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엔 벚꽃만? ‘서브 주인공’ 봄꽃도 있어요···수선화 필 무렵, 서산 유기방가옥

2024.03.30 09:00

서산 해미읍성의 홍매화(왼쪽)와 유기방가옥의 수선화. 이윤정 기자

서산 해미읍성의 홍매화(왼쪽)와 유기방가옥의 수선화. 이윤정 기자

봄꽃은 인생을 닮았다. 혹독한 겨울을 지나지 않고는 꽃잎을 피워낼 수 없다. 그렇다고 누구나 주인공이 되는 것도 아니다. 짧디짧은 봄꽃 무대 주인공은 단연 ‘벚꽃’이다. 연분홍 꽃잎이 하늘을 수놓으며 봄바람에 나풀거리면 상춘객의 마음은 속절없이 간질거린다.

하지만 봄철 우리 땅에 피어나는 건 벚꽃만이 아니다. 봄꽃 종류만 60가지가 넘는다. 때로는 드라마 속 세컨드 주인공이 더 큰 인기를 누리듯이 올해는 봄나들이 감초 역할 꽃을 만나보는 건 어떨까. 눈 속에서도 꽃을 틔워 ‘설중화’라는 별명을 가진 수선화를 담으러 서산의 한 고택으로 향했다.

조선후기 양반가옥 고스란히…토담 안팎엔 수선화 만발

서산 유기방가옥 뒷산에 수선화가 피어 있다. 이윤정 기자

서산 유기방가옥 뒷산에 수선화가 피어 있다. 이윤정 기자

수도권에서 서산에 다가갈수록 산은 야트막해지고 들판은 너르게 펼쳐진다. 가야산을 둘러싼 서산, 예산, 당진, 홍성 등 ‘내포(內浦)’는 예부터 살기 좋은 땅으로 통했다. 땅을 끌어안은 바다와 비옥한 평야 때문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충청도에서는 내포가 가장 좋은 곳”이라고 했다.

서산 유기방가옥을 드론으로 담았다. 마당을 가운데 둔 ‘ㅁ자형’ 구조로, 토담이 집을 둥글게 감싸고 있다. 이윤정 기자

서산 유기방가옥을 드론으로 담았다. 마당을 가운데 둔 ‘ㅁ자형’ 구조로, 토담이 집을 둥글게 감싸고 있다. 이윤정 기자

고옥한 서산에는 세월을 고스란히 품은 고택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대를 이어가는 사대부가 많았던 까닭이다. 그중 운산면 여미리에 있는 유기방가옥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입소문을 타며 명성을 얻었다. 봄마다 고택 안팎을 소담스럽게 수놓는 수선화 덕택이다. 한국관광공사 빅데이터 분석을 보면 지난해 서산 유기방가옥은 SNS에서 수선화 관련 명소 중 1위(19%)를 차지했다.

유기방 가옥 사랑채. 이윤정 기자

유기방 가옥 사랑채. 이윤정 기자

하지만 꽃 때문이 아니어도 100년이 더 된 고택의 문지방을 넘는 것은 흥미롭다. 아직도 사람이 사는 고택에서는 온기가 돌고 생기가 흐른다. 유기방가옥은 여미리 북서쪽 ‘큰말’ 마을의 산을 등진 명당자리에 있다. 1919년 서령 유씨 집안에서 지었고, 현재 후손인 유기방씨(76)가 고택에 살면서 관리하고 있다.

유기방가옥 주인인 유기방씨가 고택을 소개하고 있다. 이윤정 기자

유기방가옥 주인인 유기방씨가 고택을 소개하고 있다. 이윤정 기자

유씨는 “원래 400년 전 정종대왕 넷째 아들 후손이 살던 터인데 조부가 새롭게 집을 지었다”면서 “조부 집의 일꾼들이 사는 초가만 주변에 13채가 있었다”고 회상했다. 할아버지가 운산면과 주변 3개 면에서 많은 땅을 갖고 있던 큰 부자였다는 것이다. 그는 조부가 검소한 생활을 이어갔지만 주변에 늘 베푸는 삶을 살았다고 기억했다. 유씨는 “지나는 사람이 배가 고프다고 하면 먹을 걸 항상 내줬다”면서 “덕을 많이 쌓은 덕에 한국전쟁 통에도 집안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유기방 가옥 안채. 이윤정 기자

유기방 가옥 안채. 이윤정 기자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집은 조선후기 전통 양반가옥 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집 안쪽에는 유씨의 할머니가 생활하던 안채가 펼쳐진다. 부엌과 방, 대청, 건넌방으로 이어지는 ‘一자형’ 안채다. 벽에는 할머니부터 장남과 집안에 공을 세운 가족들의 사진이 걸렸다. 창밖으로는 뒷마당의 수선화와 장독대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창은 마치 살아 숨쉬는 액자처럼 사시사철 계절을 담아낸다.

유기방가옥 안채에서 방문객이 사진을 찍고 있다. 이윤정 기자

유기방가옥 안채에서 방문객이 사진을 찍고 있다. 이윤정 기자

안채 왼쪽은 일하는 사람들이 머물던 행랑채, 오른쪽에는 유씨의 할아버지가 머물던 사랑채가 있다. 이곳은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고종의 최측근인 궁내부 대신 이정문의 집 배경이 되기도 했다. 유기방가옥은 현재 마당을 가운데 둔 ‘ㅁ자형’ 구조인데, 여미헌이라는 현판이 걸린 한옥 건물만 1988년 새롭게 지은 것이다. 가족들이 살기 불편하지 않도록 겉은 한옥, 안은 현대식으로 설계했다. 집을 둥글게 둘러싼 토담은 고택을 아늑하게 감싼다. 봄이면 토담 안팎으로 수선화가 만개해 동화 같은 풍광을 자아낸다.

유기방가옥 사랑채. 이윤정 기자

유기방가옥 사랑채. 이윤정 기자

“서자라서 사람 취급도 못 받았는데···” 고택 지킨 사연

유기방가옥. 이윤정 기자

유기방가옥. 이윤정 기자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고택이 사람의 손때를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었던 연유는 무엇일까. 사실 유씨는 서령 유씨 집안의 장손이 아니다. 그는 “나는 서자라서 옛날에는 집안에서 사람 취급도 못 받았다”고 털어놨다. 집안의 제사가 있는 날이면 서자는 대청에 발도 들일 수 없었단다. 서자인 탓에 많이 배우지도 못했다고 했다.

유기방가옥 부엌. 이윤정 기자

유기방가옥 부엌. 이윤정 기자

하지만 세월이 흘러 장손은 서산을 떠나고, 고택을 지킬 이는 마땅치 않았다. 유씨는 “집을 소유한 당숙이 다른 후손들은 시간이 지나면 고택을 팔아치울 것 같았지만 나는 이 집을 지켜낼 것이라 생각했다”고 했다. 다만 그는 집을 공짜로 물려받은 것이 아니다. 30여년 전 빚을 내면서까지 집값을 치르고서야 고택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막상 와보니 손볼 곳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면서 집 안 구석구석을 고친 과정을 담은 앨범을 펼쳐 보였다.

유기방씨가 집 안 구석구석을 고친 과정을 담은 앨범을 펼쳐 보이고 있다. 이윤정 기자

유기방씨가 집 안 구석구석을 고친 과정을 담은 앨범을 펼쳐 보이고 있다. 이윤정 기자

수선화가 집 주변을 수놓게 된 것도 이때쯤이다. 고택의 뒷산엔 소나무가 우거졌고, 담장 바로 뒤로는 대나무숲이 펼쳐졌다. 하지만 대나무 뿌리가 토담을 파고들었고, 소나무를 괴사시켰다. 결국 유씨는 대나무숲을 모두정리하고 그 자리에 수선화를 심었다. 10년이 지나자 수선화는 집 안팎 1만여평에 자리를 잡고 꽃잎을 피웠다. 사람들은 수선화와 고택이 자아내는 풍경을 보러 가옥을 찾기 시작했다. 고택은 2005년 충남 민속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되며 ‘유기방가옥’으로 불렸다.

유기방가옥 뒷마당에 핀 수선화. 이윤정 기자

유기방가옥 뒷마당에 핀 수선화. 이윤정 기자

그러나 너무 많은 인파가 몰리면서 주차시설, 화장실 부족은 물론 불법 취사 등 골칫거리도 생겨났다. 결국 2012년부터 입장료를 받고 편의시설을 확충했고 관리인력도 늘렸다. 봄에는 수선화와 청벚꽃이, 여름부터 가을까지는 샤스타데이지, 노란 장미, 배롱나무 꽃, 코스모스가 고택 주변을 수놓는다. 겨울에는 뒷동산의 소나무에 눈꽃이 피어나 고택의 정취를 더한다.

유기방 가옥을 찾은 방문객들이 뒷마당에 핀 수선화 사진을 찍고 있다. 이윤정 기자

유기방 가옥을 찾은 방문객들이 뒷마당에 핀 수선화 사진을 찍고 있다. 이윤정 기자

지금은 직원들이 함께 고택을 가꾸고 있지만, 유씨는 하루도 쉴 수 없다. 고택 관리는 물론 집안 제사까지 모두 그의 몫이 됐기 때문이다. 유씨는 상처투성이인 손을 내밀어보이며 “뒷산 선조 묘소를 정비하고 일 년 내내 제사를 지내는 것까지 모두 내 일”이라면서 “산소가 거의 왕릉급”이라고 표현했다. 그럼에도 그는 고택에 대한 애정을 내비쳤다. 유씨는 “사람들이 와서 고택을 보는 게 정말 좋다”면서 “처음 집을 살 때부터 이 아름다운 집을 많은 사람이 와서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서자로 태어났지만 고택을 지키며 집안의 기둥이 된 유씨처럼 유기방가옥의 수선화는 봄의 무대에서 주인공 못지않은 존재감을 알리고 있었다.

유기방가옥 수선화. 이윤정 기자

유기방가옥 수선화. 이윤정 기자

☞알고 가세요

서산 마애여래삼존상. 이윤정 기자

서산 마애여래삼존상. 이윤정 기자

유기방가옥 근처엔 볼거리가 많다. 여미리에는 최근 예술가들이 자리를 잡으면서 ‘달빛예촌’이 형성됐다. 개성 있는 갤러리와 카페들이 곳곳에 있으니 함께 둘러보면 좋다. 또 운산면 용현리에는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마애여래삼존상’이 있다. 절벽에 새긴 삼존불상은 빛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 웃는 모습이 각기 다르게 보인다. 중앙에 여래입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보살입상, 왼쪽에는 반가사유상이 조각됐다.

서산 해미읍성. 이윤정 기자

서산 해미읍성. 이윤정 기자

‘서산1경’인 해미읍성도 서산 여행의 필수코스다. 조선 초 병영성으로 만들어진 해미읍성은 원형이 가장 완전하게 보존된 평성으로 평가받는다. 옥사, 민속가옥 등을 재현해놓았다.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을 매달아 고문한 회화나무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 때문에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찾았을 때 해미읍성을 방문하기도 했다.

서산 해미읍성 회화나무. 이윤정 기자

서산 해미읍성 회화나무. 이윤정 기자

유기방가옥 수선화 축제가 4월 말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오전 7시~오후 7시 운영하며 입장료는 어른 기준 8000원이다.

☞가는길

서해안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서산은 수도권과 더 가까워졌다. 하지만 서산과 수도권을 잇는 길은 평일에도 상습정체 구간이 많다. 고속버스를 타고 서산공용버스터미널에 내리면 바로 인근에 공유차를 빌릴 수 있는 쏘카존이 있다. 서산 시내에만 쏘카존이 10곳 정도 있고, 소형차 기준 4시간 대여료가 1만원대에서 시작해 비용부담도 적다. 서산을 비롯해 내포 지역을 모두 돌아보고 싶다면 KTX를 타고 천안아산역에서 내려서 쏘카를 대여해 여행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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