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관객 2백만 돌파 마을잔치

2002.05.01 18:42

“나도 영화에 나왔어. 시장에서 퍼머 말고 라면봉지로 싼 바로 그 사람이여”

곱게 봄옷을 차려입고 반짝이가 달린 구두를 신어 한껏 멋을 낸 할머니 한 분이 냅다 소리친다. ‘소문난 잔치’에 올 만한 사람이니 도장부터 찍고 입성하겠다는 심산이시다.

1일 정오 무렵 충북 영동군 산골마을 궁촌리에서 아름다운 잔치가 열렸다. 할머니에 대한 애틋함과 두고 온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자극하면서 2백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집으로…’를 축하하기 위해 제작진이 마련한 동네잔치다. 영화 속에서 상우와 외할머니가 애틋한 정을 나누면서 헤어지던 버스정류장에 풍성한 먹거리가 마련됐다. 통돼지 바비큐가 구수하게 익고 잡채, 전, 탕수육등 먹음직스런 음식들이 주인공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초록이 한창인 산골마을엔 난데없는 손님들이 들이닥치자 개구리들이 요란하게 울어 제낀다.

이정향 감독은 촬영중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마을 어른들을 반갑게 맞으면서 ‘건강이 어떠시냐’며 따뜻하게 포옹했다. 동네 어른들은 오랜만에 외손녀를 만난 표정으로 이감독과 스태프들을 반겼다.

영화에서 할머니에게 초코파이를 건네던 구멍가게 주인역의 유동지월 할머니(78)는 “뭐 쬐끔 나왔어”라며 못내 쑥스러운 기색이시다. 함께 온 할머니가 “김할머니처럼 많이 나올 줄 알았는데 쬐끔 나와서 섭섭해서 그러는 거여”하며 장단을 맞춘다. 이에 유할머니가 힘을 얻어 한마디 하신다.

“이제 내 별명이 ‘초코파이 할머니’래. 그래도 촬영할 때 엔진가 뭔가 한번도 안냈어”

마을 사람들보다 조금 늦게 ‘궁촌리의 슈퍼스타’ 김을분 할머니가 오셨다. 머리를 빗어 비녀를 꽂고 연한 연둣빛 상의와 검정색 바지를 받쳐입은 할머니는 영화 속보다 훨씬 젊어 보이셨다. 최근 몸이 안좋아 서울 아들집에 계시다가 잔치를 위해 기꺼이 내려오셨단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처럼 말씀이 없으시다. 영화 개봉뒤 각종 매체에서 쏟아지는 인터뷰와 사진촬영 요청, CF모델 섭외에 이르기까지 평생 산촌에서 농삿일에 뼈가 굵으신 할머니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변화였으니 혼란스러운 건 당연하실는지도 모른다.

“바쁜 농번기에 영화 출연해 주시고, 이집저집 들쑤시고 다니면서 소품 빌려달라고 해도 언제나 도와주신 주민 여러분,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 은혜 앞으로 두고두고 갚겠습니다”

이정향 감독이 허리숙여 주민들에게 인사했다. 할머니·할아버지들은 막걸리잔을 기울여가며 영화 ‘집으로…’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나는 영화에서 나를 못찾겠더라니까. 옷 보고 알았어” “고향사람들한테 전화 엄청 받았어” “꼭두새벽부터 밤까지 하는데 정말 힘들어 죽다 살았다니께”

영화 속 상우가 짝사랑하던 볼이 통통한 귀여운 소녀와 지게진 씩씩한 남자애로 나와서 학교에서 스타가 됐다는 두 어린이도 왔다. 아역배우인 유승호가 다른 스케줄 때문에 내려오지 않았다는게 못내 아쉬운 눈치다.

잔치가 무르익자 주민 중 한 분이 ‘성주풀이’를 구성지게 불렀다. 노인들의 어깨가 들썩들썩했다. 모두들 나와 어우러져 춤을 췄다. 누군가 답가를 부르라며 이정향 감독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이감독이 한영애의 ‘누구 없소’를 가수 뺨치는 실력으로 노래했다. 귀에 익지 않은 노래에도 동네 어르신들은 박자에 맞춰 신나게 춤을 췄다. 영화 작업 기간 동안 미운정 고운정이 들었던 스태프들과 동네 주민들은 마치 ‘가족’이 된 듯했다.

이감독과 제작진은 취재진들에게 할머니 집 공개를 꺼렸다. 이감독은 “드라마와 영화 때문에 관광지화돼 가는 산좋고 물좋은 곳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면서 할머니집도 누군가가 지붕을 떼가는 등 많이 훼손됐다고 했다. 또 사람들이 몰려오면 상수원이 오염될 우려도 있다는 것이다.

평생 남루를 행복으로 알고 살아온 산골마을의 촌로들, 영화의 정석을 저버리지 않고 고집스럽게 자신의 목소리를 담은 영화쟁이들. 이들이 우리와 더불어 살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영화 이상의 축복이다. 작지만 아름다웠던 이날의 산골잔치는 산그림자가 길게 드리울 때까지 계속됐다.

〈충북 영동/최민영기자 myc@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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