⑬고야가 접시 닦고, 헤밍웨이가 단골이던…지금도 사랑받는 ‘300살 식당’

2019.10.30 21:23 입력 2019.10.30 21:26 수정
이민영 | 인류학자

유럽의 음식 수도 ‘마드리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레스토랑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보틴’. 내부는 300년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레스토랑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보틴’. 내부는 300년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음식에 미친 도시’ 마드리드
맛집 골목의 핵심 마요르 광장엔
1870년 개점한 병아리콩 스튜점
4대째 영업 중인 130년 된 제과점
1894년 문 연 초콜릿 가게 등
100년은 가뿐히 넘긴 노포들 즐비

‘최고령’ 식당은 소브리노 데 보틴
1725년 영업을 시작한 이곳은
19세기 보헤미안 예술가들 아지트
화가 고야가 웨이터로 일했던 곳
단골손님 중 하나였던 헤밍웨이는
자신의 작품에 식당을 묘사하기도
300년 전 오븐·장식 그대로 간직

19세기 음식문화 무르익으면서
‘음식 정체성 찾기’ 운동도 일어나
다양한 요리의 발전으로 이어져
스페인서 흔히 보는 ‘오늘의 요리’
독재자 프랑코 총통의 아이디어
하지만 뭘 먹을까 고민이라면
가성비 갑 ‘오늘의 요리’ 선택하길

[인류학자 이민영의 미식여행]⑬고야가 접시 닦고, 헤밍웨이가 단골이던…지금도 사랑받는 ‘300살 식당’

우리는 보틴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곳은 전 세계 최고의 레스토랑 중 하나이다.

우리는 새끼돼지 구이를 먹고 리오하 알타 와인을 마셨다.

- 헤밍웨이의 소설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 마지막 장면에 등장한 ‘보틴’

마드리드는 스페인의 정치적, 행정적 수도이다. 세계적인 가이드북 론리플래닛에 따르면 ‘유럽의 음식 수도’ 중 한 곳이기도 하다. 스페인의 수도가 된 후 지금까지 약 460년간 스페인 전역의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그들이 먹었던 전통음식과 음식에 대한 열정적인 태도까지 결합된 결과일 것이다. 그 역사를 담고 있는 식당들이 밀집해 있는 구시가를 돌아다니다 보면 스페인의 다양한 지역과 옛 시대로 여행을 떠난 듯한 기분이 든다. 마드리드에도 스페인이 자랑하는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이 많지만, 최소한 밤 시간만은 ‘노포 투어’를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것이 100년 넘은 식당들을 특별히 관리하고 있는 유럽의 음식 수도에 대한 예의이며, 스페인을 입체적으로 즐기는 오감만족 여행법이라 생각한다.

■ 음식에 미친 도시

‘보틴’의 코치니요 아사도. 바싹 구워져 나온 새끼 돼지 통구이의 맛은 담백하고 투박하며, 양은 엄청나게 많다.

‘보틴’의 코치니요 아사도. 바싹 구워져 나온 새끼 돼지 통구이의 맛은 담백하고 투박하며, 양은 엄청나게 많다.

마리아 파스 모레노(Maria Paz Moreno)가 쓴 책 <마드리드: 음식의 역사>는 마드리드가 ‘음식에 미친 도시’이자 ‘스페인 음식의 용광로’가 되어온 과정을 잘 보여준다. 이 책에 의하면 지금은 구시가의 중심이자 맛집 골목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마요르 광장은 15~16세기에는 도시 외곽이었다. 마드리드가 왕국의 수도가 되어 인구가 급증하고, 아메리카 대륙을 식민화하면서 경제력이 커지던 1619년에야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입맛이 고급화되고 새로운 음식의 수입이 급증하던 그때, 마요르광장 북쪽에는 4층짜리 빵 저장 시설이, 남쪽에는 정육점이 들어섰다. 이후 이곳 근처에는 계속해서 다양한 식당과 가게들이 들어섰다.

4대째 영업 중인 제과점 ‘리오하노’.

4대째 영업 중인 제과점 ‘리오하노’.

오늘날까지 영업하는 곳도 많다. 1870년 문을 열어 지금까지 마드리드의 전통요리인 코시도 마드릴레뇨(병아리콩 스튜)로 유명한 라 볼라(La Bola), 1885년부터 왕실에 과자를 납품하면서 4대째 영업하고 있는 제과점 리오하노(Pasteleria El Riojano), 1888년에 개점해 헤밍웨이 등 문인들이 즐겨 찾던 카페 히혼(Cafe Gijon), 1894년에 문을 연 뒤 지금도 24시간 내내 갓 튀긴 추로스와 초콜릿을 팔고 있는 초콜릿가게 산 히네스(Chocolateria San Gines) 외에도 당시 유명인들의 이야기와 역사를 담고 있는 칵테일바, 카페테리아 등이 많다.

역사를  잘 간직하고 있는 초콜릿숍 ‘산 히네스’.

역사를 잘 간직하고 있는 초콜릿숍 ‘산 히네스’.

노포들 중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레스토랑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곳도 있다. 소브리노 데 보틴(Sobrino de Botin·보틴의 조카라는 뜻)은 1725년에 개업해 무려 300년 가까이 영업해온 곳이다. 프랑스인 장 보탱(프랑스인이므로 ‘보탱’으로 읽어야겠으나 식당 이름은 스페인어 발음 ‘보틴’으로 한다)이 처음 시작할 때 가게 이름은 카사 보틴(Casa Botin)이었다. 그가 아이 없이 죽자 조카가 이곳을 물려받는 바람에 ‘보틴의 조카’가 가게 이름이 되었다. 당시 여인숙이었던 이곳은 19세기 보헤미안 예술가들 사이에 유명했다. 프란시스코 고야, 어니스트 헤밍웨이 등 유명한 예술가들이 이곳에서 코치니요 아사도(cochinillo asado·새끼돼지구이), 소파 데 아호(sopa de ajo·마늘 수프) 등을 먹었다. 가난했지만 야망으로 가득했던 화가 고야는 여기서 웨이터와 접시닦이로 일하기도 했다. 헤밍웨이는 소설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의 마지막 장면에 이곳을 등장시켰다. “우리는 보틴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곳은 전 세계 최고의 레스토랑 중 하나이다. 우리는 새끼돼지구이를 먹고 리오하 알타 와인을 마셨다.”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새끼돼지구이를 먹고 와인을 마셨으면 이처럼 작품에 등장시켜 역사에 남겼을까. 식당도 나름대로 역사를 그대로 담고 있다. 개업 때부터 떡갈나무 장작을 때는 전통적 방식으로 돼지고기와 양고기를 구워온 철 오븐은 지금까지 한 번도 불이 꺼진 적이 없다. 벽의 타일 장식도 처음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발코니 바깥에 굽은 채로 남아 스페인 내전의 흔적까지 보여주는 바 역시 음식관광지로서의 매력을 더한다.

■ 신분의 상징이 된 요리

오래된 가게들의 역사만큼이나 스페인 음식도 오래된 것 같지만, 사실 200년 전만 하더라도 스페인 음식이라 할 만한 게 없었다. 스페인 음식은 발전되지 않아 개성이 없다고 다들 내려다보던 1808년,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정복했다. 이후 프랑스 음식이 스페인 전역으로 퍼졌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떠난 후 경제적으로 회복된 스페인은 가스트로노미(gastronomy·프랑스적인 미식문화), 메뉴, 레스토랑 등 프랑스의 개념들을 수입했다. 부르주아 계급이 번성하면서 유명한 음식평론가들이 등장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디너 파티를 사교의 장으로 삼은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상류층은 프랑스의 음식문화에 열광했다. 당시 유행했던 프랑스 음식의 흔적은 지금까지도 영업하고 있는 라르디(Lhardy)에 잘 남아있다. 1839년에 셰프였던 프랑스 기업가가 개업한 이 고급 레스토랑은 모든 식사의 처음에 콩소메를 서빙하는 등 파인 프렌치 다이닝을 소개했고, 개점 직후부터 마드리드에서 가장 세련된 곳이 되었다. 지금도 고급 레스토랑으로 유명하며 햄, 치즈, 와인, 사탕, 케이크 등을 파는 상점과 바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

1839년에 개업한 식당 라르디의 인증판. 100년 넘은 노포들은 마드리드시에서 적극  관리한다.

1839년에 개업한 식당 라르디의 인증판. 100년 넘은 노포들은 마드리드시에서 적극 관리한다.

프랑스를 뒤쫓기 바쁘던 스페인의 음식 수준이 높아진 것은 1851년 아토차역 건립 이후부터였다. 기차와 함께 고급호텔이 들어오고, 국제적으로 훈련받은 셰프들이 들어왔다. 여전히 프랑스의 영향이 강했지만, 이제는 소스와 메뉴에 쓰이는 언어, 서빙 방법 등이 넘어왔다. 원래 스페인의 전통적인 만찬은 모든 것을 동시에 내는 뷔페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이사벨 2세는 프랑스가 그랬던 것처럼 러시아 스타일의 서빙 방법을 도입했다. 이때 요리의 디테일을 적어내는 메뉴가 도입되었고, 각 요리는 정해진 메뉴의 순서에 따라 한 접시씩 내어오게 되었다. 이때부터 일반적인 식사는 작은 전채 여러 개와 수프, 고기나 생선으로 구성된 메인, 그리고 건과류와 페이스트리, 치즈로 구성된 디저트의 코스로 구성되었다. 요리마다 다른 와인이 따라나왔다. 이제 자신의 요리사를 갖는 것은 신분의 상징이 되었다. 왕과 귀족은 남성 요리사를, 중산층은 여성 요리사를 고용했다.

■ 독재자가 만든 ‘오늘의 메뉴’

하몬 박물관에서 파는 하몬과 치즈의 일부. 이런 메뉴가 몇 페이지나 이어진다.

하몬 박물관에서 파는 하몬과 치즈의 일부. 이런 메뉴가 몇 페이지나 이어진다.

이렇게 음식문화가 무르익으면 어떤 현상이 나타날까? 많은 나라에서 그렇듯, 스페인에서도 자신들의 고유한 음식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었다. 19세기 스페인의 지식인들은 스페인 요리사들이 전통 음식보다는 다른 나라의 음식을 모방하는 것을 비판하며 사회적 질문을 던졌다. 남의 것을 따라하기만 해온 스페인 요리는 어떻게 해야 질적으로 나아질 수 있을까? 수많은 토론을 통해 스페인 요리를 차별화하려는 방법론이 탐구되기 시작했다.

스페인은 고기, 생선, 와인이 탁월하고 지역의 고유한 요리마다 전통이 충실히 반영되어 있으니, 어떻게 하면 이것들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을까? 저명한 지성인들이 음식의 역사적, 정치적 함의를 조망하면서 사회적 주제로 다루기 시작했다.

요리책이 쏟아져나왔고 중산층 이상 여성들이 디너파티에서 내놓고 싶어하는 요리들이 발전했다.

음식잡지가 늘어나면서 레시피가 다양해졌다. 음식 에세이도 늘어났다. 자연히 스페인 음식은 발전을 거듭했다. 마침내 2003년 뉴욕타임스의 저널리스트 아서 루보로부터 프랑스 요리는 낡았고, 스페인이 새로운 창조적 요리 운동의 중심에 있다는 찬사를 받기에 이른다.

이렇게 끊임없이 발전해온 스페인의 음식문화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독재자의 유산(?)이 남아 있다는 점이다. 수많은 여행자들이 스페인을 사랑하는 이유 중 한 가지는 저렴한 ‘오늘의 요리’(Menu del Dia) 때문이다. 스페인 전역의 식당 대부분은 점심 때 작은 칠판이나 종이 한 장에 ‘오늘의 요리’라고 하는 세트 메뉴의 내용을 써서 식당 앞에 내놓는다. 3개 파트에는 다양한 요리가 있어 고를 수 있는데, 서민들이 가는 식당에서 이 세트의 가격은 보통 10~15유로(1만3000~2만원) 정도 한다. 이런 세트 메뉴가 나온 것은 1938년부터 1973년까지 무려 35년이나 스페인을 통치했던 독재자 프랑코 총통의 아이디어였다. 1960년대에 시작된 관광산업은 곧 스페인 경제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새 산업의 중요성을 깨달은 프랑코의 정부는 1964년 ‘오늘의 요리’를 제도화했다. 음식과 음료를 파는 모든 식당에서는 매일 이 세트를 제공해야 했다. 첫 번째 코스는 전채요리나 수프, 두 번째 코스는 생선, 고기나 계란 샐러드, 세 번째 코스는 과일, 치즈, 플란(스페인식 푸딩) 같은 홈메이드 디저트이고, 요리는 매일 바뀌어야 했다. 그리고 빵과 4분의 1ℓ의 스페인 와인, 맥주, 상그리아나 다른 음료도 제공해야 했다. 요즘은 대부분의 레스토랑이 일반적인 낱개 메뉴도 제공하지만 ‘오늘의 요리’처럼 알찬 구성에 합리적인 ‘가성비’는 찾아보기 힘들다.

스페인이 자랑하는 하몬을 알기 위해 마드리드 여러 곳에 지점이 있는 하몬 박물관(Museo del Jamon)을 찾는 여행자가 많은데, 점심 때 판매하는 ‘오늘의 요리’도 좋다. 저녁에는 현지인들과 어깨를 맞대고 서서 스페인 전역의 하몬을 등급별로 맛본 뒤, 하몬이 들어간 다양한 요리와 와인까지 함께 맛보기 바란다. 이제 맛집 거리들을 걸어다니며 마드리드의 풍부한 역사 속으로 빠져들 준비가 된 셈이다.

▶필자 이민영

[인류학자 이민영의 미식여행]⑬고야가 접시 닦고, 헤밍웨이가 단골이던…지금도 사랑받는 ‘300살 식당’


덕업일치를 꿈꾸는 관광인류학자. KBS 여행 전문 팟캐스트 <여행상상> 진행자. 여행작가·해외여행인솔자로 70여개국을 다니며 미식, 스쿠버다이빙, 자전거, 요가, 순례 등 다양한 테마여행을 탐구했다. 서울대 인류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한국인의 해외관광문화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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