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운전자들이여, 프랑스인처럼 ‘정지선을 넘지마오’

2018.03.02 17:15 입력 2018.03.02 17:19 수정
필자 곽원철

곽원철의 ‘알프스 베베 레나’

구글 스트리트 뷰로 갈무리한 프랑스 그르노블의 거리. 신호등이 교차로가 아닌 정지선 위에 설치돼 있다.

구글 스트리트 뷰로 갈무리한 프랑스 그르노블의 거리. 신호등이 교차로가 아닌 정지선 위에 설치돼 있다.

예전에 우리나라 TV에서 교통 법규 준수를 주제로 한 공익성 오락물이 인기를 끌었다. 코미디언과 유명 인사가 교차로 어딘가에 잠복했다가, 정지선을 지키는 차량이 나타나면 깜짝 등장해 냉장고 등의 선물을 주는 것이다. 당시만 해도 정지선을 철저히 지키는 운전자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방송이 가능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정지선을 어기는 차량을 찾기가 힘들기 때문에 이와 같은 프로그램은 기획할 수 없을 것이다. 프랑스 운전자들은 우리나라 운전자들보다 준법정신이 투철할까?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이전에 프랑스의 도로는 정지선을 어기기가 매우 어렵게 설계됐기 때문이라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어떻게? 간단하다. 이곳에서는 많은 경우 신호등이 교차로 위가 아닌 정지선 바로 옆에 설치되어 있다(사진 참조). 정지선을 지나쳐서 정차하면 신호등을 볼 수 없고, 파란불이 들어와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출발할 타이밍을 놓쳐서 난감한 상황에 빠진다. 운전자들도 이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정지선을 지키지 않을 수가 없다. (알 수 있는 방법이 있기는 한데 굳이 여기서 밝힐 필요는 없으리라 본다)

한국에서 12년 프랑스에서 9년, 도합 21년의 운전 경력을 가진 나의 경험으로 보건대, 프랑스의 교통 표지판이나 차선 등은 단속 여부와 상관없이 반드시 지켜야 한다. 단속이 없다면 지켜도 그만 안 지켜도 그만인 경우가 적지 않은 우리나라의 교통 법규 체계와는 상당히 다르다. 프랑스의 교통 법규는 어기거나 무시할 경우 운전자 본인과 주변 교통 상황이 심각하게 꼬여 버리도록 교묘하게 설계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가령 대부분 직진이 우선인 우리나라의 교통 체계와는 달리, 프랑스에서는 직진보다 진입 차량이 우선인 경우가 더 많다. 심지어 비보호 좌회전이 직진보다 우선인 교차로도 꽤 있다. 이 때문에 노면에 그어진 점선과 실선, 신호 표지를 잘 보고 운전하지 않으면 자칫 사고가 날 수도 있다. 램프를 통해 간선도로에 진입하면서도, 나의 진행 방향 노면에 정지선이 그어져 있지 않으면, 직진하는 차들은 보지도 않고 내달리는 운전자들이 대부분이다. 반대로 내가 간선도로로 직진하고 있다 하더라도 바닥에 선이 있다면 반드시 속도를 늦추거나 멈춰 서서 진입 차량에게 양보해야 한다. 정지 표지판도 마찬가지다. 그동안의 운전 경험으로 보건대, 프랑스에서 정지 표지판이 세워진 곳은 신호등이 없거나 아무도 보고 있지 않더라도 반드시 멈춰 서서 좌우를 살핀 뒤에 다시 출발해야 한다. 멈추지 않고 그냥 지나친다면 도로 구조상 뭔가 예기치 못한 문제가 생기기 십상이다.

[다른 삶]한국 운전자들이여, 프랑스인처럼 ‘정지선을 넘지마오’

한편으로 이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한 유럽의 도로 교통망 때문이기도 하다. 유럽에서 자동차 운전을 해보신 분들이라면 잘 알겠지만, 이곳의 도시들 특히 구도심에서는 짧게는 수백년, 길게는 로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길들이 지금도 활발히 사용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에서라면 싹 갈아엎고 신작로를 내는 방식으로 ‘개발’했겠지만, 유럽인들은 건물은 부숴도 담벼락은 보존하고, 담벼락은 부수더라도 길은 어지간해서는 바꾸지 않는다. 자동차가 대량으로 보급되기 훨씬 이전에 건설된 이런 오래된 도로들은 걷기에는 운치가 있고 아름다울지언정 차로 다니기에는, 특히 이런 길을 처음 접하는 운전자들에게는 여간 까다롭지 않다. 하지만 일단 익숙해지고 나면, 교묘하게 짜인 교통 신호 체계 덕분에 의외로 원활한 교통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령 내가 시내 건너편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도심을 우회해 집으로 돌아올 때 자주 이용하는 강변도로의 경우(그림 1 참조), 정지선과 그 옆의 신호등이 교차로에서 10~15m 정도 물러나 설치되어 있다. 좁은 다리를 건너와 우회전하는 차량들의 회전 반경에 여유 공간을 주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다. 우마차가 가장 빠른 교통수단이던 200여 년 전에 처음 놓여져 자동차의 회전 반경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이 다리를 허물고 새로 짓는 대신, 간단히 정지선을 옮겨 설치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이 교차로에서 정지선을 지나쳐 정차한다면 어떻게 될까. 첫째로 신호등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신호가 바뀌는 타이밍을 알 수 없고, 둘째로 다리를 건너 우회전하는 차량들의 교통 흐름을 방해하여 결국 스스로도 정체 상황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운전자들도 알고 있다.

프랑스의 지자체 공무원들은 이렇듯 신호 체계를 간단히 변화시켜, 길을 뜯어내거나 새로 깔지 않고도 교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주의 깊게 살펴보면, 이따금 간선도로나 이면 도로 등에 임시로 검은 호스 같은 것들이 가로질러 설치되어 있다. 궁금해서 살펴보니 교통량을 측정하는 일종의 계수기로서, 특정 구간을 통과하는 차량의 대수를 시간대별로 조사하는 데 쓰이는 장비다. 이런 조사 뒤에는 해당 구간의 교통 체계가 바뀌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가령 버스전용차로를 새로 설치하거나 반대로 기존의 전용 차로를 일반 차로로 되돌려 버린다든지, 정지선이나 신호등, 횡단보도 또는 버스 정류장의 위치를 옮긴다든지 하는 식이다. 양방 통행이던 곳이 일방으로 바뀌거나 그 반대의 경우는 흔한 편이고, 심지어는 일방통행의 방향이 반대로 바뀌어 있기도 한다. 상황이 이렇게 가변적이다 보니 운전자들은 매번 다니던 길도 표지판을 주의해서 살펴야 한다. 물론 교통 체계가 바뀔 때마다 잠시 투덜거리기도 하지만, 대체로 별 불만은 없는 듯하다. 어쨌든 이와 같이 인구 통계적 상황 변화에 따라 탄력적으로 도로 체계를 유지하기 때문에, 인구 및 교통 밀집도가 비교적 높은 편인 이곳 그르노블에서도 심각한 교통 체증 없이 원활한 순환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운전자들도 알고 있다. 요새야 그럴 리 없겠지만, 예전에 우리나라의 일부 지자체들이 연말이면 배정된 예산을 소진하려고 멀쩡한 보도블록을 새로 깔곤 하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도로 체계는 그렇다 치고 운전자들의 태도는 어떨까. 처음에 프랑스에서 운전을 시작했을 때는, 교통 법규를 철저히 지킬뿐더러 상대 운전자들을 배려하여 곧잘 양보하는 그들의 태도에 감탄하곤 했다. 이런 습관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가령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라도 보행자가 지나가려 할 때는 무조건 멈춰 서곤 하는 프랑스 운전자들의 태도에 감탄을 하면서도, 막상 스스로는 한국에서 십여 년 운전해 온 습관을 버리지 못해 보행자가 보이는데도 멈춰 설 타이밍을 놓치곤 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프랑스 운전자들이 한국의 운전자들에 비해 준법정신이나 양보심이 강해서 그렇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 프랑스 운전자들은 지금 몇 초 빨리 앞질러 가기보다는 교통 체계를 살펴가며 두어 단계 이후의 상황을 내다보아 본인과 다른 운전자들에게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하도록 훈련받는 것이 아닐까 한다. 프랑스 운전자들이 다른 운전자들에게 양보하는 상황을 유심히 살펴보면, 양보를 하든 안 하든 자신들의 갈 길에는 별로 방해될 것이 없다 싶을 때만 양보를 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에 보행자나 여성 운전자에 대한 양보는 절대적이다)

한 예로 우리 가족이 작년까지 살던 집은 2차선 도로인 큰길에서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 있었다. 퇴근길 방향에서 집 쪽으로 진입하려면 신호등이 있는 사거리를 지난 직후에 비보호 좌회전을 해야 했다(그림 2 참조). 즉 맞은 편에서 오는 차량이 가던 길 멈추고 양보하지 않으면 내가 진입할 수 없을뿐더러, 내 뒤에 따라오던 차들까지 밀리는 상황이 된다. 좌회전 깜빡이를 넣고 잠시 기다리면 (이때 내 뒤에 서 있던 차들이 경적을 울리거나 상향등을 켜면서 독촉하는 경우는 한번도 겪지 못했다) 반대편에서 오던 차들이 대부분 멈춰 서서 양보를 해주고는 했다. 처음에는 직진하는 도로에서 좌회전하려는 차를 위해 가던 길 멈추고 기다려 주는 프랑스 운전자들의 양보심에 감탄했는데, 알고 보니 내게 양보해 주는 운전자들은 대부분 내가 방금 통과해 온 교차로의 신호등을 보고 있었다. 즉 신호등이 파란불이면 양보를 하지 않고 서둘러 교차로를 통과하되, 빨간불이면 어차피 양보하지 않아도 신호 대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이왕이면 양보해 주는 것이다. 즉 이들 프랑스 운전자는 신호 체계를 두어 단계 앞질러 생각하는 합리적인 판단의 결과에 따라 양보를 한다.

물론 이러한 선순환의 교통 문화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진 않을 것이다. 우선 운전자들이 교통 체계를 신뢰해야 한다. 즉 규칙을 무시하기보다는 따라야 더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리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또한 내가 딱히 손해볼 것이 없는 양보를 해줌으로써 상대방 운전자가 더 빨리 갈 수 있고, 나아가 전체 교통 상황이 원활해져 결국은 나도 효율적으로 목적지에 도달할 것이라는 이해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교통 상황을 내다볼 수 있는 지능적이고 합리적인 운전 습관이 교육되고, 면허 취득의 자격 요건으로 삼아야 한다. 교통 체계를 책임지는 공무원들이 상황에 따라 가장 효율적인 시스템을 설계하고 끊임없이 개선해 나가기 위해 노력해야 함도 물론이다. 우리나라의 도로에서도 이 같은 선순환의 교통 문화를 이루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고민해 보아야 할 시점이 아닐까 한다.

▶필자 곽원철

[다른 삶]한국 운전자들이여, 프랑스인처럼 ‘정지선을 넘지마오’


강원도에서 나고 자랐다. 서울에서 12년 남짓 직장 생활을 하다가 2009년 프랑스로 건너갔고, 우여곡절 끝에 프랑스 대기업의 그룹 전략개발실에서 근무하게 되어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 현재는 알프스 자락에 걸친 남프랑스의 산악도시 그르노블에서 아내와 갓 태어난 딸 레나와 함께 살면서 파리를 오가는 생활을 하고 있다. 살다 보니 어느 순간 ‘뭔가 남들과 다르게 하는 것’이 인생의 모토가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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