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란 “노동자가 산재 입증하는 비정상 사회”

·영화 <또 하나의 약속> 유난주 노무사의 실제 인물 이종란 노무사

넘치지 않을까. 영화 <또 하나의 약속> 개봉을 앞두고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우려했다. 혹여 현실을 과장해서 다뤘을까봐. 그래서 자칫 영화가 신파로만 흐르지 않을까 하는 우려였다. 우려와 달리 영화는 현실을 넘어서지 않았다. 외려 현실을 덜어냈다.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에서 활동해온 이종란 노무사는 “영화 만드신 분들이 그러더라. 영화는 현실보다 수위를 낮춰서 만들었다고. 우리가 겪은 일들이 너무 세서 그대로 영화에 담았다가는 보통사람들이 공감하기 어려울 것 같다면서”라고 말했다.

이종란 노무사 / 이상훈 기자

이종란 노무사 / 이상훈 기자

“피해자 현실 너무 세서 영화 수위 낮춰”

지난 2월 11일 서울 사당동 반올림 사무실에서 영화 <또 하나의 약속> 유난주 노무사의 실제 인물인 이종란 노무사를 만났다. 이 노무사는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 근무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가 그를 찾아온 2007년부터 삼성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2011년 산재 불승인 처분을 한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행정소송에서 승소하기까지 4년의 세월이 걸렸다. 행정소송에서 승소한 이후에도 싸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근로복지공단은 1심 결과에 불복해 항소했고, 삼성은 피해자들과의 협상에 제대로 응하지 않고 있다. 7년째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 지금, 영화의 개봉과 관객들의 호응은 무엇보다 큰 힘이다. 이 노무사는 “우리나라 산재제도의 문제를 이렇게 대중적으로 알릴 수 있는 기회가 없었는데 그 부분을 영화가 잘 짚어줬다. 노동자에게 산재 입증의 책임을 돌리다 보니 산재를 인정받기가 참 어렵다. 게다가 그 과정에 기업의 방해도 끼어들고. 이런 것들이 영화에 잘 드러나서 영화 만든 분들에게 참 고맙다”라고 말했다.

이 노무사가 황상기씨를 처음 만난 것은 2007년 7월이었다. 황씨는 언론, 시민단체 등을 찾아다니며 “삼성을 상대로 싸울 수 있는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 수소문하고 있었다. 수원지역 한 신문 기자가 다산인권센터로 연락을 했고, 다산인권센터는 민주노총 경기법률원에서 노동상담을 하고 있던 이 노무사에게 연락을 했다. 삼성과의 싸움은 주저되지 않았다. 하지만 반도체 산업재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수 있을지는 막연했다. 이 노무사는 “삼성의 도시 수원에서 오랫동안 노동상담을 하다 보니 삼성의 문제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반도체 노동자의 백혈병 산업재해 문제를 풀어가는 것이 녹록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주변에서는 의심만으로 대책위를 꾸리는 게 타당하냐는 목소리도 나왔다. 이 노무사에게도 우려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힘을 보태는 목소리도 있었다. “이전에 삼성 비정규직 노동자 대책위에서 일을 할 때 알고 지낸 오래된 활동가 한 분과 이 일에 대해 상의를 했다. ‘이 문제를 이렇게 추진하는 게 옳은 일일까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그 때 그 분이 그랬다. ‘분명히 피해자들이 더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진실이 설령 끝까지 밝혀지지 못한다 하더라도 노동자에게 이로운 일일 것이다’라고. 그 때 그 말이 큰 힘이 됐다.”

결국 그 말이 옳았다. 황상기씨는 수소문 끝에 고 황유미씨가 일했던 공장에서 백혈병 환자가 6명 나왔다는 것을 알아냈다. 반올림은 이를 토대로 기자회견을 했다. 기자회견 소식은 언론에 아주 짧게 보도됐다. 하지만 잠깐의 보도를 보고 거짓말처럼 백혈병 피해노동자 및 가족들이 연락을 해왔다. 피해자는 순식간에 8명으로, 13명으로, 18명으로 늘어났다. 지금 삼성반도체를 비롯, 반도체와 유사한 LCD 생산라인에서 일하는 노동자 중 암을 비롯해 암과 유사한 질환에 걸렸다는 제보는 134건에 이른다.

이종란 노무사 / 이상훈 기자

이종란 노무사 / 이상훈 기자

삼성ㆍ근로복지공단 모두 철옹성

제보가 쏟아졌지만 삼성은 철옹성이었다. 근로복지공단도 철옹성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영화에서는 노골적으로 삼성 편을 드는 근로복지공단 공무원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 노무사는 “영화에서 보면 근로복지공단 담당 공무원이 ‘삼성이 거짓말할 데로 보이냐’며 아버님의 말을 막는 모습이 나온다. 아버님한테 들었더니 당시 담당 공무원이 실제로 책상을 탁 내려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더라. 한마디로 위협한 거다”라고 말했다. 당시 담당자는 “이종란 노무사가 되도 않는 사건을 가지고 와서 귀찮게 군다”며 뒷말을 하는 것이 피해자 유족들에게 발각돼 유족들의 항의로 교체되기까지 했다. 삼성과 근로복지공단의 거리는 피해자·유족과 근로복지공단의 거리보다 훨씬 가까웠다. 당시 역학조사를 책임졌던 산업안전보건공단의 이사장이었던 노민기씨는 2012년 삼성SDI 사외이사로 간다.

악조건 속에서도 싸움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피해자들의 제보와 용기를 내 법정에 서준 증인들 덕분이다. 영화에서처럼 삼성이 10억원을 제시했지만, 이를 뿌리치고 함께 싸운 피해자도 실재한다. 재판 장면 또한 현실과 많이 다르지 않았다. 법정에서 결정적인 증언을 해준 엔지니어 또한 희귀질환 피해자였다. 이 노무사는 “사실 피해자를 증인으로 세우고 싶지는 않았다. 그 분도 희귀질환 피해자이고 또 백혈병보다 희귀질환이 증명하기가 어려워서 산재인정을 받기가 힘든데, 어쩔 수 없이 법정에 서달라고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영화 속 엔지니어가 실제 현실의 엔지니어보다 덜 멋있게 그려져 아쉽다고 했다. “영화 속 엔지니어는 증언을 결심한 이유로 ‘나도 피해를 당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실제 이 분은 ‘고 황유미씨 같은 오퍼레이터들이 가장 큰 피해자라는 걸 우리 엔지니어들은 알고 있다. 어린 그들이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는지, 그 안에서 화학물질을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 알고 있다. 그게 내내 마음 아팠다. 죄책감 때문에 한다’고 했다.”

영화는 싸움이 끝나지 않았고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한상구의 말로 끝난다. 현실도 마찬가지다. 근로복지공단은 항소를 했고 삼성은 협상에 책임감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 노무사는 삼성이 피해자에게 사과를 하고 정당한 보상을 하는 책임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반올림은 교섭요구안으로 사과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 보상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 재발 방지대책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 등을 삼성측에 보냈다. 하지만 답은 없다.

무엇보다 뼈아픈 것은 노동자가 산재를 입었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해야 하는 지금의 산재제도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노무사는 “노동자가 산재 승인 한 번 받기 위해 이 수많은 사람들이 몇 년에 걸쳐 이 공력을 쏟는 게 과연 정상적인 일인가. 일부 승소를 하긴 했지만,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원고 5명 중 3명이 산재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비참한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오는 3월 6일은 고 황유미씨 7주기다. 이 노무사는 “올해만큼은 영화를 계기로 제도적 문제의 실마리가 풀리는 해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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