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호의 세계읽기

‘주목 못 받은 아픔’에 위로·연대 선사 ‘11세 소녀의 워싱턴 연설’

입력 : 2018.03.30 17:07:01 수정 : 2018.03.30 17:2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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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의 세계읽기

김진호

경향신문 국제전문기자

<b>“총기 희생 흑인여성 잊혀지지 않게, 쓰여지지 않은 책을 함께 쓰자”</b> 초등학교 5학년생인 내오미 웨들러가 지난 24일 미국 워싱턴 시내 내셔널몰에서 총기규제 강화를 요구하며 열린 ‘우리 생명을 위한 행진’ 집회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워싱턴 | AP연합뉴스

“총기 희생 흑인여성 잊혀지지 않게, 쓰여지지 않은 책을 함께 쓰자” 초등학교 5학년생인 내오미 웨들러가 지난 24일 미국 워싱턴 시내 내셔널몰에서 총기규제 강화를 요구하며 열린 ‘우리 생명을 위한 행진’ 집회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워싱턴 | AP연합뉴스

“나는 (미국) 전국 단위 신문의 프런트페이지(1면)를 장식하지 못하고, 저녁(방송)뉴스에서 초점도 받지 못하는 흑인소녀들을 대변하기 위해 여기에 왔다. 총기폭력의 희생자인 그들, 생기가 넘치고 잠재력으로 가득한 아름다운 소녀들로서가 아니라 단순한 통계로 소개되는 그들을 대변하기 위해 왔다. 너무도 오랫동안 총기에 희생된 흑인소녀와 여성들은 숫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다시는 그렇게 돼선 안된다고, 모두가 그녀들의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기 위해 여기에 왔다.”

많은 이들이 미국의 희망을 확인한 ‘3분30초’였다고 한다. 간단없이 되풀이되는 총기난사 사건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더욱 기승을 부리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음산한 인종주의. 짧지만 강한 인상을 남긴 11살 소녀의 연설은 미국을 넘어 세계인의 마음을 흔들었다. 지난 24일(현지시간) 워싱턴에서 총기규제 강화를 요구하며 열린 ‘우리의 생명을 위한 행진(The March for Our Lives)’에서 주목받은 연설 중의 하나는 내오미 웨들러가 한 것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생인 내오미의 연설은 총기문제만 다룬 것이 아니었다. 총구 앞에서조차 불평등한 미국 인종주의의 불편한 진실을 들춰내 보였다. 백인보다는 흑인이, 남성보다는 여성이 더 총기사고의 희생자가 된다. 여기에 흑인과 여성은 최악의 조합임을 일깨운 것이다. 해서 내오미의 워싱턴 연설이 이어진다.

“이 자리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토니 모리슨의 말을 인용하겠다. ‘읽고 싶은 데 아직 쓰이지 않은 책이 있으면, 당신이 써야 한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또 내 목소리를 듣는 모두에게 부탁한다. 나와 함께 아직 아무도 말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말해달라고. 이 세계를 위해 그 이야기를 나와 함께 쓰자고 부탁한다. 이 (흑인) 소녀와 여성들이 결코 잊히지 않도록….”

워싱턴 인근 버지니아주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는 내오미가 지난 2월14일 발생한 플로리다주 파크랜드 총기사건에 대해 처음 들은 것은 엄마로부터였다. 엄마는 파크랜드에서 희생된 17명 중에 자신의 고교동창 딸이 포함돼 있다고 전해주었다. 객관적인 뉴스가 사적 이야기로 들렸다. 파크랜드 참사 한달을 맞아 중·고등학교 언니, 오빠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추념시위를 벌이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 초등학생들은 왜 그런 행사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오미는 같은 반 친구와 함께 자신들의 조지 메이슨 초등학교에서 18분 동안 수업거부 시위를 벌였다. 파크랜드의 희생자 17명을 기리는 17분에 1분을 더한 이유가 범상치 않다. 파크랜드 사건 3주 뒤인 3월7일 앨라배마주에서 역시 총격으로 숨진 17세 흑인소녀 커틀린 애링턴을 추모하기 위한 1분이었다. 파크랜드 사건이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 알려진 반면에 애링턴의 사망은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틈새의 진실을 내오미는 간파했다. 고교졸업반이던 애링턴은 이미 대학입학허가를 받고 간호사의 꿈을 꾸고 있었다.

초등학교에서 파크랜드 추모 집회를 조직한 것은 내오미의 이름을 처음 알리는 계기가 됐다. 내오미는 보도자료까지 만들어 집회 소식을 배포했다. 워싱턴 집회 전 민주당의 돈 베이어(버지니아)와 테드 도이치(플로리다) 하원의원이 파크랜드 희생자 부모들과 함께 버지니아의 한 고교에서 연 타운홀 모임에도 초청받았다. 파크랜드 사건의 여파로 800여명이 참가한 모임이었다. 미국총기협회(NRA)의 막강한 로비에 맞서 총기규제를 강화할 것을 촉구한 타운홀 미팅의 주인공은 내오미와 같은 초등학생과 중학생들이었다. 내오미는 학교 시위를 추진하는 과정에 “(집회를 여는) 잔디밭이 안전하지 않을 수 있다”며 제지하려던 학교 선생님들에게 “그러면 교실에서는 안전하다고 자신할 수 있나요. 우리가 중학교,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교실에서 총에 맞을 걱정을 안 했으면 좋겠어요”라면서 설득했다고 소개했다.

지난 24일 미국 워싱턴 시내 펜실베이니아 거리에서 지난 2월 플로리다주 파크랜드에서 발생한 총기난사 사건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총기규제 강화를 촉구하기 위한 ‘우리 생명을 위한 행진’ 집회 참가자들이 행진하고 있다. 미국 전역 800여곳과 전세계 곳곳에서 지지시위가 열렸다.   워싱턴 | EPA연합뉴스

지난 24일 미국 워싱턴 시내 펜실베이니아 거리에서 지난 2월 플로리다주 파크랜드에서 발생한 총기난사 사건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총기규제 강화를 촉구하기 위한 ‘우리 생명을 위한 행진’ 집회 참가자들이 행진하고 있다. 미국 전역 800여곳과 전세계 곳곳에서 지지시위가 열렸다. 워싱턴 | EPA연합뉴스

워싱턴 연설을 준비하면서 흑인 여성 문제를 언급하는 게 총기규제라는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을까 걱정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총기사건에 대한 사회적 반응에 인종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오히려 광범위한 공감을 끌어냈다. 어린 ‘학생 활동가(Student Activist)’의 탄생은 가정 분위기에서 나왔다. 내오미는 에티오피아에서 태어났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처럼 어머니는 백인, 아버지는 흑인이다. 다니는 초등학교는 10명 중 6명 정도가 백인이고 히스패닉이 3분의 1이라고 한다. 흑인은 6% 정도다. 어머니는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내오미의 문제의식이 가족과 함께 뉴스를 시청하면서 생긴 것 같다고 전했다. 내오미는 “왜 뉴스에서 흑인은 흑인이라고 확인하면서 백인은 백인이라고 확인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했었다고 한다. 흑인인 아버지가 혹시 공격을 당하지 않겠느냐는 걱정도 했다고 한다. 왜 흑인소녀의 죽음은 백인소녀의 죽음과 같은 분노를 자아내지도, 언론의 주목을 받지도 않는지에 대한 실망을 갖게 됐다. 그의 짧은 연설은 평소 생각을 그대로 내놓았을 뿐이다.

실제로 미국 질병예방통제센터의 지난해 연구 결과 흑인과 인디언 여성은 피살될 가능성이 다른 인종 여성보다 2배 이상이었으며, 특히 흑인여성은 다른 어떤 인종의 여성보다 총기로 피살될 확률이 높았다. 내오미는 “누군가 검은 피부색을 가진 사람은 백인소녀나 남자들에 비해 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사람들의 잠재의식에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11살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인상적이었던 내오미의 연설은 세계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내오미는 집회를 지지한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와 조지 클루니 등 유명인들뿐 아니라 각국 언론의 찬사를 받고 있다. 영국 가디언은 “세계의 평균적인 지도자들보다 더 침착하고 묵직한 그의 연설이 지구촌 차원의 운동을 자극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불과 나흘이 지난 28일 현재 한 사이트(NowThisHer)에서만 내오미의 연설 동영상은 1900만회 이상 조회됐다. 같은 날 로스앤젤레스에서 ‘우리 생명을 위한 행진’ 시위에 참가했던 허핑턴포스트의 객원기자 S.T.홀로웨이는 자매를 총기폭력으로 잃은 흑인여성이다. 그는 거리행진 내내 복잡한 감정과 함께 깊은 아픔을 느꼈다. 집에 돌아와 내오미의 연설을 보고 나서야 마음껏 눈물을 쏟아냈다. 그는 내오미에 감사하는 공개편지를 통해 수없이 연설 동영상을 돌려보았고, 그때마다 울었다면서 유탄에 맞아 숨진 자매의 죽음이 어느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했던 아픔을 내오미의 연설을 통해서 위로받았음에 감사했다.

이날 워싱턴의 ‘우리 생명을 위한 행진’ 시위에는 80만명이 모였다. 1970년대 베트남전 반전 시위 이후 최대 규모였다고 한다. 미국 내 800여곳에서 같은 날 동시다발 시위가 열렸으며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 호주 등 전 세계 곳곳에서 지지시위가 있었다. 파크랜드 마조리 스톤맨 더글러스 고교 총기참사의 생존 학생들이 주도하고 있다. 내오미 외에도 많은 학생 운동가들의 연설이 심금을 울렸다. 생존학생 엠마 곤살레스(18)와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손녀 욜란다 르네 킹(9)도 발언대에 섰다. 좀처럼 전국적으로 확산되지 않는 미국 시위문화에서 이번엔 예외가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일각에선 의회에 총기규제 강화 압력을 넣으면서 올 11월 중간선거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본다. 미국에선 4명 이상이 희생된 대규모 총기사건이 1967년부터 지난해 말까지 146건 발생했다. 평균적으로 8명 정도 숨진다. 개인적으로는 범인 조승희를 포함해 33명이 숨진 2007년 버지니아공대 총격사건 현장 취재의 기억을 잊지 못한다. 2008년 대선에서 당선된 사상 첫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도 총기규제를 다짐했지만, 한동안 추모 분위기에 젖었다가 슬그머니 원상으로 돌아갔던 종래의 패턴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많은 미국인들은 내오미에게서 마틴 루서 킹 목사나 오바마 전 대통령과 같은 지도자의 어린 모습을 발견하는 것 같다. 하지만 킹 목사도, 오바마도 해내지 못했듯이 미국의 인종주의와 총기문화가 바뀌기는 여전히 쉽지 않은 것 같다. 또 한 세기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내오미의 걱정과 우려는 파크랜드 총기사건에서도 여실히 증명됐다. 범인인 니컬러스 제이콥 크루즈(19)가 현장에 들고 갔던 탄창에서 나치의 스와스티카 문장이 새겨진 것이 발견됐다. 배낭에는 ‘나는 니그로를 증오한다’는 말이 써 있었다. “동성애자와 멕시코인을 죽이겠다. 흑인은 그냥 흑인이니까 죽이고 싶다”는 말을 해왔다고 전해진다. 워싱턴 집회에서 6분20초의 침묵으로 미국을 얼어붙게 했던 곤살레스는 온·오프라인에서 백인 우월주의자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다. NRA 종신회원이자 공화당 정치인으로부터 ‘스킨헤드 레즈비언’이라는 욕설을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오미나 곤살레스와 같이 미국 사회의 모순에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는 어린 학생들에게서 미국의 희망을 발견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내오미는 아직 소셜미디어를 멀리하고 있어 자신이 유명인사가 됐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다만 워싱턴 집회 뒤 돌아온 집 문 앞에 친구가 붙여놓은 손편지는 기억한다. “잘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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