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미술산책 : 북한군 장교와 남한의 재벌 딸이 사랑에 빠졌다...현실에선 언제쯤?

2020.01.14 16:41 입력 2020.01.14 16:42 수정
이무경

이미지는 텍스트보다 즉각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영향을 줍니다. 어릴 적 보았던 그림책이나 사진의 한 장면, 혹은 TV드라마나 영화 속의 이미지가 수십 년이 지나서도 또렷이 떠오르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평양에선> 드라마 스틸,

<지금 평양에선> 드라마 스틸,

한국전쟁 이후 북한의 이미지는 오랫동안 ‘적’이나 ‘원수’, 혹은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핵무기’를 개발하는데 혈안이 된 불량국가로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냉전이데올로기가 기승을 떨치던 70~80년대 TV나 반공영화들이 대표적이었습니다. 특히 생각나는 드라마는 1982년부터 약 2년 여간 KBS1TV를 통해 방영되었던 드라마 <지금 평야에선>입니다. 뽀글뽀글 곱슬머리의 김정일 위원장과 인민무력부장 오진우 등 북한의 지도층들이 벌이는 권력게임과 부패한 생활상들이 과장되게 그려졌었습니다. 이 드라마에서 김정일 위원장 역할을 맡았던 배우 김병기 씨는 실감나게 김정일 역할을 연기한 덕분에 아직도 ‘김정일’하면 생각나는 배우로 첫손에 꼽힙니다.

[올댓아트 별별예술] 북한미술산책 : 북한군 장교와 남한의 재벌 딸이 사랑에 빠졌다...현실에선 언제쯤?

최근 tvN에서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은 그동안의 북한이미지와는 결을 달리하는 로맨틱코미디입니다. 남한 재벌가의 딸이자 화장품회사 대표인 윤세리(손예진)는 패러글라이딩을 하다가 사고로 DMZ(비무장지대)에 불시착합니다. 이때 DMZ에서 정찰임무를 수행하던 북한의 최고위층자제인 인민군 장교 리정혁(현빈)대위가 그녀를 발견하죠. 우여곡절 끝에 그의 집에서 신분을 위장해 지내면서 남한으로 돌아올 방법을 모색하던 윤세리는 리정혁과 결국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남한의 상품들이 ‘아랫동네 물건’이라는 공공연한 명칭으로 불리며 몰래 판매되는 장마당의 풍경, 북한의 최고 인기간식인 설탕뿌린 누룽지, 자주 정전되는 북한 동네의 밤풍경 등 북한 주민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실감나게 묘사했더군요. 여기서 북한은 적대적 사회주의 국가라기보다는, 70년대 이전 과거 우리의 모습을 보는 듯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아울러 다이어트를 ‘몸까기’로, 괜찮다는 표현을 ‘일 없다’고 하는 등 북한 일상용어의 소개 또한 북한 문화를 이해하는데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 같습니다. 이 드라마는 그동안 북한을 적대적, 혹은 가난하고 비참한 곳으로 묘사했던 과거의 태도에서 벗어나, 북한과 북한주민을 친근하게 묘사한 첫 콘텐츠로 손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북한에서는 남한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을까 궁금합니다.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에서도 남한의 드라마들이 USB에 담겨 장마당 등에서 거래되고 있어 남한의 실정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공식적인 매체에서 남한에 대한 묘사는 크게 바뀌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미술작품에서도 1989년 세계청년학생축전 참석차 북한에 갔던 임수경, 운동권 학생들이 투쟁하는 모습, 북한의 사회주의 노선을 따르는 비밀조직의 모습을 묘사하거나, 생활고로 비참한 생활을 하는 빈민의 모습 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내 눈을 사주세요>

<내 눈을 사주세요>

2002년 김일성탄생90주년을 기념해 베이징에서 열린 조선화전시회에 출품된 작품들을 모은 도록에는 헐벗은 어린 소녀가 <내 눈을 사 주세요>라는 팻말을 들고 서있습니다. 소녀의 바로 뒤에 부유한 귀부인이 강아지를 안고 걸어가고 있네요.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는 그림 속 배경이 소녀의 모습을 더욱 비참하게 느끼게 합니다. 이처럼 빈부의 격차가 심한 곳이 남한이라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기어이 만나리>

<기어이 만나리>

1997년 발행된 평양미술대학창립 50돌 기념화첩에서는 남한에서 통일운동, 혹은 사회주의 이념을 따르다가 탄압받는 교수, 대학생들의 모습을 담은 작품들이 눈에 띕니다. <기어이 만나리>는 삼팔선 부근에서 북한으로 가려다가 경찰과 군인에 의해 막혀버린 남한의 통일운동 단체의 모습을 담았습니다. ‘통일선봉대’라고 쓰인 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경찰에 의해 닭장차로 연행되는 장면입니다. <전대협은 싸운다>(1990)라는 작품 역시 독재정권 타도 운동을 벌이는 80년대 운동권 학생들의 데모하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체의 밝은 래일에 산다>(1989)는 운동권 학생들이 구속되어 재판을 받으면서도 밝게 웃는 모습을 그리고 있네요. <우리의 소원은 통일>(1989)에서는 남한의 대학생들이 ‘가자! 한라에서 오라! 백두에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구호를 들고 농성하는 모습입니다. 당시 실제로 TV뉴스나 신문 등에서 보도된 장면을 그대로 그린 듯합니다. <구국선동>(1966)은 60년대 4.19, 5.16 등으로 혼란스러웠던 남한거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수가 찾은 길>(1988)이라는 작품은 사회주의 이념에 동조하던 교수의 연구실에 기관원들이 들이닥쳐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모습입니다. 불시에 기습을 당한 교수와 조교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서있고, 책임자로 보이는 기관의 담당자가 책상에 앉아 이들을 가소롭다는 듯 쳐다봅니다.

전대협은 싸운다 1

전대협은 싸운다 1

1989년 방북한 ‘통일의 꽃’ 임수경은 아직도 북한주민들 사이에서는 가장 유명하고 인기 있는 남한사람이라고 합니다. 당시 남한의 방북금지조치에도 불구하고 용기 있게 방북한 임수경은 청바지를 입은 발랄하고 예쁜 ‘통일의 꽃’인 남한 여대생으로 각인되었던 것 같습니다. 조선화 <통일의 꽃>(1990), 목판화 <임수경의 마음은 우리의 마음>(1990), 그리고 구속된 임수경의 모습을 담은 조선화 <분단의 장벽을 넘은 첫 사절>(1990) 등은 임수경이 당시 북한 미술을 비롯해 북한 사회와 문화 전반에 하나의 중요한 테마로 자리 잡았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구국선동>(1966)

<구국선동>(1966)

<교수가 찾은 길>(1988)

<교수가 찾은 길>(1988)

<통일의 꽃>(1990),

<통일의 꽃>(1990),

최근 들어 탈분단시대로 진입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남한에서는 북한장교와 남한의 재벌 딸이 사랑에 빠지는 로맨틱코미디까지 제작되고 있습니다만, 북한에서 남한에 대한 묘사가 단시일 내에 변화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북한이미지를 묘사하는 남한 대중매체의 변화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북한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남한에서 북한을 긍정적이고 친근하게 바라보는 것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지만, 상대방에 대한 친근한 이미지는 공식적인 제도나 규율을 넘어서는 포용력의 공간을 만들어 냅니다. 남한 뿐 아니라 북한쪽으로도 문화의 DMZ가 더욱더 커져나가길 바랍니다.

<임수경의 마음은 우리의 마음>(1990)

<임수경의 마음은 우리의 마음>(1990)

<분단의 장벽을 넘은 첫 사절>(1990)

<분단의 장벽을 넘은 첫 사절>(1990)

글 | 이무경
경향신문에서 오랫동안 미술담당 기자를 지낸 필자는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석사를 마치고 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에서 강의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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