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탱고와 독서가 공존?…매혹적인 불협화음으로 가득한 도시

2018.04.11 21:11 입력 2018.04.11 21:14 수정
정여울 작가·문학평론가

부에노스아이레스 (상)

부에노스아이레스 카를로스 가르델 극장에서 댄서들이 탱고 공연을 하고 있다. 탱고는 19세기 말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생겨났다. ⓒ이승원

부에노스아이레스 카를로스 가르델 극장에서 댄서들이 탱고 공연을 하고 있다. 탱고는 19세기 말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생겨났다. ⓒ이승원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매혹적인 불협화음으로 가득한 도시다. 탱고의 정열적인 춤과 리듬이 온 도시를 감싸고 있는 듯 활기가 넘쳐 흐르면서도, 서점이 500개가 넘을 정도로 차분하고 정적인 독서 문화가 살아 숨 쉬는 명실상부한 ‘책의 도시’다. ‘아사도’라는 아르헨티나식 바비큐가 워낙 대중화되어 있어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람들이 고기를 먹지 않는 날은 손에 꼽을 정도이지만, 이 도시 사람들은 육식에 어울리는 공격성보다는 느긋하고 여유로우며 유유자적한 분위기를 한껏 뿜어낸다. 역사상 최초의 아메리카 대륙 출신 교황이자 최초의 남반구 국가 출신 교황인 프란치스코 교황을 배출한 기념비적인 도시이기도 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랑받는 혁명가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가 청년기를 보낸 꿈과 열정의 도시이기도 하다. 언뜻 보면 잘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한데 모여서 오히려 더욱 아름답고 매혹적인 불협화음을 만들어 내는 곳, 그곳이 내게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싱그러운 첫인상이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스스로의 국민성을 풍자하는 농담 중에 이런 일화가 있다. 지구상 다양한 나라의 대표들이 어느 날 한자리에 모여 하느님을 찾아갔다. 그들은 신에게 볼멘소리로 항의했다. 신은 아르헨티나에만 너무 많은 사랑을 베풀어 주신 게 아니냐고. 아르헨티나엔 석유도 펑펑 나고, 땅도 기름져서 곡식과 가축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국토도 넓고 공기도 좋은데, 왜 다른 나라엔 자원도 부족하고, 땅도 황폐하며, 농작물도 잘 자라지 않느냐고 말이다. 인간들의 불평을 가만히 듣고 있던 하느님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시며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그 대신 나는 그 풍요로운 땅에 게으른 아르헨티노를 주지 않았느냐?” 완벽한 자연환경을 갖춘 아르헨티나에 게으르고 낙천적인 아르헨티노를 살게 했으니, 척박한 환경엔 부지런한 백성을 주고 축복받은 환경엔 유유자적한 백성을 준 하느님의 선택이 어쩌면 꽤 공평한 것이 아닐까. 아르헨티나 사람들 스스로도 인정할 정도의 대책 없는 느긋함과 여유만만함을 유머러스하게 보여 주는 이야기다.

[정여울의 라틴아메리카 기행](2)탱고와 독서가 공존?…매혹적인 불협화음으로 가득한 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거리를 한 시간만 어슬렁어슬렁 걸어 보면 이 농담의 의미를 대번에 이해할 수 있다. 남미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고 GDP도 상파울루 다음으로 높은 활기 넘치는 도시지만, 누구도 서둘지 않고 누구도 뛰지 않는다. 세상이 흘러가는 속도에 굳이 나 자신의 삶을 끼워 맞추려 안간힘을 쓰지 않는 이들이 바로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람들이다.

이렇게 여유만만한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람들이 딱 한 번 집단적으로 부지런을 떤 적이 있다. 바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상징이 된, 거대한 오벨리스크를 조성할 때였다. 아르헨티나 독립선언을 기념하여 만든 ‘7월9일 거리’는 폭이 무려 144m로 세계에서 가장 넓은 길로도 알려졌는데, 바로 이 길의 중심에 부에노스아이레스시 출범 400주년을 기념하는 오벨리스크가 있다. 주변 경관과 어울리지 않게 너무 거대하고 부담스러운 이 건축물에 대한 여론이 워낙 좋지 않아, 이토록 ‘슬로 라이프’를 생활화한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람들이 겨우 31일 만에 그야말로 뚝딱 만들어 낸 건축물이 바로 이 오벨리스크다.

오페라극장을 개조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엘 아테네오 서점. 이 서점은 책이라는 오페라를 공연하는 완벽한 무대처럼 보인다. ⓒ이승원

오페라극장을 개조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엘 아테네오 서점. 이 서점은 책이라는 오페라를 공연하는 완벽한 무대처럼 보인다. ⓒ이승원

많은 사람들은 이 거대한 오벨리스크를 이 도시의 상징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여행이 끝난 뒤 내 마음속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상징이 된 곳은 엘 아테네오 서점이다. 오페라극장을 개조한 이 아름다운 서점은 과연 ‘책이라는 오페라’를 매일 공연하는 완벽한 무대처럼 다가왔다. 과연 엘 아테네오 서점이 비싼 임대료를 감당할 수 있을까 걱정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얼마 전 다행히 서점은 무사히 계약을 갱신했다고 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전자책이나 오디오북보다는 아직도 종이책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절대다수라고 한다. 이렇게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나는 스페인어도 모르고 아르헨티나에 대해 아는 것도 별로 없지만 포근한 동질감을 느꼈다.

거리의 서점들 하나하나에 따스한 시선을 던지며 천천히 걷고 있는데 문득 노숙인 한 명이 보였다. 그런데 그는 구걸을 하고 있지도 않고 거적을 덮고 있지도 않았다. 노숙인은 오후의 따스한 햇살을 등에 짊어진 채 너무도 평화로운 표정으로 책을 읽고 있었다. 그가 책을 읽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는 가련하게 보이지도 않고 나약해 보이지도 않았다. 아직 삶을 바꿀 힘이 남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곤궁함 속에서도 책이라는 이름의 작은 빛을 등대 삼아 고단한 오늘이라는 늪의 시간을 무사히 건너고 있었다. 문득 이런 생각에 잠기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내 마음속에서 책을 읽는다는 일이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삶’과 동의어였음을 깨달았다. 아직 책을 읽을 수 있는 마음의 여백이 남아 있다면 삶이 결코 그를 짓누르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책을 읽을 수 있다면, 삶은 결코 당신을 공격하지 못할 것이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 환한 희망의 햇살이 번져 나오는 것 같았다. 내 안에서 누군가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당신이 책을 읽을 수 있다면 당신은 아직 괜찮은 것입니다. 당신이 책을 읽을 수 있다면 당신에겐 삶을 바꿀 기회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마치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집처럼 정성스레 꾸민 공동묘지 레콜레타는 무려 13명의 역대 대통령, 부에노스아이레스 출신인 5명의 노벨상 수상자, 그리고 에바 페론, 애칭 ‘에비타’가 묻혀 있는 곳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에비타의 얼굴을 외벽에 형상화한 커다란 건물이 있을 정도로 이 도시 사람들의 에비타에 대한 그리움은 짙다. 전 대통령 부인을 이토록 오랫동안 사랑하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감수성에는 뭔가 유별난 집착이 깃들어 있다. 에비타는 유례없는 포퓰리즘의 주인공이라는 점과 아르헨티나의 고질적 재정 악화를 초래했다는 점에서 비판받지만,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그녀에 대한 사랑은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빈민가 출신으로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 끝에 대통령 부인이 되고 부통령 후보에까지 출마했던 에비타는 단지 개천의 용이 아니라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처음으로 완전히 이해해 주는 정치인이었던 것이다.

에비타는 정치인으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아르헨티나 민중을 사랑했다. 그것은 경제나 정치 문제를 넘어선 정서와 감수성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노동자의 성녀로 불리는 에비타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대한 애정을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나는 이 커다란 도시의 모든 마을 곳곳을 다 걸어 보았다. 그리하여 나는 내 나라 내 땅 안에서 뛰고 있는 모든 심장의 모든 생각을 다 꿰뚫어 보고 있다.” 엄청난 자신감과 뜨거운 애정이 듬뿍 담긴 이 말은 에비타의 아르헨티나에 대한 열정을 잘 보여 주는 문장이기도 하다. 그녀는 쉴 새 없이 노동자와 빈민들을 위한 주택을 조성했고, 도로를 냈으며, 갈 곳을 잃은 청소년들을 위해 체육관을 짓기도 했다. 빈민촌을 방문하여 그곳의 실상을 알고 난 뒤, 충격을 감추지 못하고 즉시 이런 연설을 했다. “지금 이 마을 사람들은 즉시 짐을 꾸리세요. 꼭 필요한 짐만 챙겨서 당장 이 마을을 떠납시다.” 그녀는 그 즉시 주민들을 살 만한 곳으로 이동시켰고, 마을이 텅 비자마자 그 빈민촌을 불태웠다고 한다. 마치 다시는 이런 빈민촌이 지상에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는 듯, 엄청난 결단력이 느껴지는 과감한 선택이었다. 사람들은 에비타의 이런 과단성과 민중에 대한 사랑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을 것이다. 아르헨티나가 이민자에게도 무상 교육과 무상 의료의 혜택을 부여하는 복지국가로 발돋움한 것에는 에비타의 공헌이 컸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낙천적이고 느긋하다.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다. 남미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도시 중 하나이지만 누구도 뛰지 않을 정도로 여유만만하다. ⓒ이승원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낙천적이고 느긋하다.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다. 남미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도시 중 하나이지만 누구도 뛰지 않을 정도로 여유만만하다. ⓒ이승원

나는 저녁에 탱고 공연을 보고 싶었지만 우선 대낮에 걸으면 더욱 흥성흥성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전형적인 저잣거리, 산텔모에 가 보고 싶었다. “산텔모가 어디지요?” 대여섯 번은 물어보고 헤매면서 아름다운 풍경을 많이 만났다. 이렇게 길을 잃고 헤매면서 우연히 마주치는 풍경이 여행의 진정한 묘미다. 현지인들과 짧게나마 대화를 해 보면서 그 도시의 그 분위기, 그 도시인들의 심성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람들은 하나같이 친절했고, 잘 모르더라도 뭐든 하나라도 자신이 아는 것을 더 알려 주려 했다. 산텔모의 커피타운에서 세계바리스타대회에서 1위를 했다는 향기로운 커피를 마시면서 나는 ‘길을 잃어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생각했다.

아르헨티나의 작가들을 조사하다가 <침대에서 바라본 아르헨티나>라는 멋진 책을 펴낸 작가 루이사 발렌수엘라를 알게 되었다. 군부독재의 폭력적인 검열과 협박으로부터 도망쳐 미국으로 망명했던 이 작가는 <침대에서 본 국가현실>이란 소설에 이런 문장을 썼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남들이 산양자리나 사자자리를 타고나는 것처럼 나는 질문자리를 타고났다.’ 이 문장을 읽으며 그야말로 까르륵 웃었다. 찔렸다. 나도 그런 사람이기에, 유쾌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나는 멈출 줄 모르는 질문자리를 타고났고, 역마살과 ‘길치 유전자’가 한 몸 안에 들어 있는 기이한 불협화음을 견디고 있다. 그 불협화음을 견디게 해 주는 내면의 힘은 글쓰기를 통해 내 삶이 매번 조금씩 더 나아지고 있다는 믿음일 것이다. 어휴, 내가 이래서 여행을 떠나지 않을 수 없다. 일탈과 모험을 두려워하는 내가 유일하게 ‘올인’할 수 있는 공인된 도전이 바로 여행이니까. 스케줄이 없는 날만 되면 ‘이불 밖은 위험해’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종일 누워만 있고 싶은 날도 있지만,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도저히 맛볼 수 없는 타인의 삶, 세상의 눈부심, 인생의 아름다움을 가장 강렬한 오감의 체험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 바로 여행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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