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딩크 감독의 감독은 '엘리자베스'였다", 이용수 교수의 2002 비화

2012.05.30 20:24 입력 2012.05.31 09:50 수정
김기봉 기자

정확히 10년 전 오늘은 한국축구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날이다.

2002년 5월31일, ‘축구변방’ 한국에서 ‘지구촌 최대 축제’인 월드컵이 개막했다.

일본과 공동으로 개최한 대회였지만 주인공은 한국이었다. 붉은 물결이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로 너울치면서 4강 신화라는 위대한 이정표도 남겼다.

4강 신화는 선수들이나 거스 히딩크 감독의 몫만은 아니었다. 5000만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감동의 역사를 만들어낸 위대한 영웅이었다.

스포츠경향이 2002년 한·일 월드컵 10주년을 맞아 당시 기술위원장을 지냈던 ‘숨은 공신’ 이용수 세종대 교수와의 인터뷰를 통해 히딩크 감독에 얽힌 비화와 4강 신화의 추억을 되살려봤다.

■‘대국민 사과문’이 하루의 시작

이 교수는 ‘대국민 사과문’ 얘기부터 꺼냈다.

“1년 6개월 동안 기술위원장을 맡으면서 매일 아침마다 노트북을 열고 ‘대국민 사과문’부터 쓰고 고치고를 반복했죠. 16강 진출에 대한 부담이 정말 컸어요. IMF라는 어려운 사정에 엄청난 돈이 투입됐잖아요. 공교롭게 일본과 공동개최하면서 성적 경쟁이 붙었고요.”

한국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열광적인 국민들의 반응과 4강 진출로 ‘변방의 기적’을 연출했다.

“만약 우리가 조별리그에서 떨어지고 일본이 올라가면 대회 이름에서 ‘코리아’가 쏙 빠지는 거나 마찬가지였어요. 그런데 월드컵 본선에서 1승도 못 거둔 팀이 4강까지 올라갔으니, 지금 생각해도 가슴 벅찹니다.”

4강 신화를 얘기하면 히딩크 감독을 빼놓을 수 없다. 이 교수는 히딩크 감독의 가장 든든한 지원자이자 감독관이었다. 4강 주역인 이을용은 최근 스포츠경향과 인터뷰에서 골든컵 대회(미국) 때 히딩크 감독과 이 전 위원장이 호텔에서 언쟁을 벌이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했다. 이 교수는 “그 것을 두고 당시 몇몇 스포츠지에선 둘이 주먹다짐까지 했다는 기사까지 나왔다”며 “히딩크 감독의 여자친구 엘리자베스에 대한 문제였다. 싸운 건 아니고 히딩크가 좀 격앙됐다”고 설명했다.

당시 엘리자베스가 대표팀 숙소에 왔다갔다 했는데, 이 교수는 한국 정서상 크게 문제될 수 있어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히딩크 감독에게 ‘한국은 지금 전쟁이나 마찬가지’라고 설득했어요. 나나 국민들의 생각은 장수가 병사들을 전쟁터에 내보내고 막사에서 여자랑 같이 있는 것 처럼 느낀다고 직언했죠. 그랬더니 히딩크 감독이 곧바로 신경질적으로 발끈하더라고요. ‘왜, 그러면 안되냐’면서….”

당시 다른 코칭스태프나 선수들의 친구가 호텔에 찾아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히딩크 감독은 ‘남자친구랑 여자친구랑 무슨 차이가 있냐’고 이 교수에게 따졌다.

“히딩크 감독의 말도 맞죠. 동·서양의 문화 차이였죠. 한국의 정서나 국민들의 일반적인 생각을 심각하게 설명했더니 그 다음부터는 여친이 눈에 띄지 않게 하더라고요. 그리고 한국이 16강에 진출한 뒤에야 스페인-아일랜드의 16강전을 몰래 같이 지켜본 적이 있었죠.”

■‘히딩크의 감독’은 엘리자베스였다

히딩크 감독은 다혈질적인 성격에 고집이 강하다. 그러나 딱 한 사람 앞에선 ‘순한 양’이었다고 이 교수는 전했다. 엘리자베스였다. ‘히딩크 감독의 감독은 엘리자베스’였던 셈이다.

이 교수는 일화를 소개했다. 2001년 12월 제주에서 벌인 잉글랜드 대표팀과 평가전에서 1-1로 비겨 한창 분위기가 좋을 때였다. 협회에서는 히딩크 감독이 이미 4주 휴가를 다 썼으니 연말연시에 휴가를 주지 말라고 이 교수에 지시했다. 동양과 달리 서양인들에게 크리스마스나 연말연시는 특별하다. 안식일이나 마찬가지다. 이 교수로서는 난감했다.

“나와 히딩크 감독, 엘리자베스 셋이서 커피를 마시는 자리에서 안좋은 얘기부터 하겠다며 협회의 방침을 전했어요. 그랬더니 바로 폭발하는 겁니다. ‘이제 (한국과는) 끝났다. 난 가겠다. 더 이상 협회랑은 일을 못한다’며 금방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갈 기세였죠.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엘리자베스가 분위기를 가라 앉히더라고요.”

엘리자베스가 ‘닥터 리(이 교수)에게 무작정 화를 내면 어쩌냐’고 진정시킨 뒤, 더 알아보면 변경의 여지가 있을 것이라고 달랬다는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아니었다면 한국축구와 히딩크가 결별할 뻔한 위기의 순간이었다. 이후 이 교수는 정몽준 당시 협회장을 직접 만나 사정을 설명했다. 그러나 대답은 ‘NO’였다. 결국 나가는 문을 막고 끝까지 설득해 휴가를 얻어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는 히딩크의 결점을 잘 보완해줬어요. 또 자기가 응원을 오면 경기가 잘 된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월드컵 때 응원오겠다고 내게 전화하는 데 오지말라고 할 수도 없고 좀 곤란했죠. 몇몇 언론이 문제를 삼기도 했고요.”

엘리자베스는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수리남 출신으로 자동차 메이커인 ‘오펠’에서 일한 커리어 우먼 출신이다.

히딩크 감독은 최근 한·일 월드컵 10주년 기념행사를 위해 방한할 때도 ‘연인’ 엘리자베스와 함께 했다. 히딩크 재단을 만들어 국내에서 다양한 자선사업을 펼치고 있는 그는 “엘리자베스가 내게 소외되고 어두운 한국사회의 또다른 면에 마음을 열고 눈을 뜨게 해줬다”고 말했다.

■히딩크에 핀잔 들은 두 가지 사연

이 교수는 스페인을 꺾고 4강에 오른 직후 라커룸에서 히딩크 감독으로부터 한바탕 호통을 들은 에피소드도 털어놨다.

“라커룸에 있는 데 4강 세리머니를 마치고 들어오자마자 ‘어디 있었냐’고 호통을 치는 겁니다. 내가 당황해하자, 씩 웃으면서 ‘늦었다. 16강 이후면 결정되는데 왜 여태 말이 없느냐’고 하더라고요. 처음엔 어리둥절했죠. 이 정도 성적을 냈으면 벌써부터 재계약 문제를 얘기해야하는 것인데 아직 말이 없느냐는 것이었죠.”

농반진반이었고, 히딩크 감독 입장에서는 섭섭할 법도했다. 사실 한국축구는 그런 ‘행복한 야단’을 맞아본 경험이 없었다.

“히딩크에게 ‘당신 눈치만 보고 있었다’고 했죠. 그러면서 ‘우린 이제까지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낸 적이 없어서 계약연장이 없었다. 경험이 없어서 그랬다’고 했더니 그제서야 좀 섭섭한 마음을 풀더라고요. 사실 그 이전에 네덜란드 아인트호벤에 가기로 얘기가 돼 있었던 것 같아요.”

한국은 준결승에서 독일에 0-1로 졌다. 경기 뒤 이 교수는 히딩크 감독에게 ‘당신 때문에 졌다’고 또 한번 핀잔을 들었다.

“독일을 이기면 일본에서 결승전을 하는 데 내가 히딩크 감독에게 농담으로 ‘난 일본가기도 결승도 싫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준결승에서 진 뒤 그래도 아쉬웠던지 나 때문에 졌다고 뼈있는 농담을 던지더라고요.”

■참 고마운 사람들

‘당시 가장 생각나는 사람은 누구냐’는 물음에 이 교수는 가삼현 당시 국제국장을 떠올렸다. 가국장은 히딩크 감독 영입을 성사시킨 주인공이다.

“워낙 일을 깔끔하게 잘 했어요. 사령탑 후보 1순위였던 에메 자케(프랑스)와 2순위 히딩크를 동시에 접촉했죠. 자케는 고사했고, 히딩크는 마음이 좀 있어서 어떻게든 붙잡아오라고 했는데 영입을 성사시켰죠. 축구를 안했던 사람이지만 축구를 위해 가장 고생했고, 명예의 전당에 오를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2002년 월드컵 때 고마운 사람 중에 한 명으로 코미디언 이용식씨의 이름을 꺼냈다. 월드컵 전에 제주에서 전지훈련이 한창 진행 중일 때다. 당시 이용식씨는 그 곳에서 낙지 요리집을 운영했고, 선수단에 식사 대접을 베풀겠다고 전화가 왔다고 한다.

“자칫 상업적으로 대표팀이 이용될 수 있다는 생각에 정중히 거절했어요. 그랬더니 직접 숙소인 호텔에 와서 해주겠다고 해 더 이상 호의를 거절할 수 없었죠. 얼마 뒤 주방장까지 직접 데려와 푸짐하게 식사를 마련해 줬어요. 이뿐 아니라 엄용수씨 등 친한 코미디언들까지 불러 1시간 반 동안 위문공연을 베풀었죠. 당시 선수들이 받는 심리적 압박감은 정말 컸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었죠.”

선수들이나 코칭스태프에게만 부담이 큰 게 아니었다. 정몽준 당시 협회장이나 이 교수도 마찬가지였다. 정 회장이 이 교수에게 “16강에 못 올라가면 나나 당신 중 한 사람은 한강다리에서 떨어져야 할 것”이라고 말할 만큼 국민적 기대가 컸다.

정부에서 주는 부담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정 회장과 이 교수는 월드컵을 앞두고 어느 날 김대중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주재하는 월드컵 지원회의에 불려갔다. 분위기도 엄숙해 바짝 긴장하고 있는데 김대통령이 착석하자마자 ‘기술위원장이 어디에 있냐’며 찾았다. 그러고는 대뜸 ‘16강에 가는 것이냐, 확률은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맨 구석 자리에 앉아 있던 이 교수는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들어오시자마자 절 찾아 정말 깜짝 놀랐죠. 심호흡을 크게 하고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2조원을 넘게 쏟아부었습니다. 16강 진출은 확률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들이 한국축구에 내린 지상명령이라고 생각합니다’.” 짧고 강렬한 이 두 마디보다 비장한 각오는 없었다.

■4강 그 후, 아쉬움…

이 교수는 월드컵 직후 포상금 문제로 협회를 떠났다. 이 교수는 모든 선수들에게 균등지급되기를 원했지만 협회 일부 인사들이 차등지급을 주장했다. 결국 선수들에게 똑같이 3억원씩 지급됐다.

“어느 날 포상금 문제로 정몽준 회장이 날 불러 생각을 묻기에 ‘이건 축제의 피날레다. 또한 선수들과의 약속’이라고 했죠. 그랬더니 정 회장이 동석했던 협회 임원에 화를 버럭내면서 내가 보고 있기가 민망할 정도로 야단을 치더라고요.”

왜 일처리를 그런 식으로 미숙하고 독단적으로 처리했냐는 것이었다. “그 문제가 해결된 뒤 저는 기술위원장을 그만뒀죠.”

정작 본인은 얼마의 포상금을 받았을까. 이 교수는 밝히지 않았지만 깎고 깎여서 선수들의 10분의 1도 안되는 2000만원 정도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교수는 역대 기술위원장 중에서 ‘가장 일을 잘 한 인물’로 평가받지만 협회는 외면했다.

“솔직히 한 번쯤은 다시 불러주길 원했어요. 4강엔 들었지만 축구 저변과 문화, 실력을 그 수준으로 재정비해야한다고 생각했어요. 눈높이를 원래 수준으로 낮춰 성장할 수 있도록 하려고 계획했는데 그렇게 끝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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