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계, 후졌다

2019.02.08 20:42 입력 2019.02.08 20:44 수정

지난달 26일 또 한 사람의 영화 노동자가 자신의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경찰 수사에 따르면 고인은 사망 전 일주일 동안 하루 평균 14시간 30분씩 주 73시간 33분을 일했다. 밤샘 작업으로 새벽에 퇴근하고 그날 아침에 또 출근하는 식이었다고 한다. 영화 및 드라마 산업에서의 장시간 노동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며, 그로 인해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는 비극도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의 홍태화 사무국장의 글을 보자. 2015년 고용노동부가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OECD 월평균(142.16시간)보다 영화는 169.74시간, 방송은 213.24시간 더 장시간 근로하고 있으며, 한국 월평균(171시간)보다 영화는 140.9시간, 방송은 184.4시간 더 장시간 근로하고 있다. 결국 영화 및 방송 노동자는 OECD 평균보다 장시간 근로를 하는 한국 일반노동자보다도 2배 더 장시간으로 일하고 있는 셈이다.” 이를 바로잡기 위한 영화 노동자들의 외침이 계속 있어왔지만, 업계도 정부도 모르쇠였고 이 살인적인 노동 조건은 지금도 노동자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다.

[세상읽기]영화계, 후졌다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한 한국의 영화 및 드라마 업계 전체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산업의 꼭대기에서 엄청난 부와 명성과 영향력을 얻은 제작자들, 감독들, 배우들 모두에게 실질적 혹은 도의적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쉬운 비유로 설명하자. 한국 자본주의의 고질적 병폐 중 하나가 바로 재벌 대기업들의 행태이다. 하청업체들과 불안정 노동자들을 쥐어짜서 비용을 절감하고 그것을 ‘혁신’의 동력으로 삼아 기업 경쟁력을 올린 뒤 그 결실을 최상층의 극소수 엘리트들이 독식하면서 중심부 정규직 노동자들에게만 약간의 분배를 행하는 것이 그 대략의 모습이다.

이러한 시스템은 시간이 갈수록 사회의 혁신과 발전을 가로막는 구닥다리 적폐로 지목되고 있다. 첫째, 이러한 유리한 위치에 탐닉하는 기업들은 제대로 된 투자 및 연구 개발을 할 유인이 사라지며, 산업 전체의 생명력과 탄력성이 아닌 최상층 재벌 일가의 이익 따먹기와 분쟁의 논리에 휘말리기 일쑤이다. 둘째, 산업적 효율성과 경쟁력의 기초가 되는 직접 생산자들을 장기적으로 열악한 조건으로 몰아넣으면서 그들의 역량과 창의성을 완전히 소진시킨다. 셋째, 그 과정에서 혐오스러울 정도의 불평등을 발생시켜 사회의 정신적 도덕적 기풍을 무너뜨리고 수많은 약자들의 삶을 절망과 고통으로 몰아넣는다. 급변하는 세계 경제의 환경에서 이런 시스템은 혁신을 낳을 수도 없으며 지속가능하지도 않다는 지적이 쏟아지는 이유이다.

한국인들은 영화 및 드라마 산업에 아낌없는 애정을 줬고, 지지를 했다. 그 결과 한국 영화계는 ‘2억 관객’의 시장을 보유하게 되었으며, 드라마 산업 또한 세계로 뻗어가고 있다. 하지만 그 결과로 나타난 산업 시스템은 지금 보고 있는 바와 같이 재벌 대기업 시스템을 방불 아니 능가하는 불평등 구조이다. 최상층의 배우들이 상상 못할 거액을 거두어 가는 가운데에 부지기수의 노동자들은 ‘연봉 몇백’으로 저 살인적 노동을 감수하고 있는 상태이다. 노동자가 계속 죽어나간다는 점에서 볼 때 영화 산업 전체가 태안화력발전소인 셈이다. 그리고 업계는 소수의 스타 배우, 작가, 감독, 제작자들에게 갈수록 의존하고 있으며, 콘텐츠의 내용은 진부하고 획일화되고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소비자인 우리들 스스로가 나서서 한국 영화를 보이콧하는 운동이라도 펼쳐야 할까? 동물 실험으로 제조된 화장품들은 시장에서 외면당한다. 동물들이 출현하는 영화에서도 영상에 담긴 동물들이 학대받지 않았다고 확인하는 자막을 올린다. 하물며 사람임에랴. 영화마다 시작 전에 스태프로 일한 노동자들이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지 않았다는 확인서를 올리도록 의무화하는 게 어떨까? 이걸 거부하는 영화는 도덕적 비난과 안 보기 운동에 직면하도록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영화 노동자들 스스로가 일종의 신디케이트를 만들어서 직접 영화 제작에 나서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하여 노동자들에게 더 나은 대우를 제공하면서 성공적인 영화들을 제작하는 사례들을 만든다면 이것이 관행으로 굳어진 영화 노동 시장의 잘못된 표준을 바꾸는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진흥을 위해 풀리는 각종 명목의 나랏돈은 이러한 영화 제작자들의 사업을 지원하는 초기 자금으로 쓸 수 있을 것이다.

내 짧은 지식과 둔한 머리를 털어내는 짓은 여기서 멈추어야겠다. 하지만 온갖 ‘쿨한’ 척은 다하는 영화계에 이 말은 해야겠다. 사회 문제를 건드리고 싶으면, 무언가 있어 보이고 싶다면, 이 부조리한 구조부터 먼저 조속히 개혁하라. 노동자들의 희생을 짓밟고 서 있는 현재의 모습은 심히 ‘언쿨’이다. 후졌다. 구리다. 쪽팔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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