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남기, 폭풍우 돌파하는데 기름 아낄 텐가

2020.04.13 20:49 입력 2020.04.13 21:06 수정

ㄱ씨는 24년째 서울 강북의 한 아파트단지에서 남편과 함께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다. 세탁소를 연 지 몇 달 만에 외환위기(IMF 위기)를 만났다. 10년쯤 지나 글로벌 금융위기도 겪었다. 견뎌냈다. 다시 10여년 만에 찾아든 ‘코로나19 위기’는 차원이 다르다. 주 5일 문을 여는데, 이틀 정도는 공친다. 드라이클리닝 요청이 한 건도 없어서다. “몇 달만 이렇게 가면 장사를 접어야 할 것 같아요.”

[김민아 칼럼]홍남기, 폭풍우 돌파하는데 기름 아낄 텐가

장애아동 수업을 돕는 특수실무사(학교비정규직) ㄴ씨는 지난해 12월 155만원을 벌었다. 개학이 연기되며 3월 소득은 5만7000원에 그쳤다. 근무일이 없을 때 들어오는 최소액이다. 남편이 다니는 중소기업도 상황이 어렵다. 월급이 제대로 안 나온 지 두어 달 됐다. 자녀 앞으로 든 보험을 해지했다. 신용카드 현금서비스도 받았다. “파산해야 하나 싶어요. 하긴 파산할 재산도 없지만….”

프리랜서 작가 ㄷ씨는 3~4월 중 잡혀 있던 강연 8건이 모두 취소됐다. 허공으로 날아간 수입이 600만원을 넘는다. 3월 수입은 잡지 연재료 30만원, 한 출판사에서 미리 당겨서 준 인세 52만원 등 82만원이 전부다. 더 큰 문제는 5월 강연 3건도 취소되고, 6월 이후 강연 요청은 아예 들어오지 않는다는 거다. 펑크 난 부분은 일단 인터넷은행 저금리 대출로 메울 생각이다. “그나마 한도가 300만원이라 얼마 못 버티겠지만요….”

전화 통화로 사연을 들으며 놀랐다. 위기의 그늘은 예상보다 넓고 깊었다. 자영업자·비정규직의 피해는 짐작했던 바다. 그러나 ㄷ씨처럼 유명한 프리랜서도 ‘수입 제로’를 호소할 줄은 몰랐다. 공무원이나 공기업 정규직이 아닌 한 위기에 예외는 없었다.

한국의 코로나19 방역 작업은 신속하고 대담하고 치밀했다. ‘K방역’은 BTS와 <기생충> 못지않은 글로벌 브랜드로 부상하고 있다. 질병관리본부와 의사·간호사·약사, 경찰관·소방관, 일선 공무원들의 헌신이 바탕에 깔려 있음은 물론이다.

경제대책은 K방역과 다르다. 더디고 소극적이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8일 긴급재난지원금 지급 기준을 두고 “긴급성, 지원의 형평성, 재정여력 등을 종합 감안해서 이미 발표한 바 있다”고 말했다. ‘소득 하위 70%’ 기준을 고수하겠다는 의미다. 앞서 제1야당과 집권여당 대표에 이어 국무총리까지 ‘지급 대상 전 국민 확대’에 공감한 터다. 나라살림연구소·내가만드는복지국가 등 시민단체, 유종일 KDI국제정책대학원장·최현수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 등 전문가들은 ‘보편지급·선별환수’라는 구체적 대안을 내놓기도 했다.

홍 부총리의 완강한 태도에 의문이 들었다. 기재부 고위관료들은 ㄱ·ㄴ·ㄷ씨의 삶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혹시 대한민국 전역을 ‘세종시’로 여기는 건 아닐까. 가난의 냄새를 맡기 어려운, 안온한 공무원의 도시.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건 인적 네트워크일 터다. 그들의 가족이나 지인 가운데 세탁소 주인이나 학교비정규직 노동자가 있을까.

곳간지기의 책임감은 존중한다. 그러나 주인의 대표(국회)가 곳간을 활짝 열라고 한다. 내각을 통할하는 총리도 공감한다. 곳간지기가 앞세우는 재정건전성은 중요한 원칙이나, 시민의 삶에 앞서는 가치일 순 없다. 지난 2월 국제통화기금(IMF)은 한국을 ‘재정여력’이 있는 국가로 지목하고 확장적 재정정책을 펼 것을 권고했다. ㄱ·ㄴ·ㄷ씨가 ‘소득 하위 70%’에 포함된다 해도 지급이 늦어지면 소용없다. ㄷ씨는 13일 ‘서울시 재난 긴급생활비’ 30만원을 받았다. “액수는 작아도 빨리 나와서 좋다”고 했다.

코로나19 확진자가 폭증하기 시작한 2월20일 이후 4월3일까지 6개 은행(신한·KB국민·하나·우리·NH농협·IBK기업)에서 예·적금을 중도 해지한 총액이 13조원에 육박한다. 위기가 모든 시민의 발치에 와 있다는 증거다. 긴급재난지원금을 온 국민에게 지급하는 것은 사회적 연대와 신뢰를 강화하는 효과도 낳을 것이다.

영국 뮤지컬스타 70인이 코로나19로 힘든 시민들을 위해 <레미제라블>의 삽입곡 ‘Do you hear the people sing(민중의 노래가 들리는가)’을 불렀다. 유튜브에서 들으며 뭉클했다. 지금 민중의 노래는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 공복(公僕)이라면 ‘들리지 않는’ 노래까지 찾아내 응답해야 한다. 이상헌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의 말을 빌리자. “(배가) 폭풍우를 돌파하는데 기름을 아낄 것인가? 파도에 부딪혀 부서질 갑판을 걱정할 것인가?”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