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이산상봉 서울·평양 이모저모

2000.12.01 19:17

“내아들 찾아온다. 밤에 마루 등불 끄지 말아라”던 어머니, 신혼 단꿈 속에 떠났던 남편, 목소리만 기억나는 오빠·동생이 ‘반세기의 회포’를 푼 짧은 하루였다. 손을 맞잡고 옛날얘기하고, 비비고 쓰다듬고 울먹이며 그리웠던 마음을 달랜 서울과 평양의 핏줄들은 반가움에 목청을 높여 노래도 불렀다.

◆ 서울

-그리움 삭힌詩에 ‘눈물바다’-

○…이번 상봉에서는 이산의 그리움을 삭인 시가 여럿 발표돼 주위를 숙연케 했다. 북에서 온 신현문씨는 북에 간 아들을 그리워하는 어머니(이중덕·84년 작고)의 심정을 담은 ‘등불 보고 찾아오너라’라는 시 한편을 받았다. 이 시는 신씨의 막내동생 현성씨(61)의 부인이 시어머니의 심정을 곁에서 지켜보고 옮긴 것이다.

큰댁 지붕마루에밤마다등불켜놓아라/그 등불 끄지 말아라/어둠속으로그아들찾아온다/등불 끄지 말아라….

30년간 개성검찰소의 검사로 일했던 현문씨는 이 시를 읽은 뒤 “어머니”를 부르며 통곡, 울음바다가 됐다.

-고액권 달러 잔돈으로 바꿔달라-

○…이날 롯데월드호텔에서는 때아닌 ‘달러 잔돈바꾸기 전쟁’이 벌어졌다. 이는 “북에서는 100달러도 큰 돈이라서 바꾸기 어렵다더라. 아예 잔돈으로 바꿔야 한다”는 말이 이산가족 사이에 퍼졌기 때문. 50달러, 100달러 등 고액권을 준비했던 남측 가족들은 잔돈으로 바꾸려고 몰려들어 롯데마그넷 5층의 환전소가 북새통을 이뤘다.

-김위원장 액자펴고 참배 요구-

○…이번 상봉에선 1차때보다 북측 서울방문단이 “장군님 은덕”을 더 자주 입에 올려 남측 행사관계자들을 당황케 했다. 심지어 한 북측 이산가족은 지난달 30일 센트럴 시티에서 있은 단체상봉 때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의 얼굴사진이 담긴 액자를 펴놓고 ‘참배’를 요구, 가족들이 목례를 하기도 했다. 북측 기자들은 이 장면을 일일이 촬영했다. 지난 1차 상봉때도 북 이산가족이 녹음기를 틀어놓고 남측 가족에게 ‘장군님 은덕’을 칭송하도록 요구했으나 남측 가족이 이를 거부했었다. 남측 관계자는 “북측이 1차때 ‘장군님 은덕’을 말해도 제지하지 않자 이번엔 수위를 높이는 것 같다”며 우려하는 표정이었다.

◆ 평양

-여기까지 와서도 못만나다니…-

○…한종은씨(81)는 북한의 여동생 일심씨(72)가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어 1일 개별상봉 때도 세 조카만 만나게 되자 그만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일심씨는 5남1녀 중 유일한 막내 여동생으로 가족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는 게 한씨의 회상이다. 한씨는 “여기서 돌아가면 이제 죽는 일밖에 안남았다”면서 “아무리 오지 못할 병이라도 얼굴만 보게 해달라”고 거듭 하소연해 주위의 눈시울을 붉히게 했다.

남측의 김진옥씨(80·여)도 시숙인 차한규씨(81)가 거동이 불가능해 결국 나오지 못하자 “앰뷸런스라도 타고 와 꼭 한번 보게 해달라”고 읍소해 주변을 안타깝게 했다.

-얼굴 만지며 얼마나 고생했냐-

○…전쟁통에 헤어진 아내의 처녀때 사진을 평생 간직해온 홍대중씨(79)는 손때 묻은 사진을 펴놓고 주름진 아내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어루만졌다. 홍씨는 “내가 없어 얼마나 고생했느냐”며 두 아들과 딸을 키우며 평생 수절해온 아내의 등을 두드렸고, 아내 박선비씨(74)는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홍씨 가족은 즉석에서 50년만에 가족사진을 찍었고, 아들 형주씨(54)는 왼쪽 신경 일부가 마비된 아버지의 건강을 염려한 듯 “오래 사시라”며 연신 아버지의 손과 발을 주물렀다.

-어깨동무하고 ‘우리의 소원’ 합창-

○…고려호텔 3층에서 열린 공동오찬에는 식사 도중 즉석 노래자랑이 벌어져 흥겨운 분위기가 연출됐다. 호텔 직원이 즉석에서 어코디언 반주를 넣어주면서 흥을 돋웠고 가족들이 한데 어울려 춤을 추는 등 흥이 한껏 고조된 모습이었다. 북측 가족 한명이 ‘새타령’을 부르자 곳곳에서 할머니들이 일어나 장단에 맞춰 어깨춤을 추기도 했다. 특히 ‘우리의 소원’ 합창에서는 오찬에 참석한 모든 가족이 일어나 어깨동무를 하거나 손을 맞잡고 노래를 불렀다. 노래가 끝난 뒤에는 ‘조국통일 만세’를 삼창하기도 했다.

-통일되면 2세끼리라도 만나야-

○…남측의 박해수씨(71)는 객실로 찾아온 동생들에게 족보 요약본을 꺼내놓고 “뿌리를 알라고 적어왔다”며 가계를 설명했다. “눈 앞의 여동생이 꿈이라면 깨어나고 싶지 않다”고 말한 최효순씨(71·여)는 가족의 생일이 깨알같이 적힌 가계도를 펼쳐놓고 “다음에 통일이 되면 2세들끼리라도 꼭 만나게 하자”고 다짐했다.

〈서울/권재현·이호승·조현철기자, 평양/안호기기자·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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