⑧멸종 직전 되살린 제주 흑우·흑돼지··· 천연기념물을 맛볼 수 있다고?

2019.08.29 07:49 입력 2019.08.30 19:03 수정
제주 | 글·사진 김형규 기자

2013년 천연기념물 546호로 지정된 제주 흑우. 제주축산진흥원은 관리하는 흑우가 번식으로 적정 사육두수 200마리를 초과하면 문화재 지정을 해제한 뒤 농가에 분양하고 있다. 현재 혈통관리기관에서 인증받은 제주 흑우는 1200마리가 넘는다.

2013년 천연기념물 546호로 지정된 제주 흑우. 제주축산진흥원은 관리하는 흑우가 번식으로 적정 사육두수 200마리를 초과하면 문화재 지정을 해제한 뒤 농가에 분양하고 있다. 현재 혈통관리기관에서 인증받은 제주 흑우는 1200마리가 넘는다.

제주 하면 떠오르는 색은? 에메랄드빛 바다에서 한라산의 신록, 샛노란 유채꽃밭과 감귤밭까지 총천연색 고민에 빠지게 만드는 질문이다. 만약 화산암이 수놓은 해안지형을 걷거나 컴컴한 용암동굴에 들어가봤다면 검은색도 빼놓을 수 없다.

제주는 현무암처럼 검은빛을 띠는 가축으로도 유명하다. 바로 흑돼지와 흑우다. 두 가축 모두 오랜 세월 제주에서 사육한 재래종인데 제주 흑우는 2013년 천연기념물 546호로, 제주 흑돼지는 2015년 천연기념물 550호로 각각 지정됐다. 문화재로 지정한 건 멸종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요즘 흑우·흑돼지는 희소가치를 톡톡히 누리는 ‘귀하신 몸’이 됐다. 고기맛 덕분이다.

종자 보존을 담당하는 제주축산진흥원은 적정 사육두수를 초과하는 흑우·흑돼지를 문화재 지정 해제한 뒤 농가에 분양하고 있기 때문에 발품을 팔면 시중에 유통되는 흑우·흑돼지 고기를 맛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전국의 천연기념물과 명승을 소개하는 ‘비경성시’ 시리즈 8번째 주인공으로 특별히 동물을 고른 이유다.

■ 멸종 직전 부활한 제주 흑돼지

제주 흑돼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먹어본 사람도 많다. 그러나 당신이 맛본 제주 흑돼지는 ‘가짜’일 가능성이 높다. 시중에 유통되는 제주 흑돼지는 재래종에 두록이나 버크셔 등 외래종을 교배한 잡종 흑돼지가 대부분이다.

2015년 천연기념물 550호로 지정된 제주 흑돼지

2015년 천연기념물 550호로 지정된 제주 흑돼지

재래 흑돼지 씨가 마르고 잡종이 시장을 장악한 건 경제성 때문이다. 재래 흑돼지는 보통 110㎏ 정도까지 키워 도축하려면 일반 개량돼지의 두세배 기간이 걸린다. 갓 태어난 새끼돼지의 마릿수와 몸무게 등 번식력도 눈에 띄게 처진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제주에선 집집마다 흑돼지를 많이 키웠다. ‘통시’라고 하는, 돌담을 둘러친 변소에 돼지를 길러 ‘똥돼지’라 불렸다. 통시와 돼지는 비위생적이라는 이유로 1980년대 초반 자취를 감췄다. 제주축산진흥원은 1986년 섬 전체를 뒤져 5마리의 재래 흑돼지를 찾아냈고, 번식을 거듭해 현재 350여마리까지 늘렸다. 제주축산진흥원은 종 보존을 위해 적정 사육두수 250마리를 유지하고 있고, 그 이상 태어나는 흑돼지는 일반 농가에 분양하고 있다.

쾌적한 환경의 제주축산진흥원 흑돼지 전용 돈사

쾌적한 환경의 제주축산진흥원 흑돼지 전용 돈사

제주축산진흥원 흑돼지 전용 돈사는 천장 높이가 20여m에 마리당 사육 면적도 3.3㎡ 수준으로 쾌적해보였다. 1m 넘게 깔아뒀다는 톱밥에 몸을 파묻고 쉬는 돼지들의 표정에선 여유가 느껴졌다. 미생물을 활용한 악취 제거 시스템 덕에 불쾌한 냄새는 전혀 없었다. 검은 털이 촘촘히 난 돼지들은 기다랗게 튀어나온 코와 배 부위의 주름 등 외모 특징이 분명했다.

성읍민속마을엔 아직도 옛 방식 그대로 집 뒤꼍에 돌담을 둘러쳐 돼지를 키우는 집이 남아 있다.

성읍민속마을엔 아직도 옛 방식 그대로 집 뒤꼍에 돌담을 둘러쳐 돼지를 키우는 집이 남아 있다.

서귀포시 표선면의 성읍민속마을에는 아직도 옛 방식으로 재래 흑돼지를 키우는 집이 3곳 남아있다. 태어나면서부터 사람과 부대끼며 자란 돼지는 가까이 다가가도 피하지 않고 오히려 먹이를 달라는 듯 얼굴을 들이민다. 성읍민속마을 보존회(064-787-1179)나 성읍민속마을 관리사무소(064-710-6791)에 문의하면 흑돼지 키우는 집을 알려준다.

■ ‘돼지고기 주스’는 어떤 맛?

재래 흑돼지의 가치는 크게 두 가지다. 신체구조가 인간과 유사해 의료용·실험용으로 부가가치를 낼 수 있고, 독특한 맛도 유명하다. 제주축산진흥원 김대철 축산진흥과장은 “스페인 이베리코, 헝가리 망갈리차, 일본 가고시마 흑돼지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다른 품종과 비교해도 유전적 고유성과 고기맛 등에서 제주 흑돼지의 상품가치가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6개월이면 다 길러서 잡아먹는 일반 개량종 돼지와 달리 제주 흑돼지는 도축하기까지 18개월은 키워야 한다.

6개월이면 다 길러서 잡아먹는 일반 개량종 돼지와 달리 제주 흑돼지는 도축하기까지 18개월은 키워야 한다.

국내에서 재래 흑돼지 고기를 맛볼 수 있는 식당은 단 한 곳뿐이다. 제주시 한경면의 늘푸른농원은 60여마리의 돼지를 직접 방목해 키우면서 일주일에 한 마리씩 도축해 농원에 딸린 식당 ‘연리지가든’에서 판매한다. 김응두 늘푸른농원 대표(67)는 40여년 전부터 재래 흑돼지만 키워온 고집 센 농사꾼이다. 돼지를 서둘러 도축하지 않고 최소 18개월 이상 길러야 일정한 맛이 나온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제주시 한경면 연리지가든은 흑돼지를 직접 길러 고기를 댄다. 흑돼지 고기는 지방층이 두껍고 육색이 짙은 게 특징이다.

제주시 한경면 연리지가든은 흑돼지를 직접 길러 고기를 댄다. 흑돼지 고기는 지방층이 두껍고 육색이 짙은 게 특징이다.

흑돼지 고기는 색부터 다르다. 진한 붉은색이 꼭 소고기 같다. 삼겹살은 살코기보다 지방이 압도적으로 많다. ‘비계를 구워 먹나’ 싶은데, 잘 익은 한 점을 입에 넣어보면 고소하고 깔끔한 기름맛에 놀라게 된다. 풍부한 육즙은 ‘돼지고기 주스’ 같은 낯선 단어를 떠올리게 만든다. 돼지 한 마리에서 150~200g 정도만 나온다는 ‘턱밑살’은 씹을수록 입안에서 감칠맛이 터졌다.

식당은 사전 예약제다. 1인분에 2만원으로 부위는 고를 수 없다. 유통량이 워낙 적다 보니 특정 부위만 따로 팔려면 단가가 턱없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보통 4인분 정도면 삼겹살, 목살, 등심, 안심 등 다양한 부위를 맛볼 수 있다. 테이블 6개에 점심·저녁 합쳐 하루 40~50명씩만 받는다.

■ 임금께 진상하던 검은소

한우 하면 이제 누구나 누렁소를 연상하지만 본래 우리나라엔 청우, 백우, 녹반우(얼룩소) 등 다양한 색의 소가 있었다. 흑우 역시 오래전부터 우리 땅에서 기르던 소다. 조선왕조실록, 일성록, 탐라지 등에 제주 흑우를 임금에게 진상하고 제향에 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임금의 생일과 정월 초하루, 동지 등 매년 ‘삼명일’ 때도 제주 흑우를 진상했다. 조선 정조 때는 진상한 흑우의 체구가 작다는 이유로 제주목사를 파직하는 일이 있을 정도였다.

흑우는 제주도의 중요한 진상품이었다. 일제시대엔 흑우를 포함해 조선 소 150만마리가 일본으로 실려갔다.

흑우는 제주도의 중요한 진상품이었다. 일제시대엔 흑우를 포함해 조선 소 150만마리가 일본으로 실려갔다.

흑우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빼앗긴 우리 자산으로 자주 꼽힌다. 일본은 수탈해간 흑우를 지속적으로 개량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와규’라는 품종을 만들어냈다. 반면 국내에서 흑우는 흑돼지와 마찬가지로 경제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농가의 외면을 받았다. 흑우의 도태를 일본의 약탈만으로 설명하기는 힘들다는 얘기다.

1963년 제주 한우 사육 실태조사 자료를 보면 도내 한우 5만여두 중 20%에 해당하는 1만여두가 흑우였지만, 1980년대 들어 흑우는 멸종위기까지 갔다. 1992~1993년 제주 전역에서 수집한 순종 흑우 10마리를 제주축산진흥원에서 사육하며 체계적인 관리가 시작됐고, 지금은 200여마리까지 늘었다.

제주축산진흥원 방목지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흑우 무리

제주축산진흥원 방목지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흑우 무리

제주도 41개 농가에서도 1000마리가 조금 넘는 흑우를 키운다. 그중 30% 정도는 순종이지만 나머지는 흑우 수컷과 한우(누렁소) 암컷을 교배한 잡종이다. 물론 잡종도 혈통관리기관인 한국종축개량협회에서 혈액 채취를 통한 유전자 검사 결과 흑우 판정을 받은 것들이다.

제주축산진흥원은 매년 봄부터 가을까지 부지 내의 너른 초지에 소들을 풀어 먹인다. 날씬한 암소들이 뛰는 모습은 멀리서 보면 말과 혼동될 정도다. 초록빛 대지 위에 어슬렁거리는 검은 소떼는 분명 제주만의 풍경이다.

■ 진한 치즈향 만든 숙성의 마법

흑우 고기는 불포화지방산 함량이 높고 씹는 맛이 좋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반면 한국 소비자들이 선호하는 ‘마블링’은 적은 편이다. 기존 소고기 평가 등급으로는 1등급 이상을 받기 힘들다. 그래서 숙성을 통해 풍미를 끌어올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서귀포축협 흑한우 명품관의 흑우 모듬구이 메뉴

서귀포축협 흑한우 명품관의 흑우 모듬구이 메뉴

제주 흑우를 맛볼 수 있는 식당이 제주에 세 곳 있다. 서귀포축협 흑한우 명품관은 2010년부터 흑우를 판매하고 있다. 제주시에도 ‘검은쇠몰고오는’과 ‘흑소랑’ 두 곳의 식당이 구이 위주로 흑우 고기를 낸다. 흑소랑의 김경수 대표(36)는 서울 삼성동에 제주 흑우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식당 ‘보름쇠’를 함께 운영한다. 보름쇠는 2017년 한국식 바비큐로는 처음으로 미쉐린 1스타 레스토랑에 뽑혀 화제가 된 곳이다.

보름쇠는 제주시 조천읍 신흥리 농장에서 200두가량의 흑우를 직접 사육한다. 소를 도축한 뒤 발골하지 않고 지육 상태로 건식 숙성(드라이에이징)하는데, 소 크기에 따라 숙성기간은 50~80일이 소요된다. 수분기를 빼며 오래 숙성한 고기는 보통의 고기보다 탄성이 좋고 먹었을 때 포만감도 뛰어나다.

서울 삼성동의 흑우 전문점 보름쇠에서 애피타이저로 내온 흑우 사시미와 육회

서울 삼성동의 흑우 전문점 보름쇠에서 애피타이저로 내온 흑우 사시미와 육회

보름쇠는 흑우 숙성육을 특수부위, 안심, 등심, 부채살, 새우살, 살치살 등으로 나눠 1인분 5만~8만원대 가격에 판다. 기름기가 많은 살치살은 살짝 깨무는 순간 이가 쑥 들어갈 정도로 연했다. 숙성 고기 특유의 치즈향과 깊은 풍미도 돋보였다. 특수부위에 포함된 갈비살·업진살은 야들야들한 식감에 구수한 육즙이 일품이었다. 흑우부추국밥, 흑우 보양탕 등 흑우를 쓴 식사 메뉴도 다양하다.

보름쇠 살치살

보름쇠 살치살

보름쇠 특수부위

보름쇠 특수부위


[비경성시]⑧멸종 직전 되살린 제주 흑우·흑돼지··· 천연기념물을 맛볼 수 있다고?


경향신문이 전국에 흩어져 있는 천연기념물과 명승지를 찾아갑니다. 국가 지정 문화재인 천연기념물은 동물·식물·지질·보호구역 등 459건에 이릅니다. 경관이 뛰어난 명승도 111곳이나 됩니다(2018년 9월 기준). 이 가운데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특별한 매력이 있는 곳을 골라 소개하려 합니다. 문화재청의 도움을 받아 해당 문화재에 담긴 역사와 문화 등 풍부한 이야깃거리도 전할 계획입니다. 우리 자연유산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체험과 교육 프로그램도 적극 소개하며 든든한 국내 여행 길잡이가 되겠습니다.

코너 제목인 비경성시는 경치가 빼어나게 아름다운 곳 혹은 남이 모르는 곳이란 뜻의 ‘비경(秘境)’과 사람이 붐빈다는 뜻의 ‘성시(成市)’를 합친 말입니다.


추천기사

기사 읽으면 전시회 초대권을 드려요!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