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이 하늘…위로인가 염장지르는 건가, 이 또한…살아가다보면, 지나가겠지

2020.09.17 06:00
원유헌 농부

그래도 먹을 건 넘친다

바비, 마이삭, 하이선 등 최근 ‘태풍 3형제’가 훑고 지나간 하늘은 얄밉게도 아름다웠다. 웅장한 구름과 이국적인 노을 때문이었을까. 넋이 나간 채 여러 날을 보내고 있다. ⓒ 원유헌

바비, 마이삭, 하이선 등 최근 ‘태풍 3형제’가 훑고 지나간 하늘은 얄밉게도 아름다웠다. 웅장한 구름과 이국적인 노을 때문이었을까. 넋이 나간 채 여러 날을 보내고 있다. ⓒ 원유헌

수해 이후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날 이전의 고민은 싹 사라져
근데 그게 아내의 화를 돋운다

산이 무심하다. 서시교가 닳도록 철물점을 오가면서 마주하는 지리산은 하나도 안 슬프다. 구름은 왜, 또 아름답기까지 하다. 어쩌다 본 노을은 이 세상 것이 아니었다. 현실감이 떨어진다. 내가 그렇다. 조용하게 피해를 입어서인지 내 꼴이 내 것 같지 않다.

가끔 이상하다. 왼쪽으로 누우면 가슴이 먹먹하고 울컥해진다. 오른쪽은 덜하다. 이유는 모른다. 수해 충격으로 쓰러진 냉면집 사장님 모습이 떠오르고 나흘간 진흙 가득한 집에서 주무셨다는 할머니도 생각난다. 축사로 달려가다가 코앞에서 물에 멈춘 사람들도 보인다. 사장님과 할머니 얼굴도 모르고 축사에 가 본 적 없다. 경험은 꿈처럼 가물거리고 생각과 상상은 경험처럼 굳어진다.

심하진 않지만 후유증이 생겼다. 기억상실, 집중력 저하, 조울증세도 보인다. 어찌 보면 다행이다. 그날 이전의 고민이 싹 사라졌다. 뭘 걱정하고 살았는지 머리에 없다. 그때도 ‘이것만 아니면 살겠다’는 게 있었을 텐데 2020년 8월8일 이전은 태평천하로 기억된다. 이후로는 말하고 들은 걸 기억하지 못한다. 지나가며 했던 약속은 모두 까먹고, 적어 놓은 메모도 한참을 들여다봐야 내용을 파악한다. 그러다 보니 아내와 다투는 일이 잦아진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싱크대 후드는 어떡할 거야?”

“저번에 같이 얘기했잖아. 그 자리에 한다고.”

“언제 얘기했다고?”

“벽지 보러 갔을 때.”

“들은 적 없는데. 바닥 콘센트는 어떡할 건데.”

“그것도 얘기했어. 그냥 선 이어서 쓴다고.”

“전혀 기억에 없는데? 언제 얘기했다는 거야?”

“목수님 왔을 때 얘기했잖아!”

“난 들은 적 없어!”

“그때 셋이서 얘기했다고! 메모도 했잖아. 여기 봐!”

“이걸 내가 썼다고? 내 글씨체네. 근데 왜 신경질이야!”

새집 지을 때와 과정은 같은데 기대는 없고 화만 돋는다. 사람은 그렇다 치고 왜 하늘까지 성질을 부리나 모르겠다. 집은 물을 먹었어도 농작물은 괜찮다며 그나마 다행이라고 얘기한 지 보름 만에 바비, 마이삭, 하이선이 입방정을 나무랐다. 늦참깨가 묶어 놓은 줄 너머로 고개를 꺾었고, 논 한 단지(3000㎡)의 벼가 편하게 누웠다. 감은 그나마 아직 달린 것이 더 많아 다행이고, 콩과 고구마는 잡초를 벗 삼아 용케 자라고 있다. 아직 태풍이 발길을 거둔 것이 아닌지라 언제고 다시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할 터, 거두고 말려서 털 때까지는 다행이라는 말을 삼가는 것이 좋겠다.

남길 수 있는 것 빼놓고 다 비웠다. 의도치 않게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할 처지이다. 잘 채워서 도움 준 분들에게 복구된 집이 완성되면 개방할 예정이다. ⓒ 원유헌

남길 수 있는 것 빼놓고 다 비웠다. 의도치 않게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할 처지이다. 잘 채워서 도움 준 분들에게 복구된 집이 완성되면 개방할 예정이다. ⓒ 원유헌

피해 액수를 적어내라는데
책·LP·사진·앨범·필름…
이것들은 어떻게 값을 매길까

사람들은 나와 집의 모습보다 다른 것에 놀란다.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되고 지원금도 100퍼센트 인상해서 준다고 하니 그들이 위안을 얻었나 보다. 수해 피해는 집이 없어지는 완파, 기둥이나 벽체가 떨어져 나가는 반파, 그냥 물이 들어왔다 나가는 침수로 구분되는데 물에 젖어 못 쓰게 된 벽체와 단열재, 집기와 전자제품 등은 대상이 아니다.

“그래도 웬만큼 나온다지?”

“응, 군에서 100만원 나라에서 200만원 나왔어.”

“엥? 나머지는 언제 준대?”

“없어.”

“그게 다라고?”

그게 어디라고. 내가 나라를 위해 한 일이 뭐 있다고 더 바라겠나. 그래도 물 관리를 맡고 있는 한국수자원공사에는 책임을 묻기로 했다. 저수량이 비정상적으로 높았고 방류 계획을 제대로 알리지 않은 책임이다. 피해조사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손해사정인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녔다. 건축물과 가재도구를 나눠서 목록을 적으라고 했다. 숙소에서 정리하다 보니 적잖이 잃었다. 다시 사면 되는 것과 살 수 없는 것으로 나뉘었다.

책은 내게 추억이었다. 꽂혀 있는 책의 좁은 면에 인쇄된 몇 자 안 되는 제목이 그 책을 사고 읽고 느꼈던 감정을 되살려 주곤 했다. 혹여나 뽑아 본 책 앞쪽에 누가 선물하며 남겨 준 메모가 있거나 20년 전 아내에게 선물하며 쓴 글귀가 있으면 그립거나 간지럽거나 하며 씩 한 번 웃게 되는 앨범이었다.

LP도 마찬가지였다. 형과 서로 자기가 샀다며 소유권을 주장하던 기억도 있고, 어느 겨울 레코드숍을 지나다가 나오는 음악에 꽂혀 구입한 추억도 있었다. 아내의 옛 남자친구가 LP 껍데기에 남긴 같잖은 메모는 볼 때마다 유치했고 열 받게 했다. 확 내다버리고 싶었는데 잘 됐다.

이것저것 써 내려가다가 ‘사진, 앨범, 필름’이라고 적으며 마음 아팠다. 피해 액수를 적는 칸에 펜을 댈 수 없었다. 맨 위 칸 제목에 ‘가격’이라고 분명히 박혀 있었다. 이걸 어떻게 값을 매길지 어려웠다. 그들이 묻는 것은 가치가 아니었다. 나와 아내의 어릴 적 사진은 이제 없다. 디지털카메라를 구입하기 전 20세기의 추억은 머리에만 남았다. 그 머리도 믿지 못할 판이다. 잊으면 뭘 잊었는지도 까먹을 테니 위안이 된다.

생면부지의 사람들까지도
내가 괜찮기를 바라는데
버리고 말리는 시간이 끝났으니
함 그래 봐야지, 지나가겠지

그래도 숙소엔 먹을 것이 넘친다. 햇반과 컵라면이 대기 중이고 친구가 보내 준 냉동식품이 그득하다. 끼니마다 걱정해주는 분들이 있고 저녁엔 고기도 사주곤 한다. 어쩌다 3일 연속 삼겹살을 먹게 된 날 밥을 산 친구에게 “고기를 자주 먹어 좀 질린다”고 했더니 그걸 또 슬픈 농담으로 받고 짠한 눈으로 바라본다. 흙 묻고 냄새 나는 꼴이 유머를 다큐로 만든다.

며칠 전 소들이 많이 떠난 양정마을을 떠올리다가 ‘땡’ 소리에 놀라 전자레인지에서 레토르트 식품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소고기미역국’이었다. 뒤편에 표시된 원산지를 확인하니 호주산이었다. 그래도 맘이 좋지 않아 놔두고 물에 말아 먹었다. 그날은 양정마을에서 소 위령제를 지낸 날이었다.

나는 아직도 군청과 서시교를 오갈 때 길옆의 그 마을을 쳐다보지 못한다. 애써 외면이라도 해야 내가 살겠다 싶어서다. 예전에 농장서 닭을 키우다 죽은 놈을 봐도 힘들었는데 그곳 사람들은 오죽하겠나. 혹자는 ‘자식처럼 키운’이라는 말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자식처럼 키운다면서 잡아먹으라고 내다 파냐고. 맞는 말이다. 어찌 식용으로 키우는 동물과 자식을 비교하겠나. 하지만 그들도 생명인지라 반려동물만큼은 아니어도 교감이 있고 반응을 느낀다. 말도 건네고 쓰다듬곤 한다. 그래서 내다 팔 때는 ‘미안하네. 잘 가게’ 마음이 들게 마련이다. 소를 잃은 사람들은 재산상의 손해 이상으로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조금만 빨리 달려가 풀어줬으면 됐는데 하는 안타까움이다. 그만큼만 이해해주면 좋으련만.

잠시 들른 농장 입구에서 장씨 아저씨를 만났다. 길에서 멈춘 아저씨가 차에서 내리면서 말씀하셨다.

“어디서 어찌 지내냐.”

“예 잘 지내고 있어요.”

“미안허다. 가 보도 못허고.”

“오시긴요, 아저씨도 바쁘시면서.”

아저씨 비닐하우스도 침수됐다. 호박은 수확을 끝낸 뒤였지만 가열장치를 비롯해 기계들을 모두 잃었다. 그러면서 왜 나한테 미안해하시는지 모르겠다. 뭔가 감추듯 돌아서다 알았다. 나의 아저씨니까.

피해 입고 나서 옷을 내주고 잠자리, 먹을거리 모두 주셨던 전 이장님댁을 오랜만에 찾아뵀다. 오봉댁 어머니는 왜 와서 밥 안 먹냐고 나무라셨다. 밥상을 차려주시고 고봉밥을 건네며 말씀하신다.

“끼니 거르지 말고 잘 챙겨 잡사요. 다른 거 없어요.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다 이거 묵자고 애쓰고 사는 거잉께.”

밥과 말씀이 힘이 된다.

한 달 열흘이 조금은 힘들다. 힘든 걸로 치면 농사짓는 정도인데 마음이 고단해서 그런가 보다. 나보다 지치고 아픈 사람이 더 많다는 걸 알지만 나도 내 발끝이 쉽진 않다. 내 쉴 곳 작은 집이 없어서인지 쉬어도 휴식이 아니다. 그동안은 버리고 덜어내고 말려야 하는 시간이었고, 이제 다시 더하고 채우는 일이 남았다. 쓸 만한 물건은 세 평 창고가 남을 만큼이다. 불 난 끝은 있어도 물 난 끝은 없다고, 습격이라고 하기에 너무나 은근했던 물의 침입은 거스름돈을 남기지 않았다. 오랜만에 틀어 본 라디오에서 노래가 나온다.

“그저 살다 보면 살아진다. 그 말 무슨 뜻인지 몰라도 기분이 좋아지는 주문 같아~”

그래, 그저 살아 보는 거지 뭐. 주변과 멀리서 도와준 분들, 30년 만에 연락을 주는 친구들, 친구의 동료라며 위로하는 분들, 어디 사는 누군지도 모르는데 응원하는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내가 괜찮기를 바라는데 함 그래 봐야지. 그렇게 살아지겠지. 지나가겠지.

▶원유헌

[원유헌의 전원일기](18)이 하늘…위로인가 염장지르는 건가, 이 또한…살아가다보면, 지나가겠지


1967년생. 44년간 서울에서 살다가 2011년 연고가 전혀 없는 전남 구례로 내려가 농부입네 살고 있다. 농사만으로는 먹고살기 힘들어 각종 아르바이트로 현찰을 보충하며 연명한다. 2018년 <힘들어도 괴롭진 않아>(르네상스)라는 책을 만들기도 했으나 8년째 나아진 건 없다. 웬만하면 그러려니 하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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