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발굴의 시대 - 왜, 경주였나

2013.12.20 20:36 입력 2013.12.21 11:22 수정
김원 |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신라사’ 복원…통일과 정권의 정당성 주입

지난 11월 취임 8개월 만에 변영섭 문화재청장이 교체됐다. 이유는 숭례문 부실 복구 등 문화재 보수사업 관리 부실이었다. 12월 박근혜 대통령은 경주 석굴암을 방문해 문화재 관리를 둘러싼 여러 우려에 대해 관계자들과 대화를 나눴다. 이 같은 문화재 보존에 대한 정부나 대통령의 관심은 유신 시기를 전후한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신 시기 문화재의 발굴, 보존, 개발에 대한 정부의 지속적인 개입이 정권 붕괴 직전까지 이어졌다. 박정희 대통령은 10·26이 일어나기 이틀 전인 1979년 10월24일 경주 보문단지를 마지막으로 방문했다. 그는 건물 색조까지 하나하나 살피며 여러 사항을 지적했다고 한다. 오늘날 경주의 원형은 1968년 불국사 복원으로 시작돼 1971년 종합개발로 이어졌다.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과 지시로 조성된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왜 경주라는 장소에 주목했을까?

1960년대 전반 박정희는 한국사를 타파해야 할 인습으로 봤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근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960년대 후반 들어서는 제2경제론, 국민교육헌장, 사회정화운동 등으로 ‘정신이 선도하는 물질문명’을 강조했다. 서구에서 받아들인 물질문명과 근대정신을 한국 전통 속에 간직해온 정신문화와 조화시키는 게 중요하다고 선전했다. 정부는 민족이란 원초적 정서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민족문화의 정수인 문화재 발굴, 정화, 성역화 그리고 기념물화를 민족의식 확립의 핵심적 요건으로 제시했다. 1971년부터 시작된 ‘경주고도개발사업’에 125억원을 투자했고 보문단지를 국제적 관광단지로 조성했다. 다소 과장해서 말하자면 ‘신라사의 복원’이 시각적으로 이뤄졌던 것이다.

경주와 신라의 재전유

1970년대 들어서는 호국선열, 국방과 관련된 문화재 보수 및 정화, 성역화가 대규모로 이뤄졌다. 1975년에는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만들어졌다. 이후 천마총, 황남대총, 안압지 등을 발굴, 정화했는데 이 시기를 ‘발굴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다. 문예진흥기금 485억원 가운데 70%를 민족사관 정립을 위한 사업에 투입했다. 이는 문화재 발굴, 보수, 정화뿐만 아니라 발굴된 문화재를 관광에 활용하는 관광산업 육성으로까지 확대됐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문화재와 주변 경관은 보존 대상일 뿐만 아니라 문화관광을 통한 외화 획득 수단으로도 자리 잡게 된다.

천마총 찾은 박정희 경주 천마총 발굴현장을 찾은 박정희 대통령. 1973년 7월3일 오후 1시에 이곳을 찾은 박정희는 약 30분간 발굴현장을 둘러보고 경주개발사업에서 발굴이 필요할 경우에는 발굴사업을 우선적으로 실시한 후에 공사를 수행하라고 당부하고 조사원들을 격려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천마총 찾은 박정희 경주 천마총 발굴현장을 찾은 박정희 대통령. 1973년 7월3일 오후 1시에 이곳을 찾은 박정희는 약 30분간 발굴현장을 둘러보고 경주개발사업에서 발굴이 필요할 경우에는 발굴사업을 우선적으로 실시한 후에 공사를 수행하라고 당부하고 조사원들을 격려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 전환기의 한가운데 경주가 있었다. 1969년 경주시가 ‘관광개발기본계획’을 마련했고 1971년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경주관광종합개발’이 입안됐다. 대통령으로부터 발굴과 개발 지시를 받은 청와대 비서실은 기획단을 구성해 긴급 작업에 들어갔다. 건설부, 문화공보부 등 관련 부서 국·과장들이 중심이 돼 청와대안을 만들었다. 관계부처 장관이 참여하는 보고회를 거쳐 대통령이 최종 결정했다. 지시 이후 2개월도 지나지 않은 기간에 계획안이 재가를 받아 추진됐다.

이 시기 경주와 신라가 재발명된 배경과 이유는 박정희 정부가 통일을 위한 국민교육과 훈련의 장으로 화랑도를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부는 화랑도와 화랑정신을 풍류도와 불교호국사상이 결합된 ‘국민적 군사운동’으로 이해하고 대규모 자원과 인력을 투입했다. 다음으로 남북한 체제경쟁을 들 수 있다. 북한이 고구려를 민족 주체성의 시조로 정립했던 것에 대응해 박정희 정부는 신라 문화를 민족문화의 정수로, 통일신라를 한국사의 황금기로 자리매김했다. 정권 차원의 경주 발굴과 개발은 국난 극복사에서 화랑도를 민족의 얼로 부각시키고, 이들의 충(忠) 관념이 삼국통일의 정신적 바탕이 되었다는 당대 맥락에 조응했다.

박정희는 개발과 발굴의 세부적인 영역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지시했다. 그는 1971년 친필로 ‘경주관광코스’를 지시해 이를 실제 투어 프로그램에 반영했고, 경주 개발의 기본 개념으로 “웅대, 찬란, 정교, 활달, 진취, 여유, 우아, 유현의 감(感)”을 강조했다. 경주 개발을 위해 정부는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에서 2160만달러를 차관으로 들여왔을 뿐만 아니라 공공자금에다 골프장, 호텔 건설 등 수익성 사업을 위한 민간자본까지 경주 개발에 투자하도록 강제했다.

천마총과 황남대총으로 알려진 대형 고분 발굴도 대통령의 지시로 이뤄졌다. 1972년 박정희는 황남동 98호분(황남대총) 발굴을 지시했다. 고고학자들은 98호분을 신앙처럼 여기는 경주 사람들에게 실망을 줄 가능성을 우려했고, 동시에 98호분 발굴 직전 무령왕릉 발굴 과정에서 불거진 졸속 발굴 문제 때문에 발굴을 꺼렸다. 고고학자들은 1973년 98호분 발굴 전단계로 황남동 155호분(천마총) 발굴을 제안했다. 155호분에서 유물이 대거 발견되자 98호분 발굴로 이어졌다. 발굴이 잇달아 성공하면서 정부는 유적을 통한 ‘새로운 역사 만들기’에 착수했다. 신라 고분을 발굴하고 출토된 유물을 국민들에게 적극 홍보해 통일의 정당성과 정권의 정통성을 획득하려 했다.

박정희 정권은 1976년 6월 신라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시키고 대중에게 통일 의지를 주입시키려는 또 다른 시도를 했다. 신라의 삼국통일에 기여한 인물인 무열왕, 문무왕, 김유신을 기리는 화랑들의 대사당인 통일전을 세워 성역화한 것이다. 경주 남산 자락에 위치한 통일전은 총 6억4900만원이 투입된 대규모 화랑 사당이다. “화랑의 정신으로 통일을 이루자”란 지극히 정치적 목적을 띤 통일전과 본전(本殿)은 이후 모든 유적의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 경주 발굴은 화랑도와 신라사를 민족사의 중심에 위치시킴으로써 국난 극복의 민족적 주체를 구성하기 위한 정치·사회적 기획의 일환이었다.

발굴과 개발 시대에 대한 기억

그렇다면 당시 발굴과 개발에 참여했던 고고학자, 발굴 전문가, 청와대·문공부·건설부 행정관료들은 경주 발굴과 개발을 어떻게 기억할까? 발굴 관련자들의 기억에서 두드러진 점은 박정희에 대한 것이다. 박정희는 “진지한 대통령” “지시하는 대통령” 등 여러 방식으로 기억됐다. 여러 관계자들은 박정희 덕에 고고학이 발전했고 경주 발굴이 가능했다고 여겼다. 박정희의 경주 발굴에 대한 강한 추진 의지가 없었다면 짧은 시기에 경주가 현재와 같이 재구성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기억한다.

실제 1973년 7월3일 박정희는 천마총 발굴현장을 직접 찾기도 했다. 박정희의 방문은 국가원수의 최초 발굴 현장 방문이었다. 가장 빈번하게 관계자들에게 기억되는 것은 ‘박정희의 지시사항’이었다. 발굴 관계자와 관련 공무원, 조경 담당자들은 박정희와 청와대의 수많은 지시를 받고 이를 시행해야 했다. 이들의 기억에서 드러나는 지시들을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황룡사 일대 논밭 정리, 다보탑과 석가탑에 보호각 설치, 제2의 석굴암 건축, 경주 일대 벚나무 식수, 불국사 주변 불량 주택·담장·대문 수리, 불국사 가로수 조성 등이다. 박정희는 가로수를 일본 고베에서 지원받아 은행나무로 교체할 것을 지시했다. 천마총 주변의 휴식처를 수리하고 안압지 주변 대기소를 주위와 조화를 이루도록 한식으로 개조하라는 지시도 내렸다.

과도한 지시와 개입에도 이들에게 경주 발굴은 “고고학에 대한 첫사랑” “감동의 순간” “신라 문화의 신비함에 매혹”된 순간으로 기억되고 있다. 특히 고고학자에게 경주 발굴은 의미가 컸다. 이들은 대규모로 계속된 경주 발굴을 “고고학 훈련장” “고고학이 국민에게 이해되는 시기” “식민사관에서 탈피하는 고고학 보고서 작성” 등으로 기억한다.

초기에는 자국의 유물을 발굴한 경험이 거의 부재했기에 이마니시 류(今西龍) 같은 식민사학자가 쓴 검총(劍塚) 보고서부터 시작해서 조선의 발굴보고서 등을 검토했다. 발굴과 복원이 많이 이뤄지자 천마총, 황남대총, 안압지, 황룡사에 이르는 과정은 “고고학 훈련소”라고 불릴 만큼 많은 전문가를 길러냈다. 경주는 민족사의 원초적 사료인 유물을 발굴하는 장이기도 했다. 경주 발굴 이전까지 남의 시각으로 유물을 해석하고 기록한 데서 벗어나 당대에 지향했던 민족주의 사관의 정립과 연동되면서 고고학의 한국화가 이뤄졌다.

망각된 기억들

하지만 민족사의 재구축을 목표로 했던 경주 개발과 발굴 과정에서 생긴 주민의 피해, 원망, 반발 그리고 유언비어 등은 20년이 지난 뒤에도 이들의 기억 속에서 부유하고 있다. 표면적으로 당시 토지매입과 발굴, 개발과정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관련자들은 스치듯이 혹은 안타까운 기억의 흔적으로 지금은 잊혀진 주민들의 저항과 불만을 남겨 놓았다. 이런 흔적은 민족문화, 민족 주체의 재구성이라는 국민 중심의 전통적 역사서술에서 망각된 것이었다.

우선 망각된 기억은 발굴 및 복원 과정에서 이장과 철거 등을 둘러싼 주민들의 반발이었다. 조상의 묘를 이장하거나 주택 철거, 도로공사, 상하수도 공사로 길을 파헤쳐 주민의 불만이 높았고 발굴과 복원 과정에서 민원은 끊이지 않았다. 주민들은 살고 있는 집 수리조차 제약을 받았다. 이들은 불국사 복원 과정에서 시위를 벌였다. “인건비 미지출로 인한 작업 중단과 농성” “석축공사를 맡았던 석공들의 인건비 인상을 위한 태업” “중기회사의 재계약 요구 작업중단” 등 다양한 불만과 요구가 터져나왔다. 1972~1973년 경주시청 앞은 매일 데모 인파로 북새통을 이뤘을 정도다.

발굴 과정의 유언비어는 당시 불만을 대변한다. “1973년도는 굉장히 무더웠다. 조사할 때마다 노인들이 두루마기를 입고 지팡이를 짚고 갓을 쓰고 와서 ‘네놈들이 왕 무덤을 파니까 하늘이 노해서 비도 안 오고 가물다, 이놈들아’ 하고 호통을 치기도 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경주 김씨 종친회 원로들은 현장 사무실에 와서 드러눕거나 시위를 계획하기도 했다. 1973년 8월10일 동아일보 기사에도 “고분발굴 저지운동”이 나왔다. 기사는 이 운동이 경주의 박씨, 석씨 그리고 김씨 후예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고 전했다.

경주와 신라사, 화랑정신 등 국민국가 건설 과정에서 창출된 집합적 자기 표상은 이후 오랫동안 내셔널 히스토리를 구성한 요소들이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난 뒤에도 주민들은 경주라는 신라의 상징을 재창조했던 과정에서 망각된 자신들의 피해에 대해 잊지 않고 있다. 이런 피해들이 망각된 것은 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 지시와 속도전식 공사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기억의 장이 망각되어온 것을 사유하는 일이라면 주민의 피해, 원망, 반발 그리고 유언비어 등 망각되거나 흔적처럼 남겨진 기억의 파편에도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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