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9년 필리핀 티라드패스 전투

2010.12.01 21:16 입력 2010.12.02 00:11 수정

미군에 맞선 혁명군 장렬히 전사

미국에 맞선 필리핀 독립운동(1899~1902) 당시 루손 북부지역에서 60명의 필리핀 혁명군이 500명의 미군을 상대로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전투다. 미군의 추격을 받던 필리핀 독립운동 지도자인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이곳의 험준한 티라드패스의 산악지형을 통해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도록 그레고리오 델 필라 준장이 이끄는 후방군이 좁은 계곡에서 목숨을 건 싸움을 벌였다. 레오니다스 스파르타 왕이 300명의 정예군을 이끌고 페르시아 대군에 맞서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전투에 빗대 ‘필리핀판 300’이라고도 불린다.

[어제의 오늘]1899년 필리핀 티라드패스 전투

이날 새벽 6시30분, 간밤을 참호와 석조 바리케이드 뒤에서 보낸 필리핀 혁명군은 산 아래부터 접근해 올라오는 미군과 맞닥뜨렸다. 혁명군의 총신이 불을 뿜으며 일제사격을 시작했다. 몇 명의 미군이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페이튼 마치 소령이 이끄는 33보병연대는 주춤거렸다. 한때 미국과 함께 스페인을 필리핀 땅에서 몰아내는 데 일조한 아기날도 지도자였지만, 필리핀을 새로운 식민지로 꿰차려는 미국에 있어서 아기날도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일 뿐이었다.

하지만 현지 지형에 밝은 혁명군에 비하면, 숫자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이 전투는 불리했다.

페이튼 소령은 텍사스 출신의 저격병들을 불러 “뒤쪽으로 돌아가 참호 안의 적군을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몇몇이 산을 타고 돌아 총탄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이번엔 몇 명의 혁명군이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하지만 누구도 달아나지 않았다.

미군은 이번에는 마을 사람을 데려왔다. 하누아리오 가클루트라는 남자였다. “저 참호 뒤의 길로 안내해라.” 필리핀군보다 숫자가 많은 미군이 참호 뒤편으로 돌아 공격에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다. 그리고 발포하기 시작했다. 목숨을 내건 필리핀 혁명군은 5시간 동안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60명 중 52명이 사망하거나 부상했다. 전멸에 가까웠지만, 아기날도 지도자는 안전하게 피신한 뒤였다.

사망자 중에는 혁명군에서 가장 어린 ‘소년 장군’이자 ‘필리핀의 레오니다스’로 불린 24살의 그레고리오 델 필라 준장이 있었다. 총탄이 목을 관통했던 것이다. 델 필라의 시신을 발견한 미군들은 계급장과 군복, 개인 소지품을 모두 전리품으로 거둬갔다. 발가벗겨진 그의 시신은 몇날을 그렇게 방치된 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용맹함을 존경한 미군 중위 드니스 퀸런이 거둬 장례를 지냈다. 묘비에는 ‘군인이자 신사였다’고 새겨넣었다.

<최민영 기자 m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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