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진실

2020.07.14 03:00 입력 2020.07.14 03:04 수정

어떤 죽음은 진실을 드러내지만 어떤 죽음은 진실을 은폐한다. 한 사회가 죽음을 평가하고 해석하는 과정은 곧 사회의 윤리를 재생산하는 담론투쟁과 사회적 교육의 장이 된다. 장례의식은 죽음에 대한 공론장을 만들고, 공공의례는 그 죽음이 사회적 의미를 가지며 헛되지 않았음을 함께 기억하기 위한 사회적 장치다. 지금 우리가 함께 목도하고 있는 한 죽음과 논란 역시 그런 성격을 갖는다.

채효정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저자

채효정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저자

그런데 언젠가부터 공적 대의를 위한 죽음은 어리석고 무모한 것으로 해석되기 시작했고, 반면 특권층의 죽음은 오직 사적인 것이라도 권력의 과시와 자본의 사회적 분배 과정으로 동원되어 과잉 해석되고 있다. 누군가가 죽음에 이른 자리에서 우리들의 더 큰 삶이 열린다는 공동의 의미는 사라지고, 죽음을 점점 개인적 차원의 소멸, 종결, 그리고 절대적인 무(無)로만 인식하게 된 것은 ‘개인의 생명과 안전’이 최우선이 되는 각자도생의 시대가 도래한 이후의 일이다. ‘죽음을 넘어서’를 생각할 수 없다면, 내가 죽은 다음에 올 다른 세계를 꿈꿀 힘도 사라진다. 죽음이 끝이라는 교훈을 남기는 사회는 위험하고 불행하다.

‘죽으면 끝’이라는 사유는 죽음이 모든 것을 덮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도 쉽게 귀결된다. 죽음과 죽임에서 은폐의 논리는 동일하다. 죽음을 종결의 암막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피억압자들은 늘 이 암막에 맞서 죽음을 끝이 아니라 시작으로 만들기 위한 싸움을 잉태해왔다. 광주의 죽음은 해방의 꿈을 낳았고, 전태일의 죽음에서 수많은 전태일이, 김용균의 죽음에서 수많은 김용균들이 태어났다. 지금 성폭력 사건에서 진실을 ‘말하는 여자들’은 말할 수 없었던 수많은 여자들의 죽음으로부터 태어난 존재들이다.

‘사람이 죽었다’는 외침은 늘 죽임당하는 이들의 말이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외쳤다. 사람이 죽었다고. 여기 사람이 있다고. 그때 그들이 말하는 ‘사람이 죽었다’와, 지금 ‘여기 또 한 사람이 있다’고 말하는 이들을 향한 ‘사람이 죽었다, 예의를 갖춰라’가 똑같은 말일 수 없다. 스스로 사회의 어른을 자처하는 이들이 ‘어린 것들’에게 가르치는 ‘사람이 죽었다’는 준엄한 호통과, 질문하는 이들에게 ‘침묵하고 애도하라’ 가르치는 사람됨의 윤리는 어디에 속하는가. 그 예의와 도리는 억압의 힘으로 작용하고 있지 않은가.

남성 엘리트 집단에서 장례의식은 형제적 결속감을 확인하고 유사 가족적 친분관계를 사회적으로 재생산하며 특권적 카르텔을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그것은 슬픔과 고통을 나누는 가난한 사람들의 상부상조와는 다르고, 모든 살았던 존재의 죽음 앞에서 숙연한 마음을 갖는 생명에 대한 예의와도 다른 것이다. 애도의 공표는 고인이 가졌던 권력과 상징과 관계에 대한 자기 지분을 표명하는 공공연한 수단이고, 사적 회고는 그런 사람과 친밀한 관계에 있던 자기 자신의 위치를 확인해준다. 시민사회 카르텔도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다.

지금의 애도는 어떠한가. 자신이 당한 폭력과 진실을 드러내어 말하고자 했던 당사자가 여전히 고통과 두려움 속에 남아 있다. 공적을 칭송하는 소리가 높고 추모 의례가 과시될수록, 그의 고통과 두려움도 더 커질 것이다. 아무리 큰 슬픔이라도 크게 울어선 안 될 때가 있다고 배웠다. 피해생존자 앞에서 삼가야 할 언행은 지금은 예외일까.

과오는 떠난 이에게 모두 넘기고, 공적만 남은 이의 유산으로 가질 수는 없다. 지적 유산이든, 명예의 유산이든, 관계의 유산이든, 모든 유산에는 빚도 포함된다. 정말로 존경하고 좋아했다 말한다면, 그의 빚을 대신 갚고 다하지 못한 책임을 대신 떠맡는 것이 우정의 이름으로 해야 할 도리다. 죽음이 진실을 덮지 않도록 하는 것도 그 도리에 포함된다. 그것이 남은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그게 인간에 대한 예의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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