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메데인을 바꾼 케이블카

2016.05.02 10:00 입력 2016.05.03 00:13 수정
메데인·리우데자네이루|정희완 기자

세계적인 화가 페르난도 보테로가 그린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죽음(2006)’. 메데인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세계적인 화가 페르난도 보테로가 그린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죽음(2006)’. 메데인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콜롬비아의 메데인이라는 도시를 인터넷 검색창에 입력하면 ‘메데인 카르텔’이 자동으로 따라 나온다. 1970~80년대 중남미를 떨게 한 악명 높은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범죄 조직 이름이다. 메데인에서 태어난 세계적인 화가 페르난도 보테로도 있다. 메데인에 있는 안티오키아주립 박물관에는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죽음(2006)’이라는 보테로의 그림이 걸려 있다. 머리와 배 등에 총을 맞은 에스코바르가 지붕 위에 쓰러진 모습이다. 메데인에는 늘 그렇게 폭력과 죽음의 이미지가 따라다녔다.

메데인의 산비탈에는 파벨라(빈민가)가 있다. 지대가 높은 탓에 파벨라 사람들은 도심에 나가기도 쉽지 않다. 빈민가에서 총성은 ‘일상’이었다. 메데인 북동쪽 산토도밍고(Santo Domingo)도 이런 슬럼 중 한 곳으로, 에스코바르의 무장조직원들이 주둔했던 곳이다. 그러나 이제 메데인에 ‘죽음의 파벨라’는 없다. 그런 변화를 이끌어낸 것은 케이블카였다.

[행복기행](9) 메데인을 바꾼 케이블카

■케이블카가 만든 ‘평화’

메데인 시는 높은 산언덕에 있는 빈민가에 케이블카를 설치했다. 단순 관광용이 아니다. 시내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케이블카와 지상철을 연계한 시스템도 만들었다. 지상철과 연결된 아세베도(Acevedo)역을 포함해 4개의 정거장이 산비탈에 설치됐다. 케이블카를 타고 2.07㎞를 오르면 1.47㎞ 높이에 있는 종점, 산토도밍고가 나온다.

아세베도역에서 케이블카를 탔다. 8명이 앉을 수 있는 좌석이 있었다. 산비탈을 오르자 다닥다닥 붙은 갈색과 회색의 집들이 내려다보였다. 어떤 집은 슬레이트 지붕 위에 벽돌을 올려 무게를 뒀다. 케이블카 안까지 흥겨운 노랫소리가 들렸지만, 메데인의 악명을 알았던 까닭에 긴장감을 떨칠 수 없었다.

콜롬비아 메데인의 아세베도역은 전철과 케이블카를 환승할 수 있는 역이다. 이 역을 비롯해 4개의 케이블카 정거장이 산비탈에 설치돼 있다. 케이블카를 타고 2.07km를 오르면 1.47km 높이에 있는 종점, 산토 도밍고가 나온다. 메데인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콜롬비아 메데인의 아세베도역은 전철과 케이블카를 환승할 수 있는 역이다. 이 역을 비롯해 4개의 케이블카 정거장이 산비탈에 설치돼 있다. 케이블카를 타고 2.07km를 오르면 1.47km 높이에 있는 종점, 산토 도밍고가 나온다. 메데인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아세베도역에 지난 1월 시민들이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줄을 서 있다. 메데인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아세베도역에 지난 1월 시민들이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줄을 서 있다. 메데인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아세베도역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2.07km를 오르면 1.47km 높이에 있는 종점, 산토도밍고가 나온다. 메데인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아세베도역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2.07km를 오르면 1.47km 높이에 있는 종점, 산토도밍고가 나온다. 메데인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산토도밍고역에 내리면 산비탈의 주택가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메데인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산토도밍고역에 내리면 산비탈의 주택가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메데인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20분 정도 지나 산토도밍고역에 도착했다. 역사 주변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음식점, 슈퍼마켓, 노점 등이 거리에 즐비했다. 왁자지껄한 소음으로 옆 사람에게 말을 건네기가 힘들 정도였다. 총소리가 아닌 ‘사람 소리’에 잠시 얼이 빠졌다. 역사 옆 조그마한 광장에서 도라(57)와 손녀 카타리(18)를 만났다. 도라는 케이블카가 생겨 돈과 시간이 절약됐다고 했다. 지상철과 연계돼 먼 지역에 가기도 수월해졌다. 과거엔 버스가 시내로 연결되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지역에 따라 2번 갈아타기도 했다. 왕복으로 치면 요금을 4번이나 내는 것이다. 그러나 2150페소(약 780원)면 케이블카와 전철을 타고 시내 어디든 갈 수 있다. 카타리도 치아 교정을 받으러 병원에 갈 때 케이블카를 탄다고 했다.

케이블카 산토도밍고역 앞에 있는 광장에서 만난 도라(57)와 손녀 카타리(18). 이들은 케이블카가 생겨 시내로 나가기 수월해졌다고 했다. 메데인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케이블카 산토도밍고역 앞에 있는 광장에서 만난 도라(57)와 손녀 카타리(18). 이들은 케이블카가 생겨 시내로 나가기 수월해졌다고 했다. 메데인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예전에 산토도밍고는 무법천지의 ‘섬’이었다. 시내와의 교통은 거의 두절됐고 이 때문에 마약 등 범죄조직이 ‘소굴’로 삼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주민들은 범죄조직의 폭력으로 불안에 시달리며 시내에 나가기는커녕 바깥출입 자체가 자유롭지 못했다. 자연히 일자리를 얻기 힘들었고 빈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경찰마저도 이곳은 거의 포기했다. 높은 곳에 있지만 낮고 어두운 곳에 사는 이들이었다.

평화를 불러온 것은 케이블카였다. 2000년 초반 메데인 시는 케이블카를 설치한다고 발표했다. 당시 시민들은 헛된 꿈 정도로 여겼다고 한다. 이전에도 비슷한 얘기가 나왔지만 이뤄지지 않았다. 그저 선거에서 표를 얻기 위한 정치인들의 허언으로 봤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빈민가 주민들도 같은 시민이란 인식 아래 도시를 한데 묶으려 했다. 우선 필요한 것은 빈민가 주민들의 도심 접근성을 높이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거리낌 없이 왕래할 수 있어야 활기찬 동네를 만들 수 있고, 범죄를 줄일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들 역시 메데인의 시민이라는 인식을 갖게 하는 것도 중요했다. 그렇게 2004년 첫번째 케이블카 노선이 완성됐다. 경찰도 들어왔다. 도심 사람들, 심지어 외국인 관광객들이 점차 발을 들이기 시작했다.

케이블카 산토도밍고역에서 바라 본 시 전경. 메데인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케이블카 산토도밍고역에서 바라 본 시 전경. 메데인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케이블카 산토도밍고역에서 바라 본 시 전경. 메데인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케이블카 산토도밍고역에서 바라 본 시 전경. 메데인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오후 1시가 되자 광장에 주민들이 모여들었다. 한쪽에선 엄마와 아들이 도시락을 먹었고, 사내 아이 둘이 축구공을 차며 놀았다. ‘텔레커뮤니케이션’이라고 적힌 유니폼을 입은 직원 4명이 계단에 누워 잠시 눈을 붙였다. 비가 오다 개다를 반복했다. 한 꼬마가 우산을 들고 가다 신기한 듯 이방인에게 관심을 보였다. 한국말을 알려달라고 했다. “안녕하세요”라고 하자 꼬마는 그저 웃기만 하더니 “차우!(안녕·Bye)”라고 말하고 갈 길을 갔다. 골목마다 상점이나 주택 앞에서 얘기를 나누는 주민들이 눈에 들어왔다. 광장에서 조금 떨어진 놀이터에는 아이들과 청소년들이 삼삼오오 모였다.

■총소리가 사라지다

이런 모습은 10년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산토도밍고가 얼마나 위험했는지 물으면, 주민들 대부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큰길 한쪽에선 집 짓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트럭으로 건설자재를 나르던 호세넬손(54)은 이곳에서 45년을 살았다. “1990년대에는 아주 힘들었어요. 총소리 때문에 딸과 함께 침대 밑에 숨곤 했지요.” 18년 전 그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자신의 트럭 안에서 다른 사람을 때리는 모습을 봤다. 폭행을 당한 사람은 머리에 총을 맞았고, 호세넬손도 오른쪽 팔뚝에 총알이 박혔다. 소매를 걷어 상처 자국을 보여줬다.

“총소리는 갑자기 사라진 게 아니에요.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경찰과 함께 케이블카가 들어서면서 사람들이 집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케이블카 덕분에 독일, 터키, 영국, 미국에서도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지역이 됐지요”라고 했다.

케이블카 산토도밍고역 주변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음식점, 슈퍼마켓, 노점 등이 거리에 즐비했다. 폭력이 난무하던 과거와는 다른 모습이다. 메데인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케이블카 산토도밍고역 주변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음식점, 슈퍼마켓, 노점 등이 거리에 즐비했다. 폭력이 난무하던 과거와는 다른 모습이다. 메데인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작은 골목마다 집과 상점들이 들어섰다. 2층 집 현관 앞에 앉아 있던 이사이아스(74)는 “시체를 매일 봤어요”라고 말했다. 이곳에서 35년을 지낸 그의 얼굴에는 주름마다 과거의 아픔이 깊게 배인 듯했다. “12년 전, 17살 아들이 총에 맞아 죽었어요.” 그렇다 해서 삶의 터전을 떠나기는 쉽지 않았다. 가족과 집 등 그의 모든 것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2층 집의 지하는 임대를 주고 하나 남은 아들이 1층에 산다. 딸도 근처에 살면서 상점을 운영한다. “지금은 아주 안전해졌어요. 다들 좋은 이웃들이지요.” 콜롬비아 월 최저임금 68만9455페소에 못 미치는 28만페소의 임대수입이 그가 버는 돈의 전부다. 그래도 이제는 달라진 마을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은 큰 듯했다.

케이블카로 갈 수 없는 지역이나, 역에서 더 높은 곳에 사는 주민들은 여전히 버스나 소형택시 또는 오토바이를 타야 한다. 교복을 입은 주아나(17)와 사라(14)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버스를 타러 큰길을 내려갔다. 에일리아(44)는 시내에서 가사 도우미로 일한다. 일을 나가거나 시내에 장보러 갈 때 케이블카를 이용한다.

비 내리는 1월의 일요일 아침, 작은 카페테리아에서 노인 2명이 커피를 마셨다. 할머니, 엄마, 아이는 오붓하게 빵을 나눠먹었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내다본 거리는 우산을 쓴 사람들로 가득했다. 동네 한쪽 작은 가게 앞에 여자 넷이 모이자 웃음소리가 가랑비를 뚫고 동네에 퍼졌다. 글로리아(43)는 이곳에서 40년을 살았다. “여기 사람들은 메데인 시민이라는 생각이 없었어요. 택시도 이곳은 꺼렸지요. 도시 안의 고립된 마을이었어요.” 지금은 물론 다르다. 명물 케이블카가 등장한 뒤로 바깥손님들이 늘었다.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하니 글로리아는 “아직 씻지도 않았다”며 손사래를 치고는 한바탕 웃으며 커피를 사줬다. 산토도밍고에 온 기념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모여들다

에벨린(20)은 이곳에서 태어났다. 직업교육 학교에서 간호학을 배운다. “어릴 때는 밖에 나올 생각도 못했어요. 주로 집에만 있었죠.” 에벨린이 엄마와 단둘이 살고 있는 집에 찾아갔다. 방은 2개이고 집안은 깔끔했다. 허름하고 지저분한 슬럼가의 주택을 상상했으나, 한국의 중산층 집과 다를 바 없었다. 에벨린의 엄마는 “이곳에서 우리가 중간 정도”라고 했다. 에벨린은 내게 한국 동전이나 지폐가 있으면 기념으로 페소와 바꾸자고 했다. 비밀번호로 잠긴 짐가방 안에 돈을 꼭꼭 숨겨놓고 산토도밍고에 찾아온 내 편견이 미안했다.

에벨린(20·왼쪽 두번째)과 글로리아(43·왼쪽 세번째)를 비롯해 동네 주민들이 기자가 선물한 부채를 들고 있다. 메데인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에벨린(20·왼쪽 두번째)과 글로리아(43·왼쪽 세번째)를 비롯해 동네 주민들이 기자가 선물한 부채를 들고 있다. 메데인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평화가 찾아오니 자연히 사람들도 모여들었다. 역 근처에서 사탕, 과자, 담배 등을 파는 노점상 에밀로(76)는 12년 전 이곳에 이사 왔다. 노점은 2년 전 열었다. 친구 월터(54)는 용접공인데 이곳에 25년 살았다. 때가 낀 노랑 셔츠에 모자를 쓴 월터는 입으로 ‘휙휙’ 소리를 내며 머리를 양쪽으로 흔들었다. “이렇게 총알이 날아다녔어요. 오늘처럼 산책 나와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건 예전에는 불가능했어요”라고 했다. 이곳에서 지금까지 사는 것이 행복하냐고 물었다. 월터는 “25년 동안 여기에 산 거 보면 모르겠느냐”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폭력과 살인이 난무하던 곳, 너무나 평범하고 당연해 보이는 소소한 일상조차 지금 그들에겐 ‘행복’이었다.

산토도밍고역 주변에서 월터(54)가 휴일을 맞아 노점상인 친구 에밀로(76)를 만나 담소를 나눴다. 메데인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산토도밍고역 주변에서 월터(54)가 휴일을 맞아 노점상인 친구 에밀로(76)를 만나 담소를 나눴다. 메데인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케이블카에 대해 시내에 사는 이들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메데인에서 태어나고 자란 대학생 마우넬라(19)는 “케이블카가 범죄를 없앴다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마우넬라는 “음산하면 언제든 범죄가 일어날 수 있지만 사람들이 모이면 쉽게 범죄조직이 활보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단순히 경찰을 배치하는 것만으로 빈곤 지역을 도시공동체에 통합하기는 힘들다. 모두가 함께 사는 시민이라는 인식, 도시 공간을 바꿔 거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생각이 만들어낸 성과다.

실제로 메데인의 또 다른 파벨라인 ‘시에라(La Sierra)’는 경찰이 상주하고 있지만 여전히 사람들이 기피하는 위험 지역이라고 한다. 가난해도 시민으로서 동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자연스레 공동체의 일원으로 이끄는 방식이 행복한 공동체를 만드는 ‘소셜 믹스’의 핵심인 것이다. 시는 시에라 등 2곳에 케이블카 노선을 추가로 설치하는 중이다. 전철, 버스 연결노선도 확장할 계획이다. 케이블카는 단순한 이동수단 이상으로 시민들에겐 ‘평화의 상징물’이다.

동네를 변화시킨 데는 ‘도서관 공원’의 역할도 컸다. ‘에스파냐 도서관’ 근처 공원에서 만난 콴(11)과 얀(13)은 “도서관에는 책과 컴퓨터, 극장처럼 큰 화면이 있는 시청각 자료실이 있어요”라고 했다. 그는 “아르비(Arvi) 공원도 가끔 가요. 거기에 축구장과 호수가 있어요”라며 자랑하듯 말했다. 산토도밍고역에서 케이블카로 20분이면 유명 관광지 아르비 공원으로 연결된다. 저소득층에겐 700페소(263원), 일반 관광객들에겐 4850페소(1825원)를 받는다.

■‘케이블카 도서관’

산하비에르(San Javier) 케이블카·전철역은 도서관 공원과 다리로 이어져 있다. 도서관이 문 닫은 일요일 오후에도 공원 앞 나무 사이 벤치에 앉아 바람을 쐬는 주민들이 보였다. 대학생 글라우디아(22)와 레이디(18), 안드레스(21)는 과제물을 정리하기 위해 기둥 옆에서 빨간 노트북을 켰다.

안드레스는 한 정거장 떨어진 콴23역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도서관에 왔다. 2008년 개통된 산하비에르의 케이블카 노선에는 정거장이 4곳 있다. 산토도밍고처럼 산꼭대기에 사는 주민들을 실어 나른다. 거창하진 않지만 케이블카와 도서관 같은 작은 도시공간의 변화가 폭력을 줄이고 시민들의 삶을 바꿨다는 것은 통계로도 확인된다. 1991년 메데인에서 살인사건 피해자는 인구 10만명당 381명이었다. 2014년에는 26.1명으로 줄었다. 총 인구는 약 391만명이다.

대학생 글라우디아(22)와 레이디(18), 안드레스(21)가 휴일 오후 산하비에르역 근처에 있는 도서관을 찾아 과제물을 정리하고 있다. 도서관이 묻 닫은 일요일에도 많은 주민들이 도서관을 찾아 휴식을 즐겼다. 메데인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대학생 글라우디아(22)와 레이디(18), 안드레스(21)가 휴일 오후 산하비에르역 근처에 있는 도서관을 찾아 과제물을 정리하고 있다. 도서관이 묻 닫은 일요일에도 많은 주민들이 도서관을 찾아 휴식을 즐겼다. 메데인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브라질에서도 콜롬비아와 같은 실험이 진행 중이다. 리우데자네이루의 알레마옹은 브라질에서 가장 큰 빈민가로, 무장경찰서가 맨 처음 들어섰을 만큼 위험한 지역이었다. 산비탈에는 집들이 빼곡했고, 주민들이 도심으로 나오기 힘들었다. 이곳도 케이블카 덕에 달라진 곳이다.

번화가인 봉수세소 전철역에서 케이블카를 타면 알레마옹을 지난다. 산봉우리마다 케이블카 정거장 6곳이 있다. 종점인 파이메리아스역까지는 3.5㎞, 약 20분이 걸린다. 주민들에게는 무료이고 외부인들은 왕복 10헤알(약 3100원)을 내야 한다. 역사 근처에 있는 작은 축구장에선 트럭으로 가구를 운반하는 운전기사가 아이들이 공을 차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강도를 당할지 몰라 차에서 내릴 엄두도 못냈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번화가인 봉수세소에는 최대 빈민가 알레마옹을 지나는 케이블카가 있다. 산봉우리마다 케이블카 정거장 6곳이 설치됐다. 종점인 파이메리아스역까지는 3.5km, 약 20분이 걸린다. 리우데자네이루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번화가인 봉수세소에는 최대 빈민가 알레마옹을 지나는 케이블카가 있다. 산봉우리마다 케이블카 정거장 6곳이 설치됐다. 종점인 파이메리아스역까지는 3.5km, 약 20분이 걸린다. 리우데자네이루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번화가인 봉수세소에는 최대 빈민가 알레마옹을 지나는 케이블카가 설치됐다. 산봉우리마다 케이블카 정거장 6곳이 설치됐다. 종점인 파이메리아스역까지는 3.5km, 약 20분이 걸린다. 정거장에 들어선 케이블카. 리우데자네이루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번화가인 봉수세소에는 최대 빈민가 알레마옹을 지나는 케이블카가 설치됐다. 산봉우리마다 케이블카 정거장 6곳이 설치됐다. 종점인 파이메리아스역까지는 3.5km, 약 20분이 걸린다. 정거장에 들어선 케이블카. 리우데자네이루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파이메리아스역에 내려 5분 정도 떨어진 식당에 갔다. 주인 디마스(40)와 아내 카밀라(33)는 “걸어서 30분을 내려가야 버스를 탈 수 있었고, 버스로 봉수세소로 가는 데 1시간30분이 걸렸어요. 그러다 보니 시내에 자주 가지 못했고 일주일에 한번 정도 나가서 장을 봐왔지요.” 식당에선 햄버거, 소고기, 밥, 스파게티 등을 팔았다. 케이블카가 들어선 뒤로는 거의 매일 시내에 나간다. 동네 골목에서 작은 슈퍼를 운영하는 테레싱아(53)는 이곳에 25년 동안 살았다. 테레싱아는 어릴 때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부모님의 농장일을 거들어야 했다. 그는 케이블카가 생기고 쉰이 넘은 나이에 봉수세소의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읽기와 쓰기가 아직도 서툴기는 하지만, 대학에도 진학할 생각이다.

파이메리아스역 근처 골목에서 작은 슈퍼를 운영하는 테레싱아(53)는 케이블카가 생긴 뒤 시내에 있는 학교에 다니고 있다. 리우데자네이루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파이메리아스역 근처 골목에서 작은 슈퍼를 운영하는 테레싱아(53)는 케이블카가 생긴 뒤 시내에 있는 학교에 다니고 있다. 리우데자네이루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역사 안에는 주민들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도서관이 있다. 보통 주말에는 문을 열지 않는데, 기자가 찾아간 날에는 주말임에도 도서관에 불이 켜졌다. 다른 지역에서까지 찾아온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역사 경비원 에베르톤(39)은 “이곳 아이들은 총, 마약 같은 나쁜 것들을 접하기 쉬운데, 도서관에 와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배우고 상담도 받는다”고 했다. 도서관에서는 음악이나 복싱도 가르친다. 케이블카로 세 정거장 떨어진 바이아나역 근처에 사는 마릴레니(52)는 두 손녀를 데리고 왔다. 손녀 미렐라(6)와 밀레니(4)는 동화책, 과학책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자주 오고 싶어요”라고 수줍게 말했다.

주민들이 주말을 맞아 케이블카 파이메리아스역에 있는 도서관을 찾았다. 리우데자네이루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주민들이 주말을 맞아 케이블카 파이메리아스역에 있는 도서관을 찾았다. 리우데자네이루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파이메리아스역에서 케이블카로 세정거장 떨어진 바이아나역 근처에 사는 마릴레니(52)가 두 손녀를 데리고 도서관을 찾았다. 도서관은 모든 시민에게 무료로 개방한다. 리우데자네이루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파이메리아스역에서 케이블카로 세정거장 떨어진 바이아나역 근처에 사는 마릴레니(52)가 두 손녀를 데리고 도서관을 찾았다. 도서관은 모든 시민에게 무료로 개방한다. 리우데자네이루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에스컬레이터로 ‘동네’를 되찾다

‘코뮤나(Comuna)13’은 메데인에서도 가장 위험한 빈민가였다. 콜롬비아는 주거 환경 등을 기준으로 주민들을 6개 계층으로 나눈다. 지역마다 공공요금과 세금이 다르다. 1계층의 수도요금이 1만페소라면 6계층은 30만~40만페소를 내는 식이다. 코뮤나13은 1~2계층이 모여 있는 곳이다.

코뮤나13에 설치된 에스컬레이터에는 비와 햇빛을 막을 수 있는 지붕이 설치됐다. 메데인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코뮤나13에 설치된 에스컬레이터에는 비와 햇빛을 막을 수 있는 지붕이 설치됐다. 메데인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기 전 코뮤나13의 모습. | 콜롬비아 메데인 시 제공.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기 전 코뮤나13의 모습. | 콜롬비아 메데인 시 제공.

산하비에르역에서 버스를 타고 10분 정도 가면 가파른 언덕이 시작된다. 언덕을 5분 정도 오르자 조그마한 공터가 나왔고, 담벼락 뒤쪽으로 지붕 덮인 에스컬레이터가 보였다. 이 지역을 바꾼 것은 케이블카가 아니라 6개 층에 걸친 에스컬레이터였다. 첫번째 층에 오르자 위쪽에서 검정 강아지가 우아한 자태로 아래를 내려다 봤다. 5층에는 관리 사무실이 있다. ‘친환경 도시’라는 팻말과 함께 ‘코뮤나13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문구가 보였다. 6개의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데에는 15분이 채 안 걸렸다. 경사는 30도가 넘어 보였다. 젊은 사람이 걸어도 30~40분 걸리는 거리다. 에스컬레이터는 평일 오전 6시~오후 10시, 주말에는 오전 8시~오후 9시 운행한다. 6층에 오르자 멀리 산등성이 아래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 내려다보였다. 옅은 안개가 끼었고, 듬성듬성 떠 있는 구름이 지상을 빛과 어둠으로 갈랐다.

에스컬레이터는 6개 층에 걸처 설치됐다. 첫번째 에스컬레이터를 타자 위쪽에서 검정 강아지가 아래를 내려다 봤다. 메데인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에스컬레이터는 6개 층에 걸처 설치됐다. 첫번째 에스컬레이터를 타자 위쪽에서 검정 강아지가 아래를 내려다 봤다. 메데인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에스컬레이터는 6개 층에 걸처 설치됐다. 5층 사무실 앞에  있는 팻말에 “에스컬레이터 ‘코뮤나(Comuna)13’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적혀 있다. 메데인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에스컬레이터는 6개 층에 걸처 설치됐다. 5층 사무실 앞에 있는 팻말에 “에스컬레이터 ‘코뮤나(Comuna)13’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적혀 있다. 메데인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코뮤나13 주민들과 외부인들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있다. 메데인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코뮤나13 주민들과 외부인들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있다. 메데인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에스컬레이터 6층에 있는 전망대에서 바라본 시내 전경. 메데인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에스컬레이터 6층에 있는 전망대에서 바라본 시내 전경. 메데인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2011년에 설치된 에스컬레이터의 역할은 케이블카와 마찬가지로 주민들의 이동권을 개선한 데 그치지 않는다. 주민들에게 ‘동네’를 되찾아 줬다. “청소년들도 무기를 가지고 다녔어요. 돈을 받고 청부살인을 하기도 했지요.” 빨간 조끼를 입은 비비안나(36)는 이곳에서 안전요원으로 일한다. 안전요원이 되려면 이 동네 주민이어야 한다. 비비안나는 “에스컬레이터가 생긴 뒤 가장 큰 변화는 폭력이 90% 정도는 사라졌다는 것”이라고 했다. 온통 갈색 풍경인 다른 빈민가와 달리 이곳 집들은 알록달록했다. 2년 전 한 페인트 회사의 기부를 받아 시에서 집들을 새로 칠했다. 지붕엔 그림을 그렸다.

안전요원으로 일하는 비비안나(36)는 이곳에서 탑승객들의 안전을 살피고 길을 안내한다. 안전요원이 되려면 이 동네 주민이어야 한다. 비비안나는 “에스컬레이터가 생긴 뒤 가장 큰 변화는 폭력이 90% 정도는 사라졌다는 것”이라고 했다.  메데인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안전요원으로 일하는 비비안나(36)는 이곳에서 탑승객들의 안전을 살피고 길을 안내한다. 안전요원이 되려면 이 동네 주민이어야 한다. 비비안나는 “에스컬레이터가 생긴 뒤 가장 큰 변화는 폭력이 90% 정도는 사라졌다는 것”이라고 했다. 메데인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층마다 공터가 있고, 벤치 주위에 나무를 심어 공들여 조경을 했다. 오후가 되자 에스컬레이터 주변은 어느새 놀이터가 됐다. 4층에선 아이들이 킥보드와 스케이트보드를 타거나 공놀이를 했고, 강아지들이 뛰어다녔다. 여자 아이 하나가 넘어지자 안전요원이 달려와 일으켜 세우고 옷매무새를 바로잡아줬다. 안전요원들은 관리자라기보다는 아이들을 돌보는 평범한 이웃처럼 보였다. 어디선가 음악 소리가 울려왔고, 주민들은 벤치에 앉아 여유롭게 휴일 오후를 즐겼다.

빨간 조끼의 안전요원이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 세운 뒤 옷매무새를 바로잡아줬다. 메데인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빨간 조끼의 안전요원이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 세운 뒤 옷매무새를 바로잡아줬다. 메데인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옛날 같으면 이런 건 꿈도 못 꾸었지요.” 4층 공터 옆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오마이라(56)는 애완견을 풀어두고 벤치에 앉아 과일을 먹었다. 그는 이곳에서 15년을 살았다. 2002년 정부는 산하비에르에서 ‘오리온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범죄 소탕작전을 벌였고, 경찰과 갱들 간에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에스컬레이터가 생기면서 경찰이 배치됐고, 관광객들도 찾아오기 시작했다. 지역 명물이 된 에스컬레이터 덕에 수입이 좀 늘었는지 물어봤다. “그런 건 없어요. 그래도 삶의 질은 좋아졌지요. 이렇게 벤치에 앉아 쉬기도 하잖아요.” 에스컬레이터는 주민의 행복을 위한 것이지, 애당초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눈요깃감이 아니었다.

4층 공터 옆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오마이라(56)는 애완견을 풀어두고 벤치에 앉아 과일을 먹으며 주말 오후를 즐겼다. 그는 “옛날 같으면 이런 건 꿈도 못꾸었지요”라고 말했다. 메데인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4층 공터 옆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오마이라(56)는 애완견을 풀어두고 벤치에 앉아 과일을 먹으며 주말 오후를 즐겼다. 그는 “옛날 같으면 이런 건 꿈도 못꾸었지요”라고 말했다. 메데인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아이들을 지켜주는 방과후 교실

밀레이(35)가 맥주를 들고 와 오마이라 옆에 앉았다. 밀레이는 “주말에 나와서 딸이 노는 모습을 지켜봐요. 평일에 열리는 방과후 교실도 아이들에게 도움이 많이 돼요”라고 했다. 에스컬레이터가 생긴 뒤 이곳엔 특별한 방과후 교실도 생겼다. 매주 화·목요일에 오전과 오후, 2시간씩 열린다. 읽기, 쓰기, 태권도, 가라테, 미술, 음악, 종이접기 등 종류도 다양하다. 밀레이의 딸 셀레네(9)는 그중 “쓰기가 제일 재미있다”고 했다. 밀레이는 단순히 아이들에게 학습을 시키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한다. 그는 “아이들이 마약, 소매치기 같은 나쁜 길로 빠질 수 있는데 방과후 교실이 열리면서 비행을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은 잠재적인 폭력으로부터 아이들을 지키는 것이다.

밀레이(35)가 딸 셀레네(9)와 함께 공터에 나와 바람을 쐬고 있다. 에스컬레이터가 생긴 뒤 이곳엔 특별한 방과후 교실도 생겼다. 매주 화·목요일에 오전과 오후, 2시간씩 열린다. 읽기, 쓰기, 태권도, 가라테, 미술, 음악, 종이접기 등 종류도 다양하다. 밀레이는 방과후 교실이 잠재적인 폭력으로부터 아이들을 지켜준다고 했다. 메데인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밀레이(35)가 딸 셀레네(9)와 함께 공터에 나와 바람을 쐬고 있다. 에스컬레이터가 생긴 뒤 이곳엔 특별한 방과후 교실도 생겼다. 매주 화·목요일에 오전과 오후, 2시간씩 열린다. 읽기, 쓰기, 태권도, 가라테, 미술, 음악, 종이접기 등 종류도 다양하다. 밀레이는 방과후 교실이 잠재적인 폭력으로부터 아이들을 지켜준다고 했다. 메데인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에스컬레이터 초입에서 만난 마리아(40·오른쪽)이 가족들과 함께 집 앞에서 담소를 나눴다. 그는 “옛날에는 해지면 문을 걸어 잠가야 했었다”라고 했다. 메데인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에스컬레이터 초입에서 만난 마리아(40·오른쪽)이 가족들과 함께 집 앞에서 담소를 나눴다. 그는 “옛날에는 해지면 문을 걸어 잠가야 했었다”라고 했다. 메데인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방과후 교실은 에스컬레이터 관리사무실 1층에서 열린다. 이날은 특별한 행사가 준비돼 있었다. 콜롬비아에서는 만 15세가 된 여자 아이들에게 생일 파티를 성대하게 열어준다. 미리 예약하면 공짜로 사무실 공간을 쓸 수 있는데, 이날은 생일파티가 예약돼 있었다.

콴(11)은 다른 마을에 살지만 이곳에 자주 놀러온다. 콴은 에스컬레이터의 요일별 운행 시간과 길이 따위를 줄줄이 외우고 있었다. 멀리 아시아에서 온 손님이 신기했는지, 콴은 기자를 내내 쫓아다녔다. 4층에서 만난 호세(11)는 친구들과 언덕 위 공터에서 축구를 하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이들은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다고 했다. 아이들에게 사진을 찍자고 하자 자연스럽게 자세를 잡았다.

축구를 마치고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해 집에 돌아가던 세바스찬(10·왼쪽부터)과, 호세(11), 콴(11).  메데인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축구를 마치고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해 집에 돌아가던 세바스찬(10·왼쪽부터)과, 호세(11), 콴(11). 메데인 |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조지(19)는 이곳에서 16년 동안 살았다. 에스컬레이터가 없을 땐 언덕을 오르내리는 게 힘들기도 했지만 언제 폭행이나 강도를 당할지 몰라 마음을 졸여야 했다. “이제는 폭력을 끝내야 한다는 공감대 속에 모두가 노력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당국이 마련해준 에스컬레이터, 주민들의 노력이 합쳐지니 밖에서 이 동네를 보는 시각도 바뀌었다. 여기서 태어나 자란 제이슨(22)의 손에는 책과 서류 뭉치가 들려 있었다. 마케팅 회사에서 서류 정리 작업을 하고 정원사로도 일한다. “예전엔 경찰도 여기 함부로 들어오지 못했어요. 다른 지역 사람들은 우리를 게릴라처럼 여겼지요. 지금은 모두 평범한 사람들로 생각해요.”

6층 전망대에서 ‘외부인’인 니디아(58)와 아들 디에고(25)를 만났다. 이들은 코뮤나13에 처음 왔다고 했다. “경관이 좋다고들 해서 와봤어요. 음산할 줄 알았지만 깨끗하고 정비가 잘 돼있어 평범한 동네 같아요.” 디에고는 “물론 지금도 약간 위험한 거 같다”며 웃어 보였다.

오후 5시쯤, 20여명이 사진기를 들고 와 4층 공터를 가득 메웠다. 사진 교실에서 단체로 출사를 나온 이들은 도시의 전경과 에스컬레이터 등을 향해 셔터를 눌러댔다. 알록달록한 집들도 사진기에 담겼다. 주민들은 대개 외부인들의 방문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으나, 지나친 관심에 불쾌감을 드러내는 이들도 있었다. ‘갱들이 판을 치다가 평화를 되찾은 곳’이라는 이미지가 박혀 있는 게 싫은 듯했다. 담배를 피우던 40대 남성은 멀리 산언덕의 마을들을 손으로 가리켰다. “옛날에는 여기뿐만 아니라 다른 데도 위험했는데 왜 여기에만 관심을 갖느냐”고 했다.

오후 6시가 넘어 땅거미가 내려앉자 더 많은 이들이 밖으로 나왔고, 에스컬레이터 승객도 늘었다. 아이들은 돗자리를 깔고 소꿉놀이를 했다. 상점 앞에는 테이블을 깔아놓고 주민들이 맥주를 마셨다. 다시 산하비에르역으로 향하는 버스 안까지 신나는 리듬의 음악이 들려왔다.

일년 내내 봄처럼 따뜻한 메데인은 ‘영원한 봄의 도시’로 불린다. 그러나 악명 높은 메데인의 산비탈 마을 주민들의 삶에 봄이 찾아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절로 다가온 봄이 아니라, 당국과 주민들이 힘을 합해 만들어 낸 봄이다.

■메데인 카르텔
‘메데인 카르텔’은 1970~1980년대 중남미를 떨게 한 악명 높은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범죄조직 이름이다. 파블로 에스코바르는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에 마약을 밀매한 백만장자였다. 그는 1993년 12월2일 콜롬비아 당국의 체포작전 중 총에 맞아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메데인에 있는 안티오키아주립 박물관에는 세계적인 화가 페르난도 보테로가 그린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죽음’(2006)이 있다.


특별취재팀
구정은 김세훈 장은교 김보미 박은하 정희완 김정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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