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예인’들의 얼룩은 찬란한 문양이었다

2015.04.26 21:30 입력 2015.04.28 09:54 수정
김여란 기자

진옥섭 공연 ‘반락, 그 남자의 음반이야기’ 감독

▲ “당대를 빠져나가는 위대한 시간들
몸부림으로 막아보려고 하는 것
살기 위해 춤춘 기생·광대 같은 사람들
그들의 대단함을 보여주고 싶었죠”

“득음, 세상의 오르막이라는 말로만 듣던 경지. 오선보의 갈퀴에 긁히지 않는, 악보로 옮겨 담길 수 없는 유일무이한 소리들이 옛 음반들에 박혀 있던 것이죠. 역사는 속이지 않아요.”

올해 5년째 마지막으로 상연 중인 <반락, 그 남자의 음반 이야기> 기획자 진옥섭씨(51)에게 <반락>은 우리 소리가 어디까지였는지 찾는 시간이다. 20여년 전부터 전국을 헤매며 초야의 예인들을 무대 위로 끌어내 온 그이지만 이제 더 새로 만날 장인이 없어진 때, <반락>은 목마름을 해소할 또 다른 길이었다.

고음반광(狂) 10명이 모여 강연과 음반으로 꾸미는 무대 <반락>은 2010년 시작해 올해까지 5년째 열렸다. 고음반 명사들이 청계천과 장한평, 고물상을 전전하며 찾아낸 마지막 한 장의 옛 음반, 그 안의 소리를 복원하는 노정기가 담긴 소리판이다. 마지막 <반락, 그 남자의 음반 이야기>는 지난 14일부터 5월26일까지 매주 화요일 한국문화재재단이 운영하는 한국문화의집(코우스·KOUS) 무대에 오르고 있다. 현재 진씨는 코우스 예술감독이다.

전통 공연 기획자 진옥섭씨는 지난 20년간 초야의 예인들을 찾아 무대에 올려왔다. | 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전통 공연 기획자 진옥섭씨는 지난 20년간 초야의 예인들을 찾아 무대에 올려왔다. | 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진씨가 만든 다른 무대들처럼 그는 <반락>의 주인공은 못된다. “강태공이 낚싯바늘로 세월을 낚듯이 <반락>의 출연자들이 음반 위에서 시간을 낚은 것이죠. 그이들은 판을 모으고, 저는 그이들을 모아서 판을 만들었고요.” 바늘이 음반의 골을 긁듯이 시간의 지문이 감춘 예인들을 하나씩 밝혀내고 무대로 초대하는 게 진씨의 오랜 일이었다. 진씨가 쓴 책 <노름마치>(2007)에 등장하는 18명을 포함한 예인들, 대학교수나 인간문화재가 아닌, 제자 없는 기생이나 한량이었던 이들, 이제는 대다수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그이들을 향한 그리움은 옅어지지 않는다.

“사라지는 것을 국가가 부여잡고 싶어서 만들어 놓은 여러 기관이나 단체가 있지만, 그 틈새와 사각지대를 통해 당대를 빠져나가는 위대한 시간들이 있어요. 그중에 저는 몇 개를 목도하고 어떻게든지 안달하는 몸부림으로 막아보려고 해보는 것이죠. 그분들의 마지막 순간이 저의 시간과 포개질 수 있던 건 기쁨이었는지도 모르고요.” 진씨는 ‘줏대 있고 아름다운’ 그의 애인 같은 예인들을 떠올리며 눈이 자주 붉어졌다.

진씨는 아무래도 과거에 사는 사람이다. 남의 공연을 보고 뒤풀이까지 따라가서는 ‘너희들이 아무리 잘해도 그게 아니지’라며 재를 뿌려 욕먹는 일이 다반사였다. 10년 전 김수악(1926~2009)의 춤을 보고 진씨 스스로 예견해 적은 대로다. “절대의 시간을 들여다본 순간 그것이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남은 생애 동안 이 순간을 저울의 이쪽에 두고 새로 본 것을 저쪽으로 올릴 것이다.”(<노름마치> 중)

진씨는 전통 예인들이 ‘버드맨’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영화 <버드맨>에서 전통을 봤어요. 한 시절 명인이었던 이의 처참한 몰락, 그리고 그이가 한번 정말 해보고 싶은 공연. 저는 너무 많이 울었어요. 액션 블록버스터, 상업영화를 찍었던 버드맨을 사람들이 비웃는데 기생들이 그런 사람들이에요. 그이들은 자기 존재를 위해 다시 공연을 준비하면서도 꽃다발 받는 걸 무서워했어요. 살기 위해 춤췄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생계라는 이름의 근육질. 그게 그이들에게는 천한 죄이고 인생의 얼룩이었지만, 제게는 찬란한 문양이었죠. 그이들이 대단한 사람들이었다는 걸 공연으로 보여주고 싶었지요.”

진씨가 새로 관심을 두는 건 농악이다. “농악은 마을, 공동체의 힘을 보여주면서 탁월한 개인이 마지막에 꽃을 피우는 구조예요. 이게 세계문화유산이 됐지만 사물놀이처럼 유행도 없고 마땅한 변화도 없어요. 농악으로 다시 한번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도록 농악 명인들에 대해 생각해보려 합니다.”

또 하나는 아리랑의 원류를 찾는 일이다. 현재 정선군립아리랑예술단 연출감독이기도 한 진씨는 “아리랑을 세계에 퍼트리는 일은 많은 이들이 하고 있는데, 그 원형과 본향을 찾아 근원적인 아름다움을 알려주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올해 진씨는 크고 작은 공연 60여개를 올린다. 코우스 주관으로 5~6월 중 황해도 굿을 한판 벌이고, 하반기에는 매주 화요일 전통 춤판 <화(火)무>를 열 예정이다. 궁에서 펼치는 고궁 명무전도 준비 중이다. 지난해 매진 사례를 이끌었던 진씨의 토크콘서트 ‘무용담’도 앙코르 공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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