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을 말하는 작가 이호철

2006.04.09 17:52

지금 우리에게 분단은 어떤 모습으로 남아있을까. 60년, 강산이 옷을 6번이나 갈아입는 사이,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했던 그 갈라짐은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을까. 이산가족 상봉, 남북 단일팀, 한반도기, 장관급 회담, 6·15 정상회담, 6자회담 등등 그동안 갈라짐을 메워가려는 시도가 없지 않았다. 또 정치적 상황과 주변 정세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통일을 향하는 발걸음은 단 한번도 쉰 적이 없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갈라져 있고, 어쩌면 서로가 서로에게 향했던 뜨거운 가슴도 점점 식어져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왜 하나됨은 이다지도 멀고 험난한 것일까.

[사람속으로] ‘분단’을 말하는 작가 이호철

이땅 누구보다 이산(離散)의 아픔과 하나됨에 대한 염원을 간직하고 살았던 중견 작가 이호철씨(74). 그에게도 분단 극복과 하나됨은 더이상 미뤄둘 수 없는 숙제로 남아있다.

“1998년 처음 북한을 방문했을 때 평양 보통강호텔에서 보았던 다 떨어진 4장의 수건을 잊을 수 없습니다. 만지고 또 만졌죠. 수도 평양의 으뜸 호텔의 수건이 저 정도라면 일반 인민들은 도대체 어떤 것을 수건으로 쓰고 있을까. 그러면서 한량없이 넘쳐나는 아수라장 남쪽 우리네의 삶이 떠올랐고, 가슴을 타고 흐르던 ‘싸’함을 잊을 수 없습니다.”

작가는 8년 전 그날로 되돌아간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가슴을 타고 흐르던 뜨거웠던 그 무엇. 그는 그것이 하나됨을 향한 가능성이라고 지목했다. 정치적인 통일이 아닌 사람과 사람이 만나 이뤄내는 통일의 가능성을 얘기했다.

“아직도 남아있는 잃어버린 반쪽에 대한 아련한 기억, 북한 인민이 아닌 우리의 또다른 얼굴을 기억하고 그리워하며 안쓰러워하는 그것이 통일을 향한 하나의 단초가 되지는 않을까라는 생각은 지금도 그대로입니다.”

그는 이것을 ‘한 살림 통일론’으로 이름붙였다. 정치인들이, 고위급 관료들이 말하는 정치적 통일론이 아닌 한 민족 한 핏줄임을 잊지 않고 견지해 나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됨을 위한 밀알이요, 씨앗이라는 말이다.

“사람들이 북한은 아직 변하지 않았다고 여깁니다. 물론 2000년 1차 이산가족 상봉때 보았던 북한과 지금의 북한이 그리 크게 변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분명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헤어짐을 아쉬워하고 또 만나자고 눈물을 훔치며 손을 흔드는 또다른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걸 잊지 않아야 진정한 통일의 씨앗이 싹을 틔웁니다”

그러면서 그는 98년 처음으로 북한을 들렀을 때 자신을 접대하고 안내했던 그들을 기억해냈다. “출구 문 옆에서 얼굴을 내민 채 부끄러운 듯 머리 숙여 인사했던 접대원 김경선, 헤어질 때 ‘심장에 남는 사람’이라는 시를 건네주었던 안내원, 백두산에서 자신이 아끼고 아꼈던 지팡이를 선뜻 선물로 건넸던 백두산 탐사대장 이종서 박사 등…. 나를 남한사람이 아닌 한 핏줄로, 함께 이땅에서 살아가는 한 민족으로 이웃으로 대했던 사람 냄새 나는 사람들이었죠.”

하지만 여전히 통일이 멀기만 하다. 건너고 뛰어넘어야 할 장애물은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우리 내부에 존재하는 통일에 대한 각각의 생각들, 보수와 진보로 나뉜 갈등, 아직도 사그라지지 않는 적대감 등등. 하지만 작가는 그런 찌꺼기 생각을 이제는 묻어버려야 한다고 단언한다.

“과거의 일입니다. 과거를 오늘에 되살려 갈 이유가 없습니다. ‘미친 세월’로 치부해야 합니다.” 분단과 질곡의 역사 한가운데서 망향의 한, 만나지 못하는 혈족에 대한 그리움을 속으로 삼켰던 그이기에 그말을 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경색되고 답답한 통일에서 유연하고 폭넓은 통일로 가져가야 한다고 덧붙인다.

더하여 그는 이쪽 못지 않게 저쪽에 대해서도 주문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이쪽의 도움과 관심 없이는 쉽게 이룰 수 없다고 했다.

“북한 사람들, 가까이에서 보면 대단히 경직돼 있습니다. 하나같이 굳어있고 겁겁해 있고 주눅이 들어있습니다. 뭘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하루 24시간 정력을 쏟아부을 ‘생업’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면서 북한 사람들을 아직도 지배하는 것은 ‘위대한 수령’과 ‘위대한 지도자’에 대한 충성심 경쟁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그 경직성은 하루종일 혹시 수령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한 것은 아닌지라고 노심초사하는 두려움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래서 그는 남쪽의 도움이 더욱 절실하다고 말했다.

“개성공단과 한반도에너지기구(KEDO), 금강산 관광, 남북철도 연결 등 다양한 교류를 통해 그 사람들에게 생업, 즉 일거리를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생업에 바쁘고 할 일이 있다보면 차츰 ‘위대한 수령’이라는 마술에서 깨어날 수 있습니다. 마술에서 깨어나면 비로소 삶이 보일 것이고, 그 삶을 위해 뭔가를 하게 됩니다. 서로의 절실함을 알게 되죠.”

그래서 그는 금수산 기념궁전에 안치된 김일성 주석의 시신을 향해 “‘아아 애처롭지 않습니까. 오로지 ‘위대한 어버이 수령님’에 대한 효성과 충성 하나로 온몸과 마음을 달궈 살아가는 당신 품안의 인민들이 애처롭지 않습니까. 이제 한 사람 한 사람을 진정으로 쓰다듬어 당신에게서 풀어드리오소서. 각자 생업에 나서도록 이제 당신께서 몸소 나서서 이끄시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그는 2000년 북한에 남은 유일한 혈육 누이동생을 만났다. 그날 좌불안석하던 누이동생을 아직도 기억한다는 그는 북한 사람들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변화를 제기했다.

“북한 사람들은 남한으로 내려온 우리를 어떻게 생각할까. 한번 생각해 봅시다. 내 고향 원산은 한국전쟁 중에 그야말로 쑥대밭이 됐습니다. 비행기 폭격보다 더 무서운 게 소리없는 함포인데, 원산 앞바다 코앞에서 함포를 쏘아댔죠. 그런 엄청난 포격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세월이 흐른 뒤 무슨 생각을 할까. 혹 자기들만 살겠다고 남한으로 도망간 배신자라고 생각지는 않을까”라고. 그런 두려움 속에서 자신들만의 생존을 위해 더욱 굳어지고 경직된 사회로 갈 수밖에 없지는 않았을까. 이는 체제 논쟁의 문제가 아닌 북한 사람들을 이해하는 하나의 모티브는 되지 않을까.

지금도 그는 돈이 생길 때마다 루트를 통해 누이동생에게 돈을 보낸다. 그러면 누이동생은 ‘잘 받았다’라는 글과 함께 안부를 전한다고 한다.

그는 이런 북한과 고향, 혈육과 통일에 대한 심정을 담은 글을 모아 최근 ‘분단 60년의 남북한 사람살이’(문화문고 간)라는 책을 펴냈다.

작가는 1·4 후퇴 이후 부산의 제면소(국수 만드는 집)에서 일하다 ‘탈향(脫鄕)’을 펴내며 문단에 데뷔했다. ‘탈향’을 통해 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했고 ‘고향을 떠난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는 지금 50년을 애둘러 고향으로 돌아가려 한다. ‘귀향(歸鄕)’. 그에게 귀향은 이제 소설의 주제가 아닌 숙명일지도 모른다.

서로를 응시하는/쌀쌀한 풍경을/ 뒤로하고, 언제 한번은 불고말/독사의 혀 같은/징그러운 바람을/ 뚫고, 모진 겨우살이를 이겨내고, 작가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글 배병문 여론독자부장·사진 김대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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