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의를 초기화하려는 사람들과의 싸움

2019.04.19 16:40 입력 2019.04.19 16:41 수정
위근우 칼럼니스트

PD수첩, ‘영화감독 김기덕, 거장의 민낯’ 이후 1년…무엇이 바뀌고 무엇을 바꿔야 할까

지난해 3월 MBC <PD수첩>은 ‘영화감독 김기덕, 거장의 민낯’ 편을 통해 영화감독 김기덕과 배우 조재현이 벌인 성범죄에 대한 여성 영화인들의 폭로를 공개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지난 4월2일 <PD수첩>은 ‘저는 성폭행범의 딸이었습니다’ 편(아래 사진)에서 미성년인 지적장애인 여성을 성폭행했다는 무고를 당한 아버지와 그의 누명을 벗겨낸 딸의 사연을 담아냈다.

지난해 3월 MBC <PD수첩>은 ‘영화감독 김기덕, 거장의 민낯’ 편을 통해 영화감독 김기덕과 배우 조재현이 벌인 성범죄에 대한 여성 영화인들의 폭로를 공개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지난 4월2일 <PD수첩>은 ‘저는 성폭행범의 딸이었습니다’ 편(아래 사진)에서 미성년인 지적장애인 여성을 성폭행했다는 무고를 당한 아버지와 그의 누명을 벗겨낸 딸의 사연을 담아냈다.

김기덕 감독은 최근 ‘PD수첩’ 등에 10억원의 배상을 청구했다.
미투운동에 저항하는 남성도 여전하다. 성인지 감수성 문제란다.
정준영과 음란물을 공유한 로이킴, 남자라면 다 그럴 것이란다.
반성적 성찰. 즉, 매끄러운 의사 소통 환경을 만들어보자.

1년이 지났다. 변하지만 변하지 않았다. 지난해 3월 방영된 MBC <PD수첩> ‘영화감독 김기덕, 거장의 민낯’ 편은 영화감독 김기덕과 그의 영화에 단골로 출연하는 배우 조재현이 벌인 성범죄에 대한 여성 영화인들의 폭로를 공개했다. 이후 김기덕은 해당 프로그램과 증언한 이를 무고 및 명예훼손으로 고소했지만 무혐의 판결이 났고, 같은 해 8월 <PD수첩>은 더 많은 증언을 입수해 ‘거장의 민낯, 그 후’를 방영했다. 그리고 딱 1년째 된 올해 3월, 김기덕은 다시 <PD수첩>과 증인들에게 10억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김기덕은 모스크바영화제 심사위원장으로 위촉되는 등 ‘거장’으로서의 지위를 잃지 않았으며 여전히 자신에 대한 모든 혐의를 부인하고 문제제기를 한 언론과 증인들을 소송으로 징벌하려는 중이다.

지난 4월18일 영화감독김기덕공동대책위원회와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 <PD수첩>이 개최한 ‘김기덕 감독 규탄 기자회견’엔 그래서 어떤 기시감이 있다. 돌고 돌아 다시 선 이 자리는 ‘미투’ 운동의 원점일까, 다음 단계의 싸움을 여는 새로운 출발점일까. 공간적 은유를 허용한다면, 이 지점의 실천적 의미란 결국 그 1년이라는 시간 동안 바뀌거나 바뀌지 않은 풍경의 맥락 위에서만 새롭게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한쪽에선 ‘미투’ 운동을 통해 연예계와 정치권 등 여러 분야 가해자들에게 사회적 비판과 사법적 조치가 취해졌지만, 고개를 조금만 돌리면 대법원에서 성추행 혐의 유죄 판결을 받은 배우 조덕제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피해자를 비난하는 남성들을 볼 수 있다.

지난 2월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에 대한 2심 판결과 성인지 감수성을 다룬 ‘시사IN’ 기사에 인용된 일례를 재인용하자면 “온라인 남초 커뮤니티에서는 ‘킹인지 갓수성’이라는 표현도 유행했다. 증거가 없는데도 성인지 감수성만 가져다 붙이면 무조건 유죄가 나온다는 조롱이다”. 이러한 정서는 좀 더 절박해진 역차별 담론처럼 보인다. 남성들이 소위 ‘가짜 미투’에 의한 무고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걱정이다. 여기엔 꽤 많은 오해가 있다. 단순히 성범죄에 있어 무고 비율이 다른 범죄와 대동소이한 수준이라는 통계적 진실을 이야기하려는 건 아니다.

많은 남성들이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여성의 인식과 판단, 주장에 특권적 지위가 주어진다고 믿는다. ‘미투’ 운동 초기에 종종 인용된 피해자 중심주의 개념 역시 그런 식으로 이해됐다. 다시 말하지만 오해다. 지난 1년의 흐름은 여성을 해석의 특권적인 주체로 격상했다기보다는, 기존 남성 중심적인 해석적 지평에 이제야 여성 주체들이 의사소통적인 대화 주체로 등장해 이의를 제기한다고 보는 게 적절하다.

가령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변호사 백성문은 단톡방 내 음란물 공유로 조사받은 로이킴에 대해 “통상적으로 일반인이라면 입건도 잘하지 않을 만한 것을 정준영 단톡방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처벌하는 거 충분히 억울하다고 느낄 만하다”고 변호했다. 그는 로이킴의 범죄가 정준영의 경우처럼 중범죄가 아니며 “아마 청취자분들도 가끔 있을” “남자들끼리 하는 단체대화방 같은 데 약간 야한 사진 올리는 경우”라는 것을 논거로 들고 온다. 로이킴 사건에 대해 ‘이런 식이면 안 잡혀 들어갈 남성들이 없다’는 남초 커뮤니티의 울부짖음과 거의 같은 입장을 공유한다. 이들은 ‘미투’ 운동 이후 여성 중심적인 정서법이 실정법을 압도한다고 믿는 듯하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들이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던 소위 정상 상태라는 것이 다분히 남성들끼리만 아무 문제 없던 상태이며, 여기에 여성들이 판단과 반박의 주체로 등장할 때 과거 통용되던 해석적 지평이 의문에 부쳐진 것에 가깝다. 여성들의 기분이 나쁘니 로이킴을 단죄하자는 것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불법촬영물이 공유되는 단톡방에서 사태를 방조하며 심지어 음란물까지 공유하는 그 기괴한 친목의 메커니즘에 대해 우리 사회는 새롭게 윤리적 문제의식을 가져야 하지 않는지, 남성 간 음란물 공유를 사소하게 본 기존의 판단이 혹 안일했던 건 아닌지 질문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분명 많은 것을 뒤흔들지만, 부당한 것은 아니다. 반성적 성찰이란 당연시되던 것을 의문시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것은 내적 독백이 아닌 치열한 의사소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세계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그대로 툭 드러내놓지 않는다. 단지 논의 참여자들의 타당성 주장과 반박의 과정을 통해 좀 더 선명하게 재구성될 수 있을 뿐이다. 사법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변종필 동국대학교 법학과 교수의 논문인 <형사소송에서 진실개념>은 형사소송에서의 진실을 하버마스적인 의미의 진리합의이론에서 도출해낸다. 움직이지 않는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진실 혹은 진리란 없으며, 단지 당사자들의 상황 서술과 논증 대화를 통한 상호 합의로 잠정 승인될 수 있을 뿐이다. 피해자 중심주의를 피해자의 말이 무조건 옳다는 뜻이 아니라, 적어도 피해자들이 이러한 논의를 위해 목소리를 내는 것에 부담을 느끼지 않을 좀 더 매끄러운 의사소통 환경을 마련하자는 것으로 이해하면 남성들의 오해와 위기감은 어느 정도 허구적인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남성들이 ‘미투’와 무고죄와 성인지 감수성에 대해 가진 오해를 강화하는 서사들이 등장한다. 그중 하나가 김기덕 소송 사태의 당사자이기도 한 <PD수첩> 최근 회차라는 것은 아이러니하고도 슬픈 일이다.

[위근우의 리플레이]논의를 초기화하려는 사람들과의 싸움

이달 초 PD수첩 ‘성폭행범의 딸’ 편의 말미 코멘트는 잘못됐다.
‘무고죄=성범죄 무고죄’라는 과거 통념을 재생산했기 때문이다.
미투운동을 통해 세상이 조금 빠뀌었지만, 갈길은 여전히 멀다.
소위 ‘이퀄리스트’들이 노력을 무력화시키려한다. 김기덕처럼.

지난 4월2일에 방영한 <PD수첩> ‘저는 성폭행범의 딸이었습니다’ 편은 미성년인 지적장애인 여성을 성폭행했다는 무고를 당한 아버지와 그의 누명을 벗겨낸 딸의 사연을 담아냈다. 해당 사건을 다룬 게 문제일 리 없다. 방송은 <PD수첩>답게 해당 사건에서 경찰과 검찰이 얼마나 부실한 수사를 했는지, 여기에 얼마나 많은 편견과 예단이 작용했는지 고발했다. 거기까지였다면 좋았겠지만, 방송 말미 인터뷰이인 강민구 변호사는 “피해 여성의 말을 배척하고 범인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억울한 사람을 국가가 유죄로 단정하면 안된다”고 코멘트한다.

본인 저서 <성범죄 성매매 성희롱>에서 한 챕터를 ‘꽃뱀에 대처하는 방법’으로 할애한 법조인의 코멘트에 권위를 부여해준 <PD수첩>의 선택도 아쉽지만, 무엇보다 해당 사건의 본질은 ‘무고’에 있지 ‘성범죄’ 무고에 있는 것이 아니다. 피해자의 억울함은 악의적인 누명과 부실한 수사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지, “피해 여성들의 말” 때문이 아니다. 또한 이것은 해당 수사에서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각 당사자 간 타당성 주장을 충분히 검토하고 진실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극복되어야지, 확실한 물적 증거가 없다면 피해자 증언을 “배척”해도 된다는 식으로 이해되어선 안된다.

하지만 이 짧은 코멘트를 통해 ‘무고죄=성범죄 무고죄’라는 오래된 통념과 ‘가짜 미투’라는 레토릭 역시 재생산된다.

그렇다면 다시, 앞서의 질문으로. 돌고 돌아 다시 선 이 자리는 ‘미투’ 운동의 원점일까, 다음 단계의 싸움을 여는 새로운 출발점일까. 당연히 후자다. 1년간 세상은 변했다. 단지 논의를 초기화하려는 이들이 있을 뿐이다. 당연히 무죄 추정의 원칙은 중요하며, 진리합의이론에 의한 진실 개념을 따를수록 더더욱 피고인의 반론권은 보장되어야 한다.

그것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동안 피해자의 목소리가 나올 수 없었던 물질적 관념적 제약이 있었고 그것이 ‘미투’ 운동을 통해 아주 조금 해소됐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것 정도는 인정하고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

[위근우의 리플레이]논의를 초기화하려는 사람들과의 싸움

국회의원 표창원이 주관한 젠더 갈등 토론회에 패널로 출연한 이선옥 작가는 “우리 사회가 순간의 실수나 별일이 아닌데도 대자보에 이름이 쓰이고 커리어가 끝장나는 곳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했지만, 서지현 검사가 증명한 것처럼 한국 사회에선 현직 검사조차 존재하는 제도만으로 충분히 피해 사실을 의제화하고 보호받기 어렵다. 논의를 위해선 공통의 경험세계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가 필요하다. 하지만 소위 이퀄리스트들은 지난 1년간 여성들의 목소리를 통해 조금씩 복원된 경험세계 자체를 부정하려 한다. 이것이 논의의 초기화다. 그리고 이처럼 논의를 초기화하는 이들을 굳이 초청해 토론회를 연 뒤, 본인 사회관계망서비스에 “서로를 존중하며 주장하고 토론한다면 우린 얼마든지 합의 협력해낼 수 있습니다”라고 자평하는 남자 정치인이 있다. 이 한가롭기 그지없는 풍경이, 거장의 민낯을 밝히면서 바랐던 싸움의 끝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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