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번엔 文” “그래도 朴”…곳곳의 정치갈등

2012.12.01 13:51 입력 2012.12.01 14:14 수정
백철 기자

·대선 앞두고 가정 직장 학교 내 정치갈등 뜨거워… 사이 멀어지거나 불이익 당하기도

“친구 설득하기도 어려운데 어르신들은 더 어려워요. 노력하다 안 되면 투표날 효도관광이라도 보내드려야죠.”

“경상도 출신에 노무현 욕하던 어머니를 설득했습니다. 박근혜가 되면 아들이 힘들어진다는 말이 결정적이었죠. 박정희 신앙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자식 사랑입니다.”

대선이 가까워지면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각 세대와 계층이 서로의 이견을 확인하는 일들이 늘어나고 있다. 왼쪽은 11월 28일 충남 예산군을 방문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의 모습. |박민규 기자

대선이 가까워지면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각 세대와 계층이 서로의 이견을 확인하는 일들이 늘어나고 있다. 왼쪽은 11월 28일 충남 예산군을 방문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의 모습. |박민규 기자

대선 날짜가 다가오면서 SNS도 뜨거워지고 있다. 진보성향의 사용자들이 보수적 성향의 부모를 설득하겠다는 글이 올라오는 빈도도 높아지고 있다. 4월 총선에서도 비슷한 말들이 SNS를 떠돌았다. 2012년 총선과 대선이라는 두 개의 커다란 정치 이벤트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정치’를 입에 올리게 했다.

“지지후보 다르면 선거 얘기 안 꺼내”

평범한 사람들이 일상에서 ‘정치’를 말하기 시작하면서, 서로 다른 정치성향이 부딪치는 현상도 더 많아졌다. 여러 여론조사 결과가 말해주듯, 비교적 보수적인 노년층과 비교적 진보적인 청장년층이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서로의 이견을 확인하고 있다. 형제자매, 친구 등 동년배 사이도 정치색 차이로 인해 사이가 멀어지는 일들도 종종 발생한다.

가정과 직장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갈등은 주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 지지자와 야권 지지자 사이에서 나타난다. 충청도가 고향인 박숙희씨(52)는 박근혜 지지자다. 공기업 계약직 직원인 박씨는 왜 박 후보를 지지하느냐는 질문에 “박 후보와 내가 같은 박씨기도 하고, 여성 대통령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라며, “참여정부에 대한 실망감이 잊혀지지 않아 문재인 후보에 대해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박씨는 참여정부에 대한 ‘실망감’의 이유로 “대학 등록금이 비싸져 살림이 어려워진 점”과 “대통령이 정치권의 갈등을 자주 야기시킨 점”을 꼽았다.

친화력이 좋은 박씨는 직장 동료들과의 모임을 자주 주도한다. 그는 “모임에서 비슷한 또래들끼리는 정치 이야기를 가끔 하지만, 30대 이하 젊은 동료들과는 정치 이야기를 잘 안 한다”고 말했다. 이어 박씨는 “박근혜에게 호감이 간다고 말하면 젊은 친구들이 ‘지금 대통령이 이렇게 못했는데 왜 박근혜냐’고 따지고, 반대편에서 ‘노무현 시절 어려운 것 벌써 잊어버렸냐’고 되받아친다. 직장 동료들끼리 감정이 상할까봐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과는 정치의 ㅈ자도 꺼내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다.

금융권 종사자인 이상인씨(42)는 경북 태생으로, 현재는 경기도 의왕시에 거주하고 있다. 야권 성향이지만 지지후보를 아직 결정하지 못한 이씨는 “친척 어른들을 만날 일이 자주 있다. 그분들에게 지난 5년간 새누리당의 친기업 반서민 정책으로 젊은 세대가 많은 고통을 겪었다는 말씀을 드리지만, 아무리 설명드려도 어른들의 고정관념이 바뀌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씨는 “어른들께 어떤 말씀을 드려도 무조건 ‘그래도 박근혜’라고 하시니까 아예 투표를 안 하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 적도 솔직히 있다”고 말했다.

또한 이씨는 직장 내에서도 정치 때문에 갈등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8월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이 주도한 ‘무상급식 주민투표’ 때의 사례를 이야기했다. “직장 상사들 중에 회식자리 등에서 은연 중에 한나라당의 입장을 대변하시는 분들이 있었다. 한 분은 무상급식 주민투표 때 아예 서명판을 가져와서 부하 직원들에게 서명을 시켰다. 경기도민인 나는 넘어갔지만, 서울에 사는 한 젊은 직원이 ‘왜 이런 걸 시키느냐’고 강하게 문제제기를 해서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다.”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가 11월 30일 울산 유세에서 학생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가 11월 30일 울산 유세에서 학생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서울 신림동 고시촌에 사는 고시생 김동규씨(30)는 부산 출신인 아버지와 자주 정치적 의견을 나눈다. 김씨가 안철수 전 후보를 지지했고, 현재는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는 반면, 군인 출신인 김씨의 아버지는 박근혜 후보를 지지한다. 김씨는 아버지로부터 “박정희가 쿠데타를 했지만 경제를 이만큼 살렸고, 박근혜 후보만큼 국정경험이 있는 사람이 없다”는 말을 주로 듣는다고 말했다. 김씨도 이에 지지 않고 “새 정치가 필요하기 때문에 안철수 전 후보를 지지했었고, 새누리당 정권이 우리 세대에 해준 것이 없기 때문에 지금은 문재인 후보를 통한 정권교체를 원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씨는 “아버지께서 무리하게 나를 설득하려 하시진 않는다. 다만 젊은이들 생각을 듣고 싶다는 말만 하신다”고 말했다. 이와 달리 기성세대가 특정 정치색을 강요하거나 실제 불이익을 줬던 경험을 말하는 젊은이들도 만날 수 있었다.

서울 강남구에 거주하는 취업준비생 조정희씨(28·가명)는 4월 총선에서 진보신당을 지지했다. 조씨는 자영업을 하는 부모가 이따금 자신의 정치성향을 거론해 불쾌한 경험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구직이 어려워 기업 면접에서 낙방을 하고 나면, 부모님이 ‘네가 그런 극좌적인 생각을 갖고 있기에 취직이 안 된다. 네가 말하는 것에서 성향이 드러난다’는 말씀을 하실 때가 있다”고 말했다.

또한 조씨는 기업 면접 과정에서 면접관이 노골적으로 특정 정치색을 강조한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조씨의 사례는 이렇다. 면접 전형 과정 중 하나였던 ‘임원과의 대화’에서 한 임원이 조씨에게 “1970~80년대 기업을 이끌었던 정주영, 이병철 회장의 패기와 열정을 젊은이들이 본받아야 한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의 열정은 복지 포퓰리즘과 같은 좌편향된 사상에 경도된 열정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조씨는 “일방적인 생각을 강요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임원과의 대화’도 면접 과정의 일부라서 불쾌한 기색을 애써 숨겼다”고 말했다.

과외를 통해 대학 등록금을 마련해온 대학생 전준혁씨(27·가명)는 학생과 수업 도중 나눈 대화가 ‘편향적이다’라는 이유로 과외에서 잘린 경험이 있었다고 말했다. 전씨는 “논술과외의 특성상 사회적인 문제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얼마 전 ‘지하철 파업’을 주제로 수업을 했는데 학생에게 ‘저 사람들이 파업에 나선 까닭에 대해서도 정확히 알아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고 가르쳤다”고 말했다. 이어 전씨는 “그런데 학부모가 ‘수업 내용이 편향적이다’라며 다음부터 나오지 말라고 했다. 수업의 일부라고 학부모를 설득해도 ‘좌편향이다’라는 말만 돌아왔다”고 전했다.

서울 강남구의 한 고깃집에서 직장인들이 회식을 하고 있다.  사진은 기사내용과 관계없음. |정지윤 기자

서울 강남구의 한 고깃집에서 직장인들이 회식을 하고 있다. 사진은 기사내용과 관계없음. |정지윤 기자


‘세대 전쟁’ 많지만 동년배끼리도 충돌

정치성향이 ‘세대전쟁’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지만 비슷한 연령대에서 이념 갈등이 표출되기도 한다. 무역회사 임원인 전남 출신의 박상남씨(43)는 안철수 전 후보가 사퇴하기 전까지 큰형과 야권 단일화를 놓고 다툰 일이 있었다고 말했다. 박씨가 안 전 후보를 지지한 반면, 오랫동안 민주당을 지지해온 박씨의 형은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박씨는 “문 후보도 훌륭하지만, 그를 둘러싼 민주당 세력도 기득권 구태세력이다. 특히 전남에서 민주당은 특권의 상징이다”라고 말했다. 반면 박씨의 형은 정당정치의 중요성과 문 후보의 국정경험을 예로 들며 박씨를 설득했다. 박씨는 “안 전 후보 사퇴로 정신적으로 혼란스럽지만 큰형과 함께 문재인 후보를 응원하겠다. 안 전 후보도 우리 형과 같은 민주당 지지자들을 위해 나설 것으로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새누리당 청년본부에서 활동 중인 최진범씨(26)는 몇 주 전 대학 친구들과의 식사자리에서 있었던 경험을 털어놨다. 최씨는 “모임에 나온 친구들 중 한 명이 ‘안철수 선본에서 일하고 있다’는 말을 꺼냈다. 모두들 대단하다, 나도 참여하고 싶다는 반응을 보였다”며 “그 분위기에서 내가 박근혜 선본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꺼낼 수 없었다. 새누리당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공개할지 말지를 상당 기간 고민했다”고 말했다.

최씨는 결국 고민 끝에 페이스북을 통해 새누리당 청년본부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주위에 알렸다. 그는 “사실을 공개한 지 2주 정도 됐는데 70명 정도가 나와의 페이스북 친구관계를 끊었다. ‘대선까지는 연락하지 말자’는 메시지도 받았다”고 말했다.

대선을 앞두고 조그마한 정치 이슈 하나에도 사람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생겨나고 있다. 생각이 다른 사람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동질적 집단 내에서 정치 토론이 이뤄지는 모습도 나타나고 있다.

조정희씨는 생각이 비슷한 친구들과 주로 정치 토론을 나눈다. 그는 “보수적 어른들과 정치 이야기를 해도 피곤하기만 할 뿐이다. 얼마 전엔 부모님으로부터 ‘20대 여자가 좋아할 쇼핑이나 관심 가지면 되지 무슨 정치냐’는 식의 핀잔도 들었다”고 말했다.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는 박숙희씨는 “대학생 아들이 박 후보에 대해 안 좋은 소리를 가끔 하지만 특별히 대꾸는 안 한다. 박 후보 이야기는 마음 맞는 친구들과 하면 된다”고 말했다.

대선이 가까워지면서 투표권이 없는 청소년들 중에도 대선 향방에 촉각을 세우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청소년단체에서 활동하는 홍지효군은 “새 대통령이 내 20대 초반 인생에 영향을 줄 것이라서 대선에 관심이 많다”면서도 “어른들은 ‘대학 갈 생각이나 하라’는 말만 하고 정작 중요한 것은 가르쳐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홍군은 “주요 대선후보에 대해 알고 싶어서 부모님께 박정희 시대, 노무현 시대에 대해 물어봤지만 ‘그 시대를 살아보지도 않고 네가 뭘 알겠느냐’는 대답만 들었다”고 전했다. 대신 홍군은 청소년 인권단체에서 만난 친구들과 함께 직접 각 대선후보의 청소년 공약을 찾아보고 의견을 교환한 것이 정치적 관심을 키우는 데 실질적인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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