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부, '친일의 그림자’ 운보 그림 떼어냈다

2018.03.17 11:30 입력 2018.03.17 13:04 수정
박성진 기자

서울 용산 국방부 청사 현관에 걸려 있던 운보 김기창 화백(1913~2001)의 작품 ‘적영(敵影)’이 지난 16일 떼어졌다. 적영은 한자로 ‘적의 그림자’라는 뜻이다. 이 작품은 크기가 가로 2m, 세로 3m 정도로 한국군 부대의 베트남 파병 이후 가장 치열한 전투였던 베트남 638고지 전투, 일명 ‘안케 고개’ 전투를 묘사한 작품이다.

일본군 찬양한 ‘적진육박’(왼쪽)과 맹호부대원 그린 ‘적영’(오른쪽)

일본군 찬양한 ‘적진육박’(왼쪽)과 맹호부대원 그린 ‘적영’(오른쪽)

■일본군 찬양한 ‘적진육박’과 유사한 ‘적영’

이 그림은 밀림을 뚫고 포복하면서 전진하는 맹호부대 장병들을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군의 정통성 훼손 논란까지 제기되는 등 10년 넘게 군 안팎에서 철거 주장이 제기된 작품이다. 운보의 대표적인 친일 작품으로 분류되는 ‘적진육박’과 너무나 유사한 탓이다. 그러다보니 작품에 나오는 전투원이 일본 군국주의 피가 흐르는 군인에게 국군 군복만 입혀 놓은 모습으로, 일제 군국주의 잔재를 털어내지 못한 한군군의 현주소를 비추고 있다는 비판까지 나왔다.

‘적진육박’은 운보가 일제강점기 당시 남양군도에서 적진을 향하고 있는 일본군을 묘사하면서 일제 군국주의를 찬양한 작품이다. 대검을 소총에 끼운 채 적진의 미군들을 향해 접근하고 있는 일본군의 육박전을 묘사한 그림이다. 작품에서 착검을 한 일본 황군의 모습을 보면 호전성이 맹수의 표범을 방불케 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과거 친일행적에 대한 반성과 고민 없이 태평양전쟁 당시 미군을 물리치는 일본군을 묘사한 작품을 한국군의 베트남전 그림으로 그대로 베끼다시피 한 것은 작가의 몰역사성을 드러낸 것”이라고 비판해 왔다.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적진육박은 일제 군국주의를 찬양하고 소위 ‘황국신민’의 영광을 고취하기 위해 조선총독부의 후원을 받아 경성일보사가 1944년 3월부터 7개월간 서울에서 연 ‘결전’ 미술전람회에 출품된 작품이다. 이 그림은 전람회에서 ‘조선군 보도부장상’을 받았다. 또 ‘소국민’이라는 어린이 잡지에 사진으로 실렸으나 원화의 행방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운보는 1972년 6월 14일부터 7월 4일까지 베트남을 방문한 후 월남전쟁기록화전에 ‘적영’을 출품했다. 그리고 당시 국무위원들이 이 그림을 구입해 국방부에 기증해 국방부 현관에 걸리게 됐다.

그러나 광복군 정통성을 이어받았다는 국군의 정체성과도 관계가 있기 때문에 ‘적영’ 그림은 국방부에서 즉시 철거돼야 마땅하다는 의견이 잇따랐다.

이 작품은 운보의 친일논란과 별개로 역사의 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한 그림으로도 알려져 있다. 하나회 출신 한 예비역 장성의 증언에 따르면 1979년 12·12사태 당시 국방부를 습격한 쿠데타 세력이 쏜 총알이 그림 속 국군 병사의 눈알을 관통해 복원작업을 거쳤다고 한다. 운보 작품은 국방부 구관에 있다가 청사를 신축하면서 신청사 현관으로 옮겨 왔다. 국방부 구관에는 지금도 당시 총알의 흔적이 일부 남아 있다. 그러나 그림을 보수했다는 구체적인 근거 서류는 남아 있지 않다.

한국과 베트남이 수교한 이후 베트남 국방장관이 첫 방한했을 당시 국방부는 이 그림을 놓고 고민했다. 혹시라도 베트남 국방장관이 이 그림에 관심을 가지면 어떡하나 하는 고민이었다. 그림을 아예 치우기에는 부담스러웠던 국방부가 짜낸 아이디어는 작품의 배경을 설명한 ‘제목 동판’을 눈에 잘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군은 사포질로 운보 작품의 제목을 설명하는 동판을 문질러 버려 동판 위에 새겨진 작품 설명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읽기가 어려웠다.

적영은 일단 국방부 일반 창고에 보관됐다. 민족문제연구소는 10년 전부터 이 그림을 떼어내 연구소측에 기중해 줄것을 줄기자게 요구해왔다. 친일 작가들에 대한 연구용으로 사용하겠다는 이유에서다.

박항섭 화백의 작품 ‘대동강 철교를 건너는 평양 피난민’과 ‘대동강 철교를 건너는 평양 피난민’ 확대장면.

박항섭 화백의 작품 ‘대동강 철교를 건너는 평양 피난민’과 ‘대동강 철교를 건너는 평양 피난민’ 확대장면.

■총알세례 받은 ‘대동강 철교를 건너는 평양 피난민’

운보 그림뿐만 아니라 다른 그림도 12·12 쿠데타 당시 총탄 세례를 받았다. 게다가 운보 그림은 1발밖에 맞지 않았지만 다른 그림은 상당히 많은 총알 세례를 받았고, 마찬가지로 복원작업을 거쳤다. 그 그림이 바로 박항섭 화백의 작품 ‘대동강 철교를 건너는 평양 피난민’이다.

12·12 당시 국방부에서 벌어진 총격전은 구관 청사 엘리베이터 근처에서 가장 치열했는데 이 작품이 바로 그곳에 걸려 있던 탓에 총알을 많이 맞았다.

박 화백이 1967년 6월에 그렸다는 이 작품은 1·4후퇴 당시 가족을 북에 둔 채 본인만 남하한 데 대한 죄책감을 표출한 그림이다. 그림 옆에 붙어 있는 작품 설명에도 작가의 그리움과 속죄의 눈빛이 담겨 있다고 적혀 있다.

이 그림은 족히 200호는 넘는다. 관제엽서 한 장이 1호라는 것을 감안하면, 가로 길이보다 상대적으로 짧은 이 작품의 세로 길이가 성인 남자의 키보다 길다.

신청사에 있던 운보 그림이 유리로 보호됐던 반면 ‘대동강 철교를 건너는 평양 피난민들’은 작품의 표면이 그대로 외부에 노출돼 일부는 색깔이 변하고 일부는 물감이 벗겨지고 있는 상태다. 미술계에서 보면 통탄할 일이다.

화가 박항섭(1923~1979)은 황해도 장연 출신으로 한국 근현대 서양화 1세대 작가이다. 도쿄 가와바타화학교를 1943년 졸업했고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과 중앙미술대전 운영위원을 지냈다. 그는 인간의 내면을 읽어내는 깊이 등이 돋보이는 추상화로 한국 미술사에 이름을 올린 작가라고 한다. 그에게는 고향이란 늘 그리운 곳이요, 예술적 모티브였다는 게 미술계의 평가다.

■새삼 관심끄는 국방부 콜렉션

국방부에는 천경자 화백의 1972년도 작품인 ‘꽃과 병사와 포성’도 있다. 이 외에도 유명 화가의 작품들이 꽤 많다. 과거 유명 화가들의 군을 묘사한 작품을 국무위원들 차원에서 구입해 전달했거나, 유력 인사들이 소장하고 있던 작품을 기증한 것들이다. 그러나 일부 대작을 제외하고는 보관 상태가 상당히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군 소유 미술 작품은 약 3400점으로 알려져 있다.

공군은 소장하고 있는 대표적인 미술작품은 베트남전에서 F-4 팬텀기 편대가 공대지 작전을 하는 모습을 묘사한 운보의 1972년 작품 ‘초연’이다. 이 그림은 김종필 전 총리가 1972년 공군 11전투비행단에 기증한 작품으로 추정 가격이 4억~5억원 정도로 알려졌다.

공군도 상당한 세월을 거치면서 상태가 나빠진 이 작품을 국립현대미술관에 의뢰해 6개월간의 복원작업을 거쳤고 지금은 공군사관학교 본관에 전시하고 있다. 이 그림은 운보의 그림이지만 친일의 흔적과는 관련이 없어 철거 주장은 한번도 나오지 않았다.

이처럼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군에는 대작 미술품이 꽤 많다. 컬렉션이 그림이나 조각과 같은 미술 수집품의 의미라면 ‘국방부 컬렉션’으로 부를 만하다. 그런만큼 국방부가 소장하고 있는 작품들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와 전시가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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