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일제가 할퀸 ‘조선시대 최고의 명산’…상흔 회복 노력은 진행형

2017.12.08 19:08 입력 2017.12.08 19:09 수정

역사학자 전우용과 남산 일대

‘명사 70인과의 동행’ 참가자들이 지난 2일 서울 남산골 한옥마을 내 헌병사령부 터에 있는 정자 망북루에서 역사학자 전우용 교수(가장 오른쪽)의 설명을 듣고 있다. 헌병사령부는 조선총독부와 총독관저를 경호하는 곳이었으며 해방 이후 수도방위사령부로 바뀌었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명사 70인과의 동행’ 참가자들이 지난 2일 서울 남산골 한옥마을 내 헌병사령부 터에 있는 정자 망북루에서 역사학자 전우용 교수(가장 오른쪽)의 설명을 듣고 있다. 헌병사령부는 조선총독부와 총독관저를 경호하는 곳이었으며 해방 이후 수도방위사령부로 바뀌었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남산 일대를 증강현실(AR)로 체험하는 것 같았다. 현실의 배경에 가상의 이미지가 겹쳐졌다. 역사학자 전우용 한양대 동아시아문화연구소 교수(55)는 조선시대 최고의 명산으로 추앙받던 남산이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근현대사를 통과하며 어떻게 변했는지를 실감나게 설명했다. 무심코 지나쳤던 익숙한 공간들이 전 교수의 이야기 속에서 전혀 다른 맥락과 모습으로 떠올랐다. 안경이나 스크린, 어떤 도구도 없었지만 눈앞에 남산 일대의 시공간적 변화가 펼쳐지는 듯했다.

경향신문 창간 70주년 기획 ‘명사 70인과의 동행’ 69번째 목적지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남산 일대였다. 지난 2일 아침, 갑자기 찾아온 한파에도 불구하고 40여명의 참가자가 남산의 안중근의사기념관 동상 앞에 모였다. 답사 주제는 ‘서울 남산과 민족의 수난’이었다. 남산의 조선신궁터, 일제강점기 한양공원비, 남산에서 신기가 가장 세다는 범바위, 옛 중앙정보부장 관사, 통감관저터부터 명동예술극장까지 답사가 이어졌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전 교수는 애국가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애국가에 산이 두 개 나오죠. 모든 교가의 모델인데, 참석자분들 가운데 어느 산의 정기를 받지 않고 학교를 다닌 분은 없을 거예요. 저만 해도 무려 7개 산의 정기를 받고 자랐습니다.”

그러고보니 교가에서 우리는 항상 산의 정기를 받고 자랐다. 전 교수는 “강은 애국가에 등장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물에 사는 귀신은 물귀신이지만, 산에 살면 귀신도 등급이 높아져 산신령이 되죠. 한국에는 태곳적 단군시대부터 산을 숭상하는 문화가 있어요.” 조선시대 이후 산은 신령스럽고 비밀스러운 공간이었다. 산속에는 죽은 자들과 죽은 자들을 위로하는 사람들, 즉 종교인들이 있었다. 세속에 발붙일 수 없는 화적떼와 화전민도 산에 의지해 살았다.

남산은 조선시대 최고 산이었다. 경복궁에 사는 왕이 고개를 들면 마주 보이는 산이기에 왕과 마주 볼 만큼의 지위를 갖춰야 했다. 원래 이름이 목멱산인 남산은 조선시대 목멱대왕으로 불렸다. 신령스러운 산으로 여겨지던 남산에는 조선시대 무당들을 총괄하는 국사당이 지어졌다. 국사당에서는 일반 백성의 사사로운 치성은 할 수 없었다. 오로지 국가와 관련된 일로만 굿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백성들은 몰래몰래 치성을 했다. 근대화 이전만 해도 남산 일대에는 점집이 모여 있었다. ‘불도저’ 김현옥 서울시장이 1970년대 회현아파트를 지으면서 점집들은 미아리고개로 집단이주했다.

토요일 오전 남산은 고요했다. 추위로 더 쨍한 푸른빛의 하늘에 서울타워가 고고히 솟아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남산 일대는 근현대사에서 가장 격렬한 변화를 겪은 공간이었다. 한국인의 의식 속에 특별하게 자리 잡고 있는 상징성 때문이다.

일본은 1925년 국사당을 없애고 바로 그 자리에 조선신궁을 지었다. 조선시대 국사를 기원하던 자리에 일본 천황을 모시는 신사를 지은 것이다. 조선신궁은 조선에서 가장 등급이 높은 신사였다. 조선인은 의무적으로 일장기를 들고 조선신궁에 올라와 참배를 해야 했다. 수천명이 남산을 올라 참배했다. 일본 식민통치의 상징과도 같았던 신사는 해방 이후 가장 먼저 부서지기 시작했다. “사람이 살던 곳에 동물을 살게 하는 건 모욕을 주는 겁니다. 일제는 창경궁 자리에 연못을 파고 동물원을 만들었습니다. 해방 이후 조선신궁 자리에 연못을 파고 남산동물원을 만들었어요. 일제가 우리에게 한 짓을 똑같이 보복한 거죠.” 전 교수의 말이다.

남산 일대는 ‘공간 정치’가 치열하게 이뤄진 곳이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중국인에게 제한적으로 개방되던 서울은 1885년 모든 외국인에게 전역이 개방됐다. 중국인, 일본인은 집단거류지를 만들어 거주하기 시작했다. 중국인은 청계천 너머, 일본인은 충무로, 예자동, 필동 등 남산 일대에 거주했다. 해방 이후 지명을 바꿀 때 일본인 거류지는 일본인이 가장 두려워할 역사적 인물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이름을 따 충무로로 이름 지었고, 중국인 거류지는 을지문덕 장군의 이름을 따 을지로로 이름 지었다. 안중근 의사 동상이 남산에 세워진 것도 남산이 일제강점기 조선의 일본인 성지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지난 정권에서 국정교과서가 논란이 됐죠.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일상생활 속 역사입니다. 화폐 속에 등장하는 역사 인물, 지역의 이름, 누구의 동상이 어디에 세워졌는지…. 이런 게 일상과 의식 속에 영향을 끼칩니다.” 공간을 둘러싼 정치는 현대에도 계속됐다. 세종로의 상징인 이순신 장군 동상. 하지만 원래 그 자리에는 세종대왕 동상이 세워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 나라의 중심은 군인”이라며 이순신 장군 동상을 지을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 동상 옆에는 ‘민족정기(民族正氣)의 전당(殿堂)’이라고 쓰인 커다란 돌이 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남긴 마지막 휘호이자, 안중근 의사 의거 70주년 기념석이다. 기념석을 설치한 날짜는 1979년 9월2일, ‘10·26 사태’가 있기 한 달 조금 전이다. 공교롭게도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날짜도 10월26일. 70년을 사이에 두고 커다란 역사적 죽음이 있었다. 전 교수는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말했다.

안중근의사기념관을 둘러보고 서울시교육청 용산도서관 옆으로 난 가파른 계단을 내려갔다. TV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 나와 유명해진 계단이다. 높은 계단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전 교수는 “일제시대 조선신궁으로 참배를 가던 계단”이라며 “1920년대 고급 석재를 이용해 지어졌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일장기를 흔들며 조선신궁으로 참배를 가던 조선인들이 오르던 계단을 거슬러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가 조금 걷자 ‘한양공원(漢陽公園)’이라고 쓰인 커다란 비석이 보였다. 한양공원은 1905년 내선융화의 상징적 공간으로 조성됐다. 고종의 친필휘호로 쓰인 비석 뒤에는 공원 조성 내역을 담은 글귀가 새겨져 있었는데, 지금은 다 뭉개져 보이지 않았다. 전 교수는 “누군가 밤에 몰래 뭉개버렸다. 내선융화 같은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글자 옆으로 몇 개의 홈이 파여 있었다. “6·25 때 총알 자국이에요.” 전 교수가 말했다. 그냥 지나쳐 다니던 돌덩이였는데,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명사 70인과의 동행’ 참가자들이 남산에 있는 와룡묘를 답사한 뒤 내려오고 있다.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량의 사당인 와룡묘는 일제시대 신사인 경성 남산대신궁을 바로 내려다보는 장소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일본 신사의 기를 누르고 견제하기 위한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명사 70인과의 동행’ 참가자들이 남산에 있는 와룡묘를 답사한 뒤 내려오고 있다.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량의 사당인 와룡묘는 일제시대 신사인 경성 남산대신궁을 바로 내려다보는 장소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일본 신사의 기를 누르고 견제하기 위한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일행은 와룡묘로 발걸음을 옮겼다. 와룡묘는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량을 모시는 사당이다. 가파른 바위계단을 타고 올라가자 조그만 사당이 나왔다. 제갈량을 모신 사당 옆에는 단군묘, 도교의 삼성각이 함께 있었다. “복잡한 다문화 가구”라고 전 교수가 말했다.

그런데 왜 이곳에 제갈량 사당이 있는 것일까. 그것 또한 역사적 연유가 있다. 와룡묘 바로 아래에는 일반인들을 위한 신궁인 경성 남산대신궁이 있었다. ‘일본 귀신’을 모신 사당을 내리누르는 곳에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량의 사당을 지은 것이다. 일종의 ‘감성정치’다.

남산 자락을 거슬러 내려오는 길에 전 교수가 일행을 멈춰 세웠다. 울타리로 출입이 통제된 곳에 커다란 바위가 있었다. 울창한 수풀에 가려 모습을 한눈에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호랑이를 닮았다고 해서 범바위로 불리는 바위다. 범바위는 신령스러운 남산에서도 가장 신기가 센 바위로 여겨져 무속인들이 굿을 하고 치성을 하는 장소였다. 그런데 이명박 전 대통령이 시장일 때 이곳에 철조망을 치고 출입을 통제했다.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한다고 했던 이 전 시장이 무속인들의 출입을 막은 것”이라며 “서울시는 무속인들이 촛불을 켜 화재의 위험이 있다는 이유를 내세웠다”고 말했다. 한때 가장 신령스러웠던 공간 범바위는 이제는 알아보기도 힘든 공간이 되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자 철조망은 사라졌지만 출입은 여전히 통제돼 있다. 범바위에도 ‘공간 정치’가 이뤄진 셈이다.

긴 거리를 걸었더니 배가 출출했다. 남산 왕돈까스로 배를 채우고 몸에 훈기를 집어넣은 뒤 다시 답사에 나섰다. 노란색 건물의 리라초등학교 옆에 사회복지법인 남산원이 있었다. ‘미국의 원조’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전 교수는 바닥에 박혀 있는 육각형의 커다란 돌과 화분 받침으로 쓰이고 있는 마름모꼴 돌을 살펴보라고 했다. 6·25 전란 때 여성과 아이들을 수용하던 모자원이었던 남산원은 일제강점기엔 러일전쟁의 영웅 노기 마레스케를 모시던 신사였다. 해방 후 신사의 석등기초이던 육각형 돌을 거꾸로 박아 받침돌로 쓰고, 수로로 쓰이는 마름모꼴 돌을 화분 받침으로 쓰고 있었다.

‘전복’의 흔적은 통감관저터에서도 나타났다.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특별히 좋아했다는 400년 넘는 커다란 고목 그루가 겨울 추위에도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는 지난해 위안부 기억의 터가 세워졌다. 그 옆으로 거꾸로 세워진 커다란 돌이 보였다. 일본 공사였던 히야시 곤스케의 동상 잔해를 거꾸로 세워놓은 것이다. 통감관저터는 일제 침략의 역사를 되새기는 공간이 되어 있었다.

발걸음은 옛 중앙정보부장이 살았던 공관과 지금은 유스호스텔로 쓰이는 중앙정보부 건물로 이어졌다. 비밀스럽게 고문이 이뤄졌다는 지하 고문실로 이어지는 지하 통로는 공사 중이어서 막혀 있었다. 3·1운동이 이뤄진 삼일대로를 거쳐 서울 최초로 자동차가 다닌 길을 지났다. 넓게 뚫린 대로는 창경궁으로 간 순종이 조선총독에게 자동차를 타고 신년 인사를 다니던 길이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를 많이 잡아갔던 혼마치 경찰서(중부경찰서)를 지나 프랑스가 조선에 진출하며 경복궁이 내려다보이게 높게 지은 명동성당으로 발걸음이 이어졌다.

늘 지나다니던 남산, 명동 일대는 한국 근현대사의 부침이 고스란히 새겨진 곳이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엄혹했던 독재정권의 흔적, 6·25의 상흔도 볼 수 있었다. 현실을 새롭게 보기 위해서 꼭 증강현실이라는 첨단기술이 필요한 건 아니다. 역사적 지식이야말로 우리가 현재를 새롭게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안경이 아닐까.

[명사 70인과의 동행] (69) 일제가 할퀸 ‘조선시대 최고의 명산’…상흔 회복 노력은 진행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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