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다산, 추사, 그리고 편지

2019.05.01 20:46 입력 2019.05.01 20:49 수정
조운찬 논설위원

박물관 진열장에 큼직한 옛 책 한 권이 놓였다. <연암선생 서간첩>. 겉봉에 ‘寄兒輩平書(기아배평서·아들에게 부치는 안부편지)’라고 쓰인 편지가 펼쳐져 있다. 안의현감 연암 박지원이 서울 사는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다. 서체는 단정하다. 반듯하게 사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이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연암은 <아동기년>이란 역사책을 지어 보낸다면서 동생과 함께 펼쳐보라고 충고한다. 그러면서 ‘나는 바쁜 관아 생활 중에서 글을 짓고 글씨도 쓴다면서 너희들은 뭐 하느냐’고 묻는다. 어영부영하다가는 곧바로 노년에 닥칠 것이라는 우려도 한다. 온통 자식 걱정이다. 마지막에서 반전이 일어난다. “고추장 작은 단지 하나를 보내니 밥 먹을 때마다 챙겨 먹어라. 내 손수 담근 것인데 아직 익지는 않았다.” 편지 끝에 물목을 적었다. 육포 3첩, 감떡 2첩, 고기장아찌 1통, 고추장 1단지.

[경향의 눈]연암, 다산, 추사, 그리고 편지

연암은 서울로부터 수백 리 떨어진 안의에서 근무 중이었다. 부인과는 오래전에 사별했다. 장성한 자식들이지만 안심이 되지 않았다. 연암은 편지로써 다그치고 가르쳤다. 외직을 받아 자식과 떠나 있었지만, 교육에서는 아내의 몫까지 감당해야 했다. 아내와 사별한 뒤에는 종신토록 독신으로 지냈다. 조선의 양반으로서는 흔치 않은 일이다.

연암 서간첩 옆에 다산 정약용이 부인의 치마를 잘라 만든 ‘하피첩’이 놓였다. 함께 걸린 ‘매화병제도’와 잘 어울린다. 편지 모음인 하피첩은 아들에게, 매화그림은 딸에게 주었다. ‘하피첩’은 폐지 줍던 할머니의 손수레에서 발견됐다. 유배지 다산의 경치를 읊은 ‘다산사경첩’과 함께 보물(1683-2호)로 지정됐고, 국립민속박물관이 거액(7억5000만원)을 들여 구입하는 등 얘깃거리가 많은 문화재다. 하피첩의 제작 사연이 흥미롭다. 강진 촌로들의 전언에 따르면, 다산이 초당에 머물 때 음식을 수발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다산과의 사이에 ‘홍임’이라는 딸을 두었다. 홍임 어미는 다산이 해배된 뒤 경기도 능내로 다산을 찾아갔지만 홍씨부인에게 내침을 당해 다시 강진으로 내려갔다는 얘기다. (임형택 교수가 발굴한 한시 ‘남당사(南塘詞)’는 다산 소실의 이야기다.) 일각에서는 다산의 부인 홍씨가 홍임 어미의 소식을 듣고 경고의 뜻으로 시집올 때 가져온 분홍 치마(하피)를 유배지로 보냈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다산은 부인의 의중을 아는지 모르는지 색이 바랜 치마를 잘라 편지지로 사용했다. 두 아들에게 준 편지에는 폐족의 자손으로 취해야 할 몸가짐, 교제법, 공부법 등을 담았다. 하피첩에 큰 글씨로 쓴 ‘경직의방(敬直義方:경으로써 마음을 바로잡고, 의로써 일처리를 올곧게 한다)’은 자식에게 준 교훈이자 다산의 좌우명이다. 다산은 하피첩을 쓴 뒤 8년 지나 해배됐고, 고향에서 18년을 더 살았다. 홍씨부인과는 60년을 해로했다.

추사 김정희의 부인 사랑은 연암과 다산에 비할 바 아니다. 추사는 첫 부인 한산이씨가 결혼 5년 만에 숨지자 예안이씨를 두 번째 부인으로 들였다. 부부 금실은 남부러울 정도였다. 다만 병약한 부인의 건강이 늘 걱정이었다. 추사는 한글을 모른 연암이나 알면서도 거의 사용하지 않은 다산과 달리 한글에 능숙했다. 부인과 며느리에게 보낸 한글 편지가 수십 통 남아 있다. 추사의 한글 편지는 대부분 아내에 대한 염려로 채워져 있다. 때론 반찬 투정하는 철부지의 모습도 담겼다. 이번에 선보인 한글 편지들이 그렇다. 추사는 제주 유배지에서 부인의 부음을 들었다. 슬픔을 못 이겨 쓴 추모시가 애절하다. ‘어찌하면 월하노인 시켜 저승에 호소하여/내세에는 그대와 나 바꿔 태어날까/나 죽고 그대 천리 밖에 산다면/이 마음 이 슬픔을 그대가 알 터인데’(‘도망’·悼亡)

연암과 다산, 추사는 각각 문학, 학문, 서화예술 방면에서 빛나는 우리 역사의 별이다. 그러나 일상은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대가이기에 앞서 한 아들의 아버지였고, 한 아내의 남편이었다. 그들 역시 일하고, 쉬고, 사랑하고, 미워하며 살아갔다. 때로는 울고, 갈등하고, 절망에 빠졌을 것이다. 그 일상에서 챙겨주고, 위로받으며 함께했던 이들은 다름 아닌 가족이었다. 그들은 자식에 자상했고 아내에게 따뜻했다. 박물관에 나온 정갈한 편지들이 이를 대변하고 있었다. 편지는 가족을 이어주는 메신저였다.

배려와 관심이 가족을 지키고 사회공동체를 이끈다. 삶을 만들어가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소소한 일상이다. 사소한 관심, 작은 진심으로 일상을 채워갈 때 바른 삶이 구축된다. 어린이날, 어버이날이 있는 가정의 달이다. 가족을 돌아보고 격려하는 5월이 되었으면 한다. (*연암·다산·추사의 편지는 국립전주박물관 특별전 ‘선비, 글을 넘어 마음을 전하다’에서 만날 수 있다. 6월9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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