는 충성심을 보였다. 주일 대사 시절 생선초밥을 좋아하는 박 전 대통령을 위해 청와대 오찬에 맞춰 비행기편으로 생선 초밥을 공수할 정도였다.

그러나 과잉 충성과 지나친 권력욕은 화로 이어졌다. 73년 12월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이 술자리에서 이 전 부장에게 “박 대통령이 노쇠했으니 물러나시게 하고, 후계자는 형님이 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 쿠데타 모의로 비화하면서 실각했다. 이 일이 있기 넉달 전인 8월 일본 도쿄에서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를 두고 이 전 부장이 박 전 대통령의 신임을 잃을 수 있다는 위기감에서 저지른 것이라는 분석이 유력하게 제기됐다. 그는 이 사건의 역사적 실체에 대해 죽기 전까지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 전 부장은 78년 고향 울산에서 무소속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이듬해 공화당에 입당하면서 화려한 재기를 꿈꾼다. 하지만 10·26 사건으로 박 전 대통령이 암살되고 80년 신군부가 등장한 뒤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몰려 정계에서 물러나야 했다. 당시 재산과 관련해 “떡(정치자금)을 만지다보면 떡고물(부스러기 돈)이 묻는 것 아니냐”고 ‘해명 아닌 해명’을 한 뒤 ‘떡고물’이란 말이 장안의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그는 85년 정치활동 규제에서 풀렸지만 대외행사에 좀처럼 얼굴을 나타내지 않았다. 경기 하남에 거주하며 도자기를 만드는 것으로 소일하면서 은둔 생활을 해왔다. 한 시대를 풍미한 권력자였지만 말년은 불우했다. 하남 자택과 땅은 보험사 대출금을 갚지 못해 99년 8월 경매처분됐고 경기 광주에 있던 도자기 요장과 땅도 94년 매각됐다. 2004년 부인이 별세한 뒤에는 노인성 질환을 앓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거동이 불편해 바깥 출입을 할 수 없었고 지인들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지난 5월 뇌종양 증세로 입원해 치료를 받아오다 최근 병세가 급격히 악화됐다.

유족으로는 이동훈 전 제일화재 회장 등 3남1녀가 있으며, 빈소는 동서신의학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발인은 2일 오전 8시30분, 장지는 대전 국립현충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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