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어 연구학자 오구라 신페이 사망

2010.02.07 17:26 입력 2010.02.08 10:56 수정
서영찬 기자

처음으로 ‘이두’표기 해석

고등학교 시절 고전문학을 가르친 은사는 그를 항상 ‘소창진평’이라 불렀다. 그리고 국보급 국어학자 양주동을 곁들여 설명하는 것을 빼놓지 않았다. 소창진평은 일제시대 조선에서 조선어를 연구한 일본 학자다. 필자가 처음으로 접한 언어학자였던 그의 일본식 이름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 그래서 소창진평 하면 금세 어떤 인물인지 기억해내지만 ‘오구라 신페이’라 하면 머리를 갸웃거린다.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가 세상을 떠난 날이 1944년 오늘이다.

오구라는 신라·고려시대 주로 썼던 표기법인 이두를 처음으로 해독한 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유명하다. 동경제국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한 오구라는 29세(1911년)에 조선총독부 관료로서 한국 땅을 밟았다. 그의 주된 관심은 한국어에 있었다. 오구라는 경성제국대학 한국어 담당 교수로 취임, 43년 정년퇴임 때까지 한국어를 가르쳤다. 이희승, 이숭녕, 김사엽 같은 국어학자들이 오구라의 제자다.

[어제의 오늘]조선어 연구학자 오구라 신페이 사망

오구라의 대표작으로 29년에 발표한 ‘향가 및 이두의 연구’는 이두 연구의 서막을 연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언어학 볼모지 조선의 학자들에게 많은 자극을 주었다. 양주동이 대표적이다. 오구라가 두각을 드러낸 분야는 방언학이다. 그 스스로 ‘유별나다’고 말할 정도로 방언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고 한다.

오구라의 언어관은 당시 대다수 일본 지식인의 의식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일본과 동아시아 국가를 문화 대 비문화로 규정해 바라보는 의식 말이다. 오구라는 41년 ‘문예춘추’에 “우수한 문화를 가진 언어가 문화적으로 뒤처진 민족 속에 저절로 흘러들어가는 것이 자연 상태”라고 밝히면서 이는 국력에 좌우된다고 썼다. 그는 학문이 일선동조론, 황국신민화 정책 같은 이념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을 경계했다. 하지만 국가 간 우열관계를 당연시하는 역사관을 지녔기에 일제 식민지배에 대해 무비판적이었다. 그 까닭에 오구라는 한국인에게 존경의 대상이자 비판의 대상이기도 하다. 고등학교 은사가 소창진평이라 부른 데에는 이 두 가지를 염두에 둔 어휘 선택이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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