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의 친일 청산… 젊은 세대도 반민특위 기억해야”

2015.03.01 21:10 입력 2015.03.01 23:13 수정

반민특위 김상덕 위원장 아들 김정륙씨, 무관심 세태 토로

“친일 청산은 영원히 해결될 것 같지 않습니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위원장이던 독립운동가 김상덕 선생(1892~1956)의 아들인 김정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부회장(80)은 1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반민특위가 점점 잊혀지고 있어 씁쓸하다”며 이같이 토로했다.

김정륙 임시정부기념사업회 부회장은 1일 “친일 청산이 이뤄지지도 않았는데 반민특위가 잊혀지고 있다”고 말했다. | 연합뉴스

김정륙 임시정부기념사업회 부회장은 1일 “친일 청산이 이뤄지지도 않았는데 반민특위가 잊혀지고 있다”고 말했다. | 연합뉴스

반민특위는 제헌헌법과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친일파 척결’을 내걸고 1948년 10월 설치된 특별기구로, 수사권과 기소권은 물론 재판권까지 가졌다. 초기에는 이광수·최남선 등 유명인을 포함한 1000명에 가까운 인사들을 조사하며 국민적 지지를 받았지만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당시 정권의 비협조로 지지부진하다가 결국 1년 만에 와해됐다.

김 부회장은 “단 한 사람도 처벌받지 않았고, 친일 청산도 요원해져 답답할 뿐”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나라 팔아먹은 사람들이 득세하고 민족정기가 허물어진 지금, 세상의 주객이 전도된 듯하다”며 “광복 70주년과 96번째 3·1절이라는 뜻깊은 날임에도 분하고 참담한 심정”이라고 개탄했다.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 학무부장을 지낸 김상덕 선생은 중국 상하이, 난징, 충칭 등지를 오가며 항일운동을 펼쳤다. 광복 이후에는 제헌국회 헌법 기초의원과 반민특위 위원장 등을 지냈지만 한국전쟁 도중 납북됐다. 독립운동에 헌신한 부친의 전력은 종적을 감추고, ‘납북자의 아들’이라는 신원증명만 남아 김 부회장은 수십년간 연좌제라는 올가미 속에 갇혀야만 했다.

1935년 난징에서 태어난 김 부회장은 아버지와 함께 중국 여기저기를 오가며 성장했다. 1948~1949년 반민특위 활동 시기의 기억도 생생하다.

“중학교 2학년 때인 1949년 5월 말이었습니다. 밤에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반민특위 관사로 갈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했고, 아버지는 식구들에게 ‘각자 방에 들어가서 내가 나오라고 할 때까지 꼼짝 말고 있으라’고 했죠. 아버지와 이 대통령은 단둘이 응접실에서 이야기를 나눴는데, 배웅 후 아버지는 매우 분개해 있었습니다. 좀처럼 화를 안 내시는 분이었는데….”

그 다음달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로 들이닥쳐 특위 소속 특별경찰을 무장해제시키는 일이 벌어졌고, 특위는 유명무실하게 됐다. 김 부회장은 “비록 처벌에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반민특위 덕분에 친일파 1000여명에 대한 수사, 기소, 재판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며 “주요 친일파의 행적을 기록으로 남긴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했다. 그는 “해방 정국 당시 민족정기를 살리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며 “젊은 세대도 반민특위의 정신을 잊지 말고 꼭 기억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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