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재의 날’에 묻힌 ‘조선인 대학살’

2005.09.01 12:43

82년전 9월1일 오전 11시58분. 일본 관동지방에 규모 7.9의 강진이 밀어닥쳐 14만여명이 희생되고 가옥 57만채가 전파·소실됐다. 도로가 파손되고 시체가 나뒹구는, 도시 기능이 완전 마비된 공황상태였다.

‘방재의 날’에 묻힌 ‘조선인 대학살’

보고서에 따르면 지진이 난 후 내무성 경보국이 방화와 폭동 등을 ‘조선인 소행’ ‘내습’ 등의 표현을 써가며 사실인 것처럼 전국에 소문낸 것이 조선인 학살의 큰 원인이 됐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중국인 폭동설도 유포되면서 중국인도 수백명 학살됐다.

그들은 죽창이나 몽둥이, 총칼 등으로 닥치는 대로 조선인들을 학살했다. 강물에 던지거나 불에 태우기도 했다. 조선인들을 ‘나는 조선인입니다. 차거나 두드려주십시오’라는 팻말 옆에 묶어놓기도 했다. 그들의 학살 방법은 잔인함과 광기의 극치였다.

지난해 10월 니가타현 지진 이래 수차례 강진을 경험해야 했던 일본 열도는 지진에 대한 경각심이 여느해보다 뜨겁다. 방재용품은 물론, 재해에 대비한 안내지도가 날개돋힌 듯 팔리고 있다.

‘방재의 날’이 되는 1일 일본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107만여명이 참가하는 방재훈련이 실시됐다. 수도권에 강진이 발생한다는 가정 하에서 고이즈미 총리는 관저에서 ‘긴급재해대책본부’를 설치하고, 국민들에게 재해경계에 대비할 것을 촉구했다. 언론들도 일제히 재해 대책 재점검을 강조하고 나섰다. 당연히 ‘대학살 사건’은 ‘방재의 날’에 묻히고 말았다.

관동대지진 당시 신문발행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각종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지진 피해를 입지 않은 일부 신문에는 <불령선인, 각지에서 방화/도쿄에 계엄령 선포> <조선인 봉기로 2천명 체포> <조선인 4백명 체포, 폭탄을 압수> 이라는 제목으로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키고 군대와 교전 중이라는 오보까지 실렸다. 관동대지진 대학살은 언론 없는 사회의 공포를 대변하고 민족차별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일본 정부나 언론이 침묵해도 ‘양심’은 남아있다. 일본변호사연합회는 관동대지진 80주년을 맞은 2003년 고이즈미 총리에게 사죄와 진상규명을 권고하고 나섰다. 일본변호사연합회는 “국가는 책임을 인정하고 피해자나 유족에게 사죄하고 학살의 전모와 진상을 조사, 원인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취지의 권고문을 제출했다.

일본변호사연합회는 “발생 80주년인 지금이야말로 국가가 조사를 시작,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함으로써 중대한 잘못을 재발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국내외에 분명하게 전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에게 납북 일본인 문제를 압박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과거에 범한 ‘조선인 대학살’은 은폐하고 있는 일본정부 및 우익들에 대한 양심세력의 질타였다. 그러나 이같은 양심의 목소리는 아직 힘을 받지 못하고 있다.

관동대지진의 참담한 비극을 단순 자연재해로 치부할 순 없다. 수천명의 재일동포들이 일본인의 손에 학살당했다. 일본의 철저한 민족차별에 의한 결과다. 지금 일본 정부나 언론은 이날을 방재능력을 재점검하는 날로 삼으며 ‘학살의 기억’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

〈미디어칸 고영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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