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고형고분 임나일본부설과 무관’

2002.03.01 19:50

지난 20년간 한국고고학계를 곤혹스럽게 만든 주제가 바로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었다. 장구처럼 생겼다 해서 장구형 고분이라고도 하는 묘제. AD 3세기 무렵 나타난 일본의 대표적인 묘제였다. 그런데 이 묘제가 한반도 남쪽 영산강 유역에서 잇달아 발견되었다. 문제는 이것이 일본보다 200년 이상 늦은 AD 5세기 말~6세기 초에 조성됐다는 것.

이는 모든 문화와 사람이 일방적으로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정설을 부정하는 셈이며 자칫하면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될 수도 있다는 걸 뜻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저명한 원로 고고학자조차 “우리가 잘 모르니 공부 좀 한 다음에 (전방후원분을) 발굴하자”고 쉬쉬했으니….

그러나 이제 부담스러운 주제이기는 하지만 1990년대 말부터 전방후원분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연구자들은 이제 옛날이든 지금이든 문화교류는 일방적인 게 아니라 상호적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한·일간 상호교류의 관점을 갖지 못했기에 침략사관에 의한 역사해석(일본)과 일방통행적인 문화전파(한국)라는 단선적인 주장만이 되풀이됐다는 반성이다.

최근 고려대에서 ‘고대 한·일 관계사의 새로운 조명’을 주제로 열린 학술토론회에서 박천수 경북대 교수는 “전방후원분은 왜계 백제 관련 무장집단이 조성한 고분”이라고 주장했다. 고고학적인 측면에서 ‘왜계 백제인설’을 주장한 것은 박교수가 처음.

백제는 475년 한성이 함락되자 웅진으로 남천했다. 그러나 궤멸당하다시피 한 백제의 통치기구는 일시 마비됐고 자력으로는 남방(영산강 유역)을 통치할 수 없었다.

따라서 백제왕권에 의해 각지에 파견된 왜계의 백제 관련 집단이 동원되어 토착세력을 견제·통치했다는 것이다. “백제는 마한 토착세력의 거점인 나주 반남지역을 현지 수장들을 통해 간접 지배하고 그 주변을 외곽에서 포위하듯 전방후원분의 피장자들인 왜계세력을 배치하는 양면정책을 썼다”는 게 박천수 교수의 주장이다. 박교수는 “개로왕 피살직후인 479년 동성왕의 귀국때 왜인 500명이 호위했다는 일본서기 기록과 백제인 가운데 왜인·중국인·신라인이 있다는 수서의 기록은 왜계 백제인의 존재를 말해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박순발 충남대 교수는 이에 대해 “이른바 왜계 백제인을 서포트 할 정도로 백제의 영향력이 컸느냐”는 의문을 제기했다. 그에 따르면 백제의 남하로 인해 영산강 중심세력이 와해되자 그보다 하위세력들이 급부상했다. 그렇게 갑자기 떠오른 하위세력들은 상대적으로 더 많은 정치적인 자율성을 갖게 되었다는 것.

그런데 전부터 일본과 정치적인 친연관계를 맺고 있었던 이 하위세력(지역의 토착 수장층)들이 바로 이런 일본묘제를 썼다는 것이다. 박순발 교수는 “나주 신촌리 9호분에 일본계의 원통형 식륜(埴輪)이 무덤에 장식됐듯 영산강 유역에는 일본과의 친연관계를 말해주는 증거들이 있다”고 말했다.

임영진 전남대 교수는 “야마토 정권의 통합에 반항하는 세력들이 다른 지역, 즉 한반도로 망명했을 가능성이 많다”면서 “그 세력은 청동기시대부터 정치적 격변기에 일본으로 흘러 들어갔던 한반도인으로 추정되며 귀향한 그들이 바로 전방후원분을 조성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학계에는 또한 “전방후원분의 원류는 한반도”라며 ‘한반도 기원설’을 주장하는 학자(강인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도 있다. 지난달 28일 정년퇴임한 강교수는 “일본학계의 연구방법론이 우리 학계를 지배하고 있다”면서 “예컨대 함평 만가촌의 무덤은 방형주구묘이며 AD 2세기쯤 조성된 만가촌 고분은 일본에서 유행한 전방후원분의 원류”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고대사 최대의 수수께끼인 전방후원분의 성격에 대해 연구자 각각의 주장은 다르다. 하지만 ‘전방후원분과 임나일본부설’을 연관시키는 데는 모두 고개를 내젓는다. 우선 전방후원분이 나타나는 기간은 50년(475~520년 사이)도 채 안될 정도로 1회성 묘제라는 것. 또 영산강 유역의 경우 일본열도에서 확인되는 전방후원분이 집중하는 정치적인 중심지가 존재하지 않고 그들이 상호연계하여 세력화되지 못했다는 점도 꼽는다. 임영진 교수는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이 한 곳에 밀집하지 않고 있으며 이는 무덤의 주인공들이 어떤 세력을 펼 수 없었음을 뜻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4세기 이후 왜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와는 어떤 관련성도 없다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전방후원분과 임나일본부를 연결시키는 ‘무식한’ 일본학자들은 공식적으로는 없다”고 입을 모았다.

<이기환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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