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춘궁기가 닥쳐도, 바이러스가 번져도…꽃 안 핀 2월 없고, 보리 안 팬 3월 없댔당께

2020.02.26 20:47 입력 2020.02.26 20:54 수정
원유헌

꽃 피는 봄이 오면

구례 사림마을 오봉댁 어머니와 손자 박준수군이 감자 심을 밭에 단단해진 쌀겨 덩어리를 잘겨 부숴 퇴비를 주고 있다.  ⓒ원유헌

구례 사림마을 오봉댁 어머니와 손자 박준수군이 감자 심을 밭에 단단해진 쌀겨 덩어리를 잘겨 부숴 퇴비를 주고 있다. ⓒ원유헌

아직 감자밭을 안 갈았다 하니
“암시랑토 안 혀요 늦은 거 아이라”
언제나 안심을 주는 오봉댁어머니

오봉댁서 뱃골 두둑 밥을 먹고 와
봄 작업 일정을 적다 TV를 켜니
그새 코로나19 확진자는 또 늘어
그러다 문득 씨감자를 확인하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감자 눈 땄능가요?”
간전댁할머니는 분명 초능력자다

“확 먹구 튀어버릴까?”

농사지으며 식당을 운영하는 동생네 가게에서 밥을 먹다가 내뱉은 말이다. 지난가을에 80㎏씩 주문 받은 쌀을 10㎏씩 세번째 보냈다. 쌀값 선불로 받을 때는 달콤했으나 앞으로 다섯번은 택배비와 포장재값 지출만 남았다. 두둑했던 겨울 지갑은 얼음 두께처럼 얇아지고 봄에 들여올 농자재는 줄을 섰다.

“저그 한라봉식당 문 닫았다는 소리 못 들었소?”

뭔 소린가 하니 갈치와 고등어 요리로 유명한 식당의 안주인이 주변에서 적잖은 돈을 빌려 야반도주를 했단다. 잘나가던 식당이 하룻밤 새 문을 닫았다는 얘기였다.

“해 묵을라믄 그렇게 휘청거리게 해 묵든지 그깟 쌀값 들고 튀어서 신세 고친답디까?”

“뭐 신세까지 바꿀 생각은 없어. 이제 하지 감자 나올 때까지 돈 들어올 구멍은 바늘귀인데 나갈 구멍은 터널이니까 하는 소리지 뭐.”

춘궁기(春窮期)가 봄보다 빨리 찾아왔다. 옛날 가난한 집안은 설 쇠면 쌀이 떨어졌다고 했는데, 우리 집은 쌀만 남았다. 그 쌀도 거주지만 나랑 같을 뿐 임자는 따로 있다. 별반 다를 바 없다. 어르신들 말씀이 봄 되면 길쌈도 하고 팔고 닭, 개, 돼지도 장에 내다 팔아 고무신도 사 신었다고 하셨는데 난 재주도 없고 내다 팔 것도 없다. 몸이라도 팔아야 한다.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해서 여름까지 버티는 수밖에 없다. 닥치기나 했으면 좋겠다.

십수만원어치 택배를 부치고 돈 뜯긴 심정으로 집에 돌아와 TV를 틀었다. 바이러스 상황이 궁금했다. 생긴 것만 멀쩡한 사람들끼리 코로나인지 폐렴인지 이름 가지고 싸우고 있었다. 예전에 난리를 일으켰던 사스(SARS)나 메르스(MERS)나 모두 변종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것이었다. 돌기 모양이 왕관을 닮아서 코로나라고 부른 지 80년도 더 됐다. 감기처럼 지나가던 게 갑자기 난폭해져서 폐를 공격하니까 폐렴 증상을 보이는 것뿐이다. 원인과 결과인데 이름이 어떻든 무슨 상관인가. 목숨을 잃는 사람은 늘어나고 남아 있는 사람도 나날이 힘들어하는데 무슨 바보짓들인지 모르겠다. 월급 받는 바이러스들.

울화통에 목이 타서 주방으로 나왔다. 우유를 꺼내고 컵을 찾는데 어제 커피를 타서 마셨던 유리컵이 보였다. 설거지거리 만드느니 재활용을 택했다. 컵 바닥에 약간의 묵은 커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우유를 반쯤 부어서 헹궈 먹으면 되겠다 싶었다. 우유를 따르다가 마당에 개가 짖어 컵을 돌리면서 창으로 내다봤다. 전날 주문한 책이 현관 앞에 놓여 있었다. 택배 만세다. 커피가 다 녹았나 시선을 챙겨왔다. 왼손의 컵은 멈춰 있었다. 오른손의 우유팩을 돌리고 있었다. 컵은 여전히 투톤이었다. 실수라기보다는 지속적인 증상이다. 날이 풀리면서 정신 줄도 풀렸나 보다. 며칠 전 책을 보다가 귤을 까서 알맹이 놔두고 껍질을 씹었다. 컵라면에 커피 포트 옆 생수를 부은 탓에 물에 젖은 생라면을 먹은 적도 있다. 냄비에 다시 끓여 먹으면 된다는 생각은 면을 꺼내 반쯤 먹었을 때 떠올랐다. 남 욕하지 말아야겠다 생각했다. 나도 바보짓을 하며 사는 주제였다.

구이장님(전 이장님)댁으로 나섰다. 그 댁 막내아들 가족 다섯 식구가 며칠 전 귀촌을 했다. 서울에서 하던 출판사를 구례로 옮겨왔고, 주말마다 내려와 돕던 농사일을 이어간다고 하니 귀농 반 귀촌 반인 셈이다. 일머리로 따지면 10년차 농부인 나보다 야무졌지만 경운기나 기계 다루는 일은 아직 서툴렀다. 감자밭 로타리(밭 갈기) 친다고 들어서 혹시나 도울 일이 있을까 싶었다.

사림마을 부녀회원들이 마을회관에서 어르신들에게 점심식사를 차려드리고 있다.  ⓒ원유헌

사림마을 부녀회원들이 마을회관에서 어르신들에게 점심식사를 차려드리고 있다. ⓒ원유헌

막내 J는 경운기와 씨름했고 다리가 불편하신 오봉댁어머니는 털퍼덕 밭에 앉은 채 손으로 퇴비를 흩치고 있었다. 얼른 삽을 찾아 퇴비 작업을 돕고 나서 J에게 약간의 경운기 운전 팁을 알려줬다. 무리하게 경운기를 돌리는 것이 딱 9년 전 내 모습이었다. 힘으로는 자신 있다고 경운기랑 겨루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J에게 알려준 요령은 그때 장씨아저씨에게 전수받은 그대로였다.

“그나 아이나 선재네는 감자밭 갈았소?”

“아뇨. 아직 못 갈았어요. 담 주에 갈고 3월 초에 심을라구 하는데 비가 계속 온다니 늦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암시랑토 안 혀요. 늦은 거 아이라.”

언제 들어도 안심을 주는 말씀이다. 오봉댁은 요맘때면 하시는 말씀을 이어 하셨다.

“일년 농사 지어서 삼년 묵으믄 좀 좋으까. 참 먹고살기 힘들어요. 봄마다 요로코롬 애써야 헝께.”

“옛날에 더 힘드셨죠. 보릿고개도 있었고. 어떻게 지내셨대요.”

“배고프기 시작할 때라. 어렵게 지냈어요. 이거저거 해 먹음서 지냈지만 청맥죽을 젤루 많이 먹었어요.”

손주에게 지팡이를 뺏기고 힘들게 밭으로 나오신 구이장님도 함께 앉으셨다. ‘청맥죽’이라는 단어에 자동인지 강제인지 기억을 소환하셨다. 두 분의 말씀은 만담처럼 주고받으며 이어졌다. 달콤하지만은 않지만 미소를 동반한 추억여행이 시작됐다.

쑥부쟁이 나물을 캐는 마을 아낙네들.  ⓒ원유헌

쑥부쟁이 나물을 캐는 마을 아낙네들. ⓒ원유헌

망종이 지나야 보리가 익는데 채 보리알도 안 든 거를 베 와. 손으로 비벼서 알을 빼내 쪄서 죽을 해 묵어. 미리 풋보리를 해다 먹으니 여름에 또 고생이지만. 장구재비 좁쌀뱅이, 오글오글하고 새파란 거 있어. 없는 사람들은 항상 그렇게 알탕알탕 살았어. 봄에 부자 아니면 7할은 굶었어요. 봄 되면 그래도 쑥이 마이 자라. 있는 사람이건 없는 사람이건 몸에 좋다는 게 쑥이여. 쑥 캐다가 쌀 쬐끔 옇고 주걱으로 착착착 이겨. 그거겉이 먹기 싫은 거이 없어요.

젊은 소나무 찾아서 먼 산까지 가. 소나무에 마디가 있어. 겉 껍질 싹 벳기고 쏙 껍질을 착 벳겨 갖구 와. 미역짝같이 쫙 해서 짊어지고 와. 반쪽만 벳겨야 허는디 욕심쟁이들은 싹 벳겨. 그러믄 나무가 죽어. 그렇게 해서 먹는 걸 송쿠밥이라구 해요. 뜨건 물에 삶아서 송진 물 빼고 도구통(절구통)에 넣고 찧어. 그걸 콩고물에 묻혀서 떡이라고 해서 묵어. 난 송쿠밥을 먹지 쑥밥은 못 먹겠어요.

쑥구재미, 보리뱅이, 외파맹키로 생긴 물구, 그것도 새파란 거 해 먹으면 죽어. 개발딱주, 뚱깔, 항가꾸, 취, 분취, 미역취, 끌텅취, 무쳐서 먹는 거인디 독해. 합다리는 국만 끓여 먹어. 엉개, 눈개승마, 삿갓대가리는 패기 전에 버글버글 헐 때 캐야 맛나. 찔룩, 삐비, 장댓빗…….

연신 이어지는 나물 이름은 랩처럼 들렸다.

“그렇게 먹구 살아도 장사들 쌨어. 그게 다 좋은 거였나봐요. 지금으로 따지면 잡곡밥에 약초 반찬이었지.”

“나도 그때는 가마니에 석회 100키로씩 지게에 얹어서 끄떡없이 짊어지고 일어났는디 지금은 맨 몸뚱이도 못 일어나….”

잠깐의 삽질에 비해 차려주신 저녁밥은 지나쳤다. 겨우내 줄어든 뱃골은 꽉 찼는데 더 먹지 않으면 서운하고야 말겠다는 오봉댁의 시선에 무너졌다. 임신부처럼 허리를 젖히고 집으로 돌아왔다. 소파에 주저앉으려는데 방귀가 나왔다. 나온 김에 시원하게 한 방 더 쏘고 앉았다. 생각이 짧았다. 가스가 발사된 위치는 앉았을 때 코앞이었다. 엉덩이가 아래로 빠지면서 생긴 순간적 저기압에 가스는 확산되지 못하고 다시 모였고 그걸 들이마신 거다. 공룡의 멸종 원인을 추측할 때 지들이 뀐 연간 5억t 방귀 땜에 지구온난화가 와서 죽었을 거란 얘기를 들었는데 공감하게 됐다.

한 치 앞도 모르는 내 곁에
미래를 내다보는 이웃들이 계신다

코로나19에 불안한 국민들한테도
말씀해주시면 좋겠다
“암시랑토 안 혀요”

정신 차리고 농사일지에 봄 작업 계획표를 적어 넣었다. 넉넉하게 잡으니 3월 말까지 쉬는 날이 없다. 지우고 다시 빡빡하게 일정을 잡았다. 그래도 3월 중순이다. 여태까지 일을 당겨서 한 적 없다. 계획은 늘어질 게 뻔하다. 감자마무리에 허덕이고 있을 때쯤 다른 밭에는 고춧대가 국군의장대 사열하듯 서 있을 거다. 왜 인간이 10년이 다 되도록 나아지는 게 없을까.

다시 켠 TV 화면 한구석 코로나19 확진자는 또 늘어나 있었다. 사람들은 신천지, 광화문, 질본, 심각, 확진 같은 단어들을 무겁게 반복했다. 상황이 나아질 거라고도 하고 아직 멀었다는 얘기도 했다. 비전문가의 얕은 생각이지만, 코로나19는 진정돼도 비슷한 바이러스가 사회를 흔드는 빈도는 높아질 게 분명하다. 코로나19의 확산 속도에 메르스의 치사율을 가진 변종이 닥쳐올 때 “그런 법이 어딨냐”고 따질 곳이 없다.

코로나19 영향으로 달집태우기 행사가 취소되자 구례 서시천변에 준비했던 달집을 이른 시간에 태우고 있다.  ⓒ원유헌

코로나19 영향으로 달집태우기 행사가 취소되자 구례 서시천변에 준비했던 달집을 이른 시간에 태우고 있다. ⓒ원유헌

변종 바이러스를 예측할 수도 없고 백신을 마련해 놓을 수도 없다. 어찌 보면 지금이 앞으로 올지 모르는 더 강하고 독한 바이러스 공격에 단단히 준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수 있다. 현명한 대처 방법을 어디에서 찾을지 고민해야 한다. 차단과 봉쇄에 덧붙여 공유와 협력을 생각해야 한다. 아차하다가 후회할 게 겁난다.

문득 다용도실에 놔둔 씨감자는 안녕한지 궁금했다. 따순 곳에 뒀던 사람들은 싹이 길게 나서 곤란을 겪고 있다는 말씀을 들었다. 박스를 열어 보니 싹이 꽤 올라와 있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감자 눈 땄능가요?”

간전댁할머니였다. 우리 집에 CCTV를 심어 놓으신 게 분명하다. 방에서 모니터로 지켜보시다가 감자 상자 여는 걸 확인하고 전화하신 거다. 아니면 초능력자이시다. 다른 설명이 불가능하다. 이런 분이 내 이웃이다. 한 치 앞도 몰라 지 방귀 지가 맡으면서 죽겠다는 놈 곁에 십리 밖 열길 속을 보시는 어르신이 계셨다. 든든하다.

게다가 오봉댁어머니는 미래를 예측하셨다.

“꽃 안 핀 2월 없고 보리 안 팬 3월 없댔어요.”

다 잘될 거라는 말씀이다. 방송에 나가셔서 불안한 국민한테 말씀해 주시면 더 좋겠다.

“암시랑토 안 혀요. 늦은 거 아이라!”

▶필자 원유헌

[원유헌의 전원일기](11)춘궁기가 닥쳐도, 바이러스가 번져도…꽃 안 핀 2월 없고, 보리 안 팬 3월 없댔당께


1967년생. 44년간 서울에서 살다가 2011년 연고가 전혀 없는 전남 구례로 내려가 농부입네 살고 있다. 농사만으로는 먹고살기 힘들어 각종 아르바이트로 현찰을 보충하며 연명한다. 2018년 <힘들어도 괴롭진 않아>(르네상스)라는 책을 만들기도 했으나 8년째 나아진 건 없다. 웬만하면 그러려니 하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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