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8·3사채동결 조치’ 국회 승인

2011.09.08 21:03

기업들 사채 일정기간 동결·탕감

1970년대 박정희 정부 시절 한국의 급속한 경제 성장의 이면에는 사채시장의 급성장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다. 기업들이 자기자본을 조달할 만큼 시장이 활성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계획이 이뤄지다 보니 필연적으로 부작용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기업의 자금수요는 급증했지만 제도권 금융기관의 자금공급은 이를 충족시키지 못하면서 사채시장이 기형적으로 커진 것이다. 주식시장에서 증권을 발행해 자기자본을 확충하고 안정적인 재무구조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했겠지만 1970년대는 주식시장의 기능이 유명무실하던 시기였다.

기업들은 은행의 단기자금을 차입하거나 사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서울의 명동과 소공동을 중심으로 100개 이상의 대규모 사채중개업소가 성행했다. 당시 사채의 가중평균금리는 월 3.84%, 연 46%로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지만 기업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야말로 돈 벌어 이자 갚기 급급한 상황이었다.

[어제의 오늘]1972년 ‘8·3사채동결 조치’ 국회 승인

사채업자들의 힘도 커졌고 자체적으로 직원을 고용해 기업들의 재무상태를 파악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특정 기업의 자금 사정이 악화돼 부실화 우려가 있다고 평가될 경우 정보를 공유해 해당기업의 어음을 교환에 회부했다. 어음을 막지 못하는 기업은 곧바로 부도 위기에 내몰렸다. 설상가상 세계경기도 불황에 빠지면서 경제성장률은 주춤했고, 정부도 나름대로 기업의 자금조달을 위해 은행을 통해 돈을 풀다보니 물가상승률은 가팔랐다. 경제지표에 빨간불이 들어왔고 기업들이 부실화하기 시작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기업들의 연쇄 부도를 막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흔히 ‘8·3사채동결 조치’로 불리는 ‘경제의 성장과 안정에 관한 긴급명령’이 그것이다. 기업들이 떠안고 있는 사채를 동결해 일정기간 갚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으로, 자유시장경제 체제하에서는 상상하기조차 쉽지 않은 초법적 조치였다.

1972년 8월2일을 기준으로 기업이 부담하는 모든 사채를 관할 세무서나 금융기관에 신고하고 신고된 사채는 3년 거치 5년 분할상환 조건의 새로운 채권채무관계로 전환하는 내용이 골자였다. 이자율도 월 1.35%, 연 16.2%로 대폭 낮췄다.

‘8·3조치’는 그해 9월9일 국회에서 승인됐다. 기업들이 사채업자에게 빌린 돈을 탕감해준 것으로 부실기업에는 엄청난 특혜를 제공한 셈이다. 정부의 비호 아래 선택받은 재벌기업들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가 됐고 뿌리 깊은 정경유착이 시작되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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