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공’이 된 사회운동가들

2017.06.05 20:48 입력 2017.06.05 20:52 수정
박용채 논설위원

“이제는 수신제가만 하면 될 것 같은데요” “뭘, 제가까지? 수신만 잘하면 됩니다”. 언론계 선후배들과 며칠 전 저녁을 하다 나온 농담 한 토막이다. 박근혜 정부 때는 치국을 걱정해야 했지만 문재인 정부가 하는 걸 보니 굳이 나랏일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는 얘기였다. 걱정할 나랏일이 없을까마는 최소한 국정농단, 세월호, 국정교과서, 블랙리스트 같은 비정상적 움직임에 분노해 광화문광장을 찾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희망가였다.

[박용채 칼럼]‘어공’이 된 사회운동가들

문재인 대통령의 여러 메시지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인사이다. 특히 청와대 정책실장 장하성, 공정위원장 후보자 김상조의 발탁은 의미심장하다. 우리 사회에서 장하성·김상조는 재벌개혁, 공정경제를 상징한다. 문 대통령이 이들을 발탁한 것은 “내가 이런 일을 하겠다”는 것을 자연스레 얘기하는 것이다.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공정사회 구현과 경제민주화를 말하면서도 정작 이를 구현할 인물은 외면했던 것과는 결이 다르다. 김상조의 청문보고서가 채택되면 둘 모두 교수·사회활동가에서 ‘어공’(어쩌다 공무원)이 된다. 둘은 20여년 전부터 소액주주 운동을 함께하면서 재벌 저격수라는 별명도 공유하고 있다. 굳이 구분하자면 장하성은 분배개혁과 공정성장에, 김상조는 대기업 특히 4대재벌 개혁에 더 집중해왔다.

시민들이 둘의 인선을 반기는 것은 이들의 생각이 특별한 견해가 아닐 정도로 광범위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하성은 첫 기자간담회에서 “한국 사회의 분배구조는 갈수록 악화되고 있으며 지금의 모습으로는 경제가 지속가능하지 않다”고 말했다. 김상조는 청문회에서 “대기업집단이 경제력 집중과 내부거래를 통한 사익추구 방식으로 부를 축적하면서 시장경제가 공정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대안은 소득주도 성장이다. 기획재정부 장관 후보자인 김동연은 “우리 경제에 여러 문제가 있는데 이를 효과적으로 다루려면 핵심을 건드려야 한다”는 ‘킹핀’론을 제기했다. 볼링에서 킹핀을 맞혀야 나머지 핀들이 쓰러지는 것을 빗댄 비유이다. 새 정부는 킹핀을 일자리로 자리매김했다. 첫 시험대는 어제 발표한 추경이다. 추경이 말하는 것은 정부가 모범 고용자임을 자처해 공무원을 더 많이 뽑고, 취약계층에 훨씬 더 많은 배려를 하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장하성과 김상조의 적이 도처에 널려 있다는 점이다. 재계는 물론 스스로를 주류로 자리매김해온 집단은 “민간의 성장이 받쳐주지 않는 소득주도 성장은 모래성”이라고 말한다. 당장 노동계를 중시하는 모습에 재계는 뿔이 나 있다. “경총이 문제제기한 것은 ‘정규직화하는 것은 좋지만 실제로는 이런저런 문제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얘기한 것이다. 경총이라는 단체가 본래 그런 얘기를 하는 곳이다. 그런 말을 한다고 조리를 돌리면 무슨 소통을 하나” “‘뒷거래의 시대’는 오래전에 끝났다. 후계자들은 떳떳하게 평가받고 싶어 한다. 이런 변화된 모습을 왜 몰라주는지 모르겠다”. 이런 발언의 밑바닥에는 장하성과 김상조는 ‘재벌을 죽이는 인물’로 여기는 인식이 깔려 있다.

관료집단이라고 예외일까. 지금은 개혁 기세에 눌려 있지만 ‘늘공’(늘 공무원)인 관료집단은 치고 빠지는 데 능하다. 특정 사안이 발생하면 소란을 피하기 위해 기존 형태를 고집한다. 이를 설득해 줄기를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자칫 왕따가 되면서 늘공들에 둘러싸인 외딴섬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늘공에 녹아들면 개혁은 물 건너간다. 자칭 주류 경제학자들은 “당장의 현안은 적폐청산이지만 이 사안은 곧 지나간다. 그 다음은 먹거리이다. 당면한 산업구조조정, 4차 산업혁명 대응, 그에 걸맞은 체제 완비 등을 그들이 할 수 있겠는가”라며 끌어내린다.

장하성과 김상조의 실험은 단순히 사회활동가의 공간 이전이 아니다. 우리 경제에 개혁의 동력을 확보하는 시도이다. 대런 애쓰모글루 미 MIT 교수는 저서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경제발전은 정치와 경제 시스템이 얼마나 포용적인가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포용적 제도는 법이 공평하게 시행되며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는 것이다. 특정 계층의 소득을 착취해 부를 불리는 제도가 지배하는 곳은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금은 시민들의 집단지성이 살아 움직이는 시대라는 점이다. 시민들은 우리 경제의 모순점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어떻게 해야 공정한 경제가 되는지도 모르지 않는다. 노파심에 한 가지만 더. 문재인 정부에 박수만 치지 말자. 가만히 있어도 잘할 것이라고 여겨서는 안된다. 과거와 달라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은 정부와 시민사회 모두의 몫이다. 화살은 시위를 떠났다. 조급해할 필요 없다. 일관성만 유지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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