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의료 정상화, 싼값에 얻을 수 없다

2020.09.14 03:00 입력 2020.09.14 03:03 수정

21세기가 도래했다며 떠들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할머니께서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전북의 작은 소도시에선 적절한 치료를 받을 곳이 없었다. 응급처치는 어떻게든 했으나 상태는 갈수록 악화됐다. 전주에 있는 전북대병원으로 겨우 이송했을 땐 이미 상태가 몹시 나빠져 수술 후에도 좋은 예후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박진웅 편의점 및 IT 노동자

박진웅 편의점 및 IT 노동자

그리고 20년이 지난 최근, 의대 정원과 관련된 의료법 개정에 대한 반발로 의료파업이 진행되는 사이에 큰아버지께서 쓰러지셨다. 하필 이른 아침이었고, 앰뷸런스는 그 지역의 병원마다 ‘전공의가 없다’는 핑계를 들으며 길 위에서 빙빙 돌았다. 결국 전주의 한 준종합병원에 겨우 옮겼을 때는 상태가 악화돼 당장 손을 쓰기가 어려웠다. 속상한 것은, 전공의가 있었어도 상황은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것이란 점이다. 애초에 지방에는 뇌혈관에 일어난 응급상황을 제대로 처치할 수 있는 곳이 지극히 적기 때문이다.

20년 동안 세상의 모든 것이 바뀌었지만, 지방민들에 대한 중증의료 현실은 여전히 척박하다. 심뇌혈관 질환들은 고령일수록, 생활환경이 안 좋을수록 더 흔히 나타나기 쉽다. 이런 질환들은 생명과 직결돼 있으며 대부분 골든타임이 존재한다. 짧은 시간 내 병원에 도착해 적절한 응급처치를 받느냐 못 받느냐에 따라 이후의 치료와 삶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의료파업 문제의 핵심은 지방의료의 정상화였다. 그러나 지방에 의대생을 늘린다고 해서 지방의료가 개선될 리 없다. 지방에 진짜 필요한 것은 생명과 직결된 중증질환을 치료할 의사와 스태프이기 때문이다. 내과·외과·응급의학과·흉부외과·신경외과 등 ‘바이털과’ 전문의들은 의대생이 늘어난다고 해서 늘지 않는다. 왜 이런 과들이 기피 대상일까. 낮밤 없는 노동, 환자의 죽음과 밀접한 스트레스 앞에서도 보상은 적고 일은 척박하기 때문이다.

지방에 ‘바이털과’ 의사가 부족한 근본적인 이유는 돈을 투자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시의 민간병원에서조차 해당 과들은 운영할수록 손해가 큰데, 지방의 어떤 병원이 적극적으로 중증질환을 위해 나설 수 있을까? 직원이 적으니 24시간 운영에 한계가 있고, 담당 의사들을 여유 있게 뽑지 않으니 치료의 퀄리티도 유지하기 어렵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에서는 권역심뇌혈관지원센터 같은 사업을 하고 있으나 해당 센터에 교부되는 9억원의 지원금은 의사를 제외한 인건비 보전에도 턱없이 모자란 형편이다.

오늘 전 국민에게 2만원씩 통신비 지원을 하겠다는 기사를 보았다. 수천억원의 재원이 드는 일이다. 지방의 값싼 부지라면 상급종합병원을 2~3개는 새로 지을 수 있는 돈이다. 공공의료원? 좋다. 그러나 싼값에 만들어봐야 진주의료원과 서남의대의 전철을 따를 뿐이다. 20년간 수포로 돌아간 지방의료 정상화의 실패는 결국 돈을 쓰지 않아 일어난 일들이다. 의료는 비싼 것이다. 값싸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의대생을 늘리는 일이 지방의료에 도움이 되려면 그들이 배우고 수련할 규모의 병원이 필요하다. 약사·간호사·영상기사 등 다른 분야의 전문 인력과 원무과·편의시설 등을 운용할 사람들도 있어야 한다. 이들이 지방에 안착하기 위한 국가의 재정지원이 장기간 필요하다. 10년, 20년 이상의 적자를 각오해야 한다.

20년이 지나는 동안 바뀐 게 없는 현실 속에서 나는 파업을 감행한 의료계와 그들을 비판한 시민들 모두에게 묻고 싶다. 의료인들은 적절한 보상과 제도가 있다면 지방에서의 삶을 감수하고서라도 지방의료에 헌신할 것인가? 시민들은 이를 위해 늘어나는 건강보험료와 세금을 부담할 수 있는가? 두 집단 모두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지방의료는 앞으로도 절망적일 것이다. 부디 20년 뒤에는 같은 질문을 하는 사람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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