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정처 따위는 없는 소녀와 알파카 내 마음의 현을 울리는 여기 천국임을 이제야 알겠다

2019.02.13 20:40 입력 2019.02.14 10:12 수정
정여울 | 작가·문학평론가

페루의 라마와 알파카, 페른베, 그리고 제비노정기

삭사이와만에서 만난 케추아족 여인.   ⓒ이승원

삭사이와만에서 만난 케추아족 여인. ⓒ이승원

까르르, 끊임없이 반복되는
케추아족 사람들의 환대
라마의 기다란 속눈썹이
느리디느리게 깜빡이는 시간

어떤 문화유산이나 유명한 예술작품 하나 본 적 없는 날인데도, 그날의 평범한 일상이 최고의 여행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페루에서 라마와 알파카를 바라보며 보낸 시간이 그랬다. 라마와 알파카에게는 ‘시간을 잊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내게 조금만 용기가 있었더라면, 라마를 데리고 다니는 케추아족 소녀에게 “한 번만 너의 친구 라마를 쓰다듬어도 되겠니?”라고 물어보았을 것 같다. 나는 바짝 다가가 라마와 친구가 되지는 못하고 조금 떨어져서 물끄러미 바라보며 홀린 듯 시간을 보내곤 했다. “너는 페루에 라마 찍으러 왔니?” 내가 페루에서 라마나 알파카만 보면 사족을 못 쓰고 멍하니 멈춰서서 바라보거나 수없이 사진을 찍자 일행이 물었다. 겸연쩍지만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했다. 라마를 찍으러 페루에 간 것은 아니지만, ‘낙타과’에 속하는 동물들만 보면 여지없이 허물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페루는 라마나 알파카를 길거리에서도 강아지나 고양이만큼이나 자주 볼 수 있는 나라였기에, 신기함과 반가움이 더욱 커졌다. 낙타과의 동물들에게는 인간사의 복잡함에 좀처럼 길들지 않을 것만 같은 어떤 고결함이 있다. 탐욕스러운 느낌도, 부산스러운 느낌도 없다. 열심히 풀을 뜯어 먹고 있는 모습 속에도 다급함이나 결핍이 느껴지지 않는다. 라마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낯선 평화가 찾아드는 느낌이다. 이성적으로 갈등을 해결해서 찾아오는 단계적인 평화가 아니라, 느닷없고, 이유 없지만, 바라보는 순간 완벽히 이해되는 평화. 그토록 장엄한 마추픽추를 눈앞에 두고도, 한가로이 풀을 뜯어 먹으며 하루 종일 그 어떤 바쁨도 느끼지 못하는 라마. 전 세계에서 몰려든 수많은 관광객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는 라마의 초연한 모습에 반해 한동안 그들의 새카만 눈동자를 하염없이 응시하기도 했다. 지금도 분노나 짜증이 밀려올 때는 페루에서 찍은 라마나 알파카의 사진을 찾아보며 마음을 가라앉히곤 흐뭇이 미소를 흘리곤 한다.

라마와 알파카, 비쿠냐, 과나코 등 안데스 지방에 살고 있는 낙타과의 동물들은 예부터 잉카문명의 훌륭한 조력자였으며 페루인들의 다정한 친구였다. “한국 사람들은 알파카 제품들을 주로 찾지만, 여기서 진짜 알아주는 것은 비쿠냐 제품입니다”라는 현지 가이드의 설명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저토록 장구한 역사와 비할 데 없는 기품을 지닌 동물에 대해, 오직 상품의 가치에만 초점을 맞추어 설명하다니. 케추아족의 일상 속에서 때로는 가족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늘 함께하는 라마와 알파카는 인생의 동반자이고 문명의 조력자였다. 알록달록한 페루 전통의상을 곱게 차려입고 라마나 알파카를 몰고 거리 곳곳을 느긋하게 돌아다니는 케추아족은 여전히 쿠스코의 상징이자 바꿀 수 없는 역사의 흔적이 아니던가.

마추픽추의 관문, 쿠스코의 아르마스 광장.  ⓒ이승원

마추픽추의 관문, 쿠스코의 아르마스 광장. ⓒ이승원

여행을 오래 하다 보면, 갑자기 모든 목적의식을 잃고 ‘나는 그 편안한 집을 놔두고 왜 떠나왔는가’를 처절하게 질문할 때가 있다. 분명히 엄청난 목적의식을 가지고 떠나왔는데, 내가 진정 찾는 것은 그런 뚜렷한 목적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막연한 꿈의 공간을 정처 없이 헤매는 느낌, 떠남의 장소가 아니라 떠남의 몸짓 자체가 오히려 아름답고 처연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래서인지 가끔 여행이 아닌 일상에서도 천국 같은 순간을 경험할 때가 있다. 얼마 전 설날에 조카들과 모여 ‘제로 게임’을 했다. 세상에서 가장 단순한 놀이 중 하나인데, 양쪽 엄지를 모아놓고 ‘제로(0), 하나, 둘, 셋, 넷’ 등의 숫자를 말해 올라온 손가락 개수만큼 벌칙을 받는 것이다. 삼십대 중반에 접어든 막냇동생, 여섯 살 조카, 여덟 살 조카, 그리고 내가 모여서 이 단순한 ‘제로 게임’을 하고 있는데, 여섯 살 조카가 ‘너무 행복하다’며 까르르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모든 걸 다 내려놓고(물론 그 나이에는 내려놓을 걱정의 짐 같은 건 별로 없겠지만) 그야말로 천사처럼 해맑게 웃는 그 아이의 웃음을 보는 순간, ‘여기가 천국이구나’ 싶었다. 시간과 돈을 투자해 그토록 많은 ‘마음속의 천국’을 돌아다녔는데, 알고 보니 어떤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그런 천진무구한 미소가 있는 장소가 바로 우리 일상 속의 천국이자 완벽한 여행의 장소가 아닐까 싶었다. 계산 없는 미소와 넋을 잃은 사랑이 가득한 장소, 새로움을 찾기 위해 기갈 들린 영혼이 아니라 익숙한 장소 안에서도 새로운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감정 상태가 바로 천국이었다. 천국은 여기가 아닌 다른 곳, 머나먼 피안에 있다는 생각 때문에 우리 자신을 너무 고문하지 말자. 라마의 기다란 속눈썹이 느리디느리게 깜빡이는 시간, 정처 따위는 없어도 그저 좋은 케추아족 소녀가 알파카를 길잡이 삼아 쿠스코의 거리 곳곳을 누비는 시간. 그런 시간의 ‘규정할 수 없는 따스함’이 내가 꿈꾸는지도 몰랐던 또 하나의 천국임을 이제야 알겠다.

케추아족 전통의상을 입은 여인들. ⓒ이승원

케추아족 전통의상을 입은 여인들. ⓒ이승원

한없이 천진무구한 라마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내가 느꼈던 감정도 바로 명승 고지가 아닌 아주 평범한 일상 속에서 발견하는 내면의 축제 같은 것이었나 보다. 여행 중에 이런 감정을 북돋워 주는 것은 바로 낯선 사람들이 베풀어주는 뜻밖의 친절이다. 최근에 <이븐 바투타 여행기>를 다시 읽으며 여행자의 마음을 가장 편안하게 해주는 것은 바로 ‘현지인의 환대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어딜 가나 마치 민요의 반복되는 후렴구처럼 끝도 없이 이어지는 환대가 이븐 바투타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낯선 여행자에게 베풀어지는 현지인들의 어김없는 친절, 마치 처음부터 그들이 피를 나눈 형제자매인 것처럼 끊임없이 반복되는 낯선 사람들의 환대가 여행을 더욱 아름답고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이븐 바투타는 걸핏하면 여비가 떨어지고, 여차하면 ‘잘 곳이 없다’며 걱정을 하지만, 그때마다 처음 보는 현지인들이 그의 숙소를 마련해주고, 먹을 것을 챙겨주고, 여비까지 도와주어 무사히 여행을 계속해나갈 수 있었다. 그들은 생면부지의 낯선 이방인 이븐 바투타에게 항상 이렇게 말문을 연다. “형제여!” 그 말은 모든 어려움을 해결하는 내면의 황금열쇠처럼 이븐 바투타에게 힘을 불어넣어 준다. 다마스쿠스에 도착한 이븐 바투타가 열병에 걸렸을 때도 ‘누릇 딘 앗 사카위’라는 사람이 그를 극진히 보살핀다. 내 집을 당신의 집처럼 생각하라고, 당신의 아버지나 형제의 집처럼 편안하게 내 집에 있으라고. 의사를 불러 진찰을 받게 하고, 요리를 해주는 집주인의 정성 끝에 이븐 바투타는 ‘다시 길을 떠날 수 있는 힘’을 기르게 된다. 여행비가 떨어져 노심초사하는 이븐 바투타에게 금화를 쥐어주고, 낙타를 구해주며, 나그네의 식량까지 차곡차곡 챙겨준 것도 그 ‘낯선 사람의 무한한 친절’이었다.

머나먼 곳을 향한 멈출 수 없는
그리움의 단어 ‘페른베’와
간절한 여행의 다른 이름 ‘제비’
내게 속삭인다, 기꺼이 떠나자고

옛사람들의 여행기를 읽으면 이런 환대와 이런 따스함을 어디서나 쉽게 발견할 수 있었던 그 시대가 부러워진다. 현대사회의 여행자들은 엄청나게 세심한 정성을 들여 챙긴 여행가방과 만능 보물 창고와 같은 스마트폰, 노트북이나 카메라 같은 ‘장비들’을 친구로 삼아 다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우리도 이런 조건 없는 환대, 이방인을 두려워하지 않는 드넓은 마음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닐까. 현대인들은 철저한 준비가 여행의 최고 덕목인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나는 준비하지 않는 여행, 계획하지 않아도 좋은 여행을 꿈꾼다. 물론 현실 속에서는 기계와 화폐에 기댈 수밖에 없지만, 마음속에서는 좀 더 낭만적이고 빈틈이 많은 여행을 꿈꿔보는 것이다. 여비가 좀 모자라도, 오늘 당장 잘 곳이 없어도, ‘사막의 모래밭을 침대 삼아, 하늘의 달과 별을 이불 삼아 자야지’라는 상상만으로도 행복한 여행자가 되어보고 싶은 것이다. 혹은 이븐 바투타처럼 세상 어딜 가도 ‘형제여,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시오’라고 외치는 현지인들이 가득한 세상, 내가 당신의 잠자리와 먹을 것과 여비를 도와주겠다는 사람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나는 그런 여행을 꿈꾼다. 불가능함을 알지만, 그저 그리워하는 것,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좋다. 대한민국 방방곡곡을 관광자원으로 개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지만, 나는 우리 마음속에 이미 최고의 눈부신 관광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환대의 마음, 이런 눈부신 받아들임, 그 어떤 예측불가능성도 마치 처음부터 내 운명인 양 받아들일 수 있는 너그럽고 드넓고, 깊이를 측정할 수 없는 신비로운 마음. 그것이야말로 ‘다른 곳이 아닌 여기’를 천국으로 만드는 마음의 에너지가 아닐까.

라마를 데리고 다니는 케추아족 여인들. ⓒ이승원

라마를 데리고 다니는 케추아족 여인들. ⓒ이승원

작가 전혜린은 뮌헨에서 동양인 유학생이 ‘단 한 명’이던 시절, 독문학을 공부하며 작가의 꿈을 키웠다. 그녀는 ‘먼 곳을 향한 그리움’이라는 뜻을 가진 독일어 페른베(Fernweh)라는 단어에 매혹되었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아주 머나먼 곳을 향한 멈출 수 없는 그리움. 그곳에 도대체 어떻게 가야 하는지도 모르고, 그곳에 가면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도 모르며, 과연 낯선 곳에서 병이 나지나 않을지, 사람들이 쌀쌀맞거나 텃세를 부리면 어떨지, 걱정의 먹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지만 그래도 무작정 떠나고 싶은 여행자의 마음. 그 머나먼 곳을 향한 멈출 수 없는 그리움을 페른베라는 아름다운 단어가 품어 안고 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저 페른베 덕분에 인생이 바뀌었다. 걸핏하면 여행을 떠나고 싶어 몸이 근질거리고, 여행에 관련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깊은 희열을 느낀다.

며칠 전에는 ‘흥부가’ 중 ‘제비노정기’를 듣다가 왈칵 눈물이 났다. 나는 제비노정기를 통해 제비가 흥부를 찾아 다시 돌아오는 여정과 장소만큼이나 더 아름답고 절실한,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한 옛사람들’의 슬픔을 읽는다. 자신이 태어난 고장에서 평생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던 전통적인 농경사회에서 하늘로 힘차게 날아오르는 길조, 제비의 여행은 곧 그들이 떠나지 못한 여행, 평생 꿈꾸지만 결코 실현할 수 없는 간절한 여행의 다른 이름이 아니었을까.

[정여울의 라틴아메리카 기행](23)정처 따위는 없는 소녀와 알파카 내 마음의 현을 울리는 여기 천국임을 이제야 알겠다

제비노정기는 그렇게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하는 보통 사람들의 염원, 안 가봤지만 마치 백 번은 넘게 가본 듯한 능청스러움으로 여행의 장소를 묘사하는 해학과 기지가 넘치는 작품이다. 그 머나먼 곳을 향한 멈출 수 없는 그리움을 제비노정기는 따스하고도 간절하게 충족시켜주지 않았을까. 판소리의 흥겨운 가락에, 먼 곳을 향한 그리움과 목마름을 담뿍 실어 보낸 옛사람들의 마음이 참으로 아름답다. 머나먼 곳을 향해 무구하게 반짝이는 라마의 눈동자, 전혜린의 향수 어린 단어 페른베, 그리고 제비노정기의 끝없이 이어지는 ‘상상 속의 여행’이 영혼의 삼각편대를 이뤄 나에게 속삭인다. 다시, 떠나자고. 먼 곳만큼이나 가까운 곳도 아름다우니, 어디든 내 마음의 현(絃)을 울리게 하는 장소로 기꺼이 떠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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